그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곳에 있었다
김수미(동국대 연극과 박사과정, 세종문화회관 <문화공간> 편집장)
일시 2013년 4월 6일 3시(4월 11-12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공연 예정)
장소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안무 제롬 벨
극단 극단 호라(취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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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 글씨 위의 ‘가로긋기’는 드러내는 동시에 지우겠다는 필자의 이중적 의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고르는 동안 생각했다. 오늘은 어디에서 누구를 보게 되지?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적절한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습관 때문이다. 오전에는 원로학자의 강연을 듣고, 오후에는 극장을 가기로 한 일정이었다. 단정한 차림새가 좋겠다, 결국 골라낸 옷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A자 스커트에 얌전한 톤의 니트와 가디건, 약간 포인트가 될 만한 클림트 그림의 스카프도 둘렀다. 스타킹을 신고 뾰족한 구두를 신고, 색깔을 맞춰 고른 작은 가방을 멨다.
그렇게 갖춰 입은 모양새로 내가 마주하고 앉은 무대는 장애를 가진 배우 10명이 만든 연극이었다. 언제부터 입고 있던 옷인지도 모르겠는, 특히 무릎이 흉물스럽게 불거졌고 색깔도 무척이나 촌스러워 보이는 추리닝 차림의 배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이는 아예 신발을 벗고 양말만(그것조차 촌스러운 색깔로) 신고 나왔다.
관객인 나는 한껏 사회적 지위와 활동 영역을 고려해서 고민한 정중한 옷차림새를 갖추고 앉아 있던 반면에 무대 위에서 나를 맞은 그들에게는 그런 고려가 안중에 없었다. 적어도 옷이 사회적 약속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충실했던 반면 그들은 시큰둥했던 셈이다.
그들의 계산 없는 차림새는 상대적으로 말끔하게 계산된 나의 옷차림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더 나는 내가 잘 차려입은 옷이 불편해졌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 심하게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처음보다 훨씬) 지저분해져버린 추리닝은 – 군더더기 같은 외부 시선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듯 무척이나 편안해보였다.
제롬 벨은 지적장애인 10명과 함께 5개의 장면으로 엮은 90분가량의 작품을 보여줬다. 한 사람씩 무대로 나와 중앙에 서 있다가 들어가기(존재하기), 이름 나이 직업을 설명하기(드러내기), 자신의 병명을 말하기(충돌하기), 준비한 춤 보여주기(화해하기), 모두 다 일렬로 인사하기(사라지기)가 그것이다.
그들이 한 사람씩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침묵 속에서 그들과 마주한다. 어떤 배우는 서 있는 동안 객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어떤 배우는 선생님 앞에 불려나온 학생처럼 미안한 자세로 애매하게 서 있다. 어떤 배우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서 있고, 어떤 배우는 당당하게 걸어 나오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들어가 버렸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자세와 시선은 적어도 ‘사각의 틀’(그것이 네모난 무대이든지 비장애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세계이든지) 속에서 그들 각자가 존재하고 있는 방식처럼 읽힌다. 관객은 낯설어 보이는 그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행하고 있는 응시의 ‘폭력’과 마주한다. ‘본다’는 것의 의식적인 행위가 때로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름과 나이, 직업을 설명하는 두 번째 장면에서 관객은 한 번 더 스스로가 지닌 무의식의 폭력을 경험한다. 배우들은 열심히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 사람인지, 몇 년이나 살아왔는지를 설명하지만, 관객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혹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그것이 별 ‘가치’가 없음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 있음과 없음, 쓸모 있음과 없음의 경계 사이에 배우를 무의식적으로 구분해놓고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름을 흘려듣는다 –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만일 무대 위에 제롬 벨이 나와서 이름과 나이와 직업을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그의 몸짓과 숨소리 하나마저 흘리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노력했을 우리의 무의식적인 ‘애씀’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그것은 교육이나 사회적인 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가치의 틀 안에서 훈련되어 온 익숙한 것들인데, 그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되는 동안 새삼 그 무의식의 지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에는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적인 ‘가치 구분’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점에 직면하게 된다.
배우들이 자신의 병명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배우뿐 아니라 관객까지도 의식과 무의식이 충돌하는 지점을 경험한다.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겉으로 드러내고 인정하는 과정은 보여주기도 들어주기도 쉽지 않다. 애써 들여다보며 인지하려고 애쓰지 않던 존재의 미숙함을 직시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 수용하기 어려운 충격이 된다(한 배우는 ‘미안하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하기도 했다).
배우 각자가 춤을 추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관객은 결국 정점으로 치닫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유난히 짧은 팔과 퉁퉁한 다리를 가진 배우들이, 출렁이는 뱃살 때문에 점프도 잘 못하는 그들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어떤 진실한 언어보다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들의 몸을 통해 객석으로 전달되는 것은 ‘절실함’이다. 그들이 품고 있는 욕망의 갈구는 보다 덜 오염된 동작을 통해 현현되었고, 그것은 절실함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였다. 극적인 절실함을 응시하던 나는 고요한 감정을 지나 숙연해졌다. 나는 작은 세상 속에 갇혀있었고, 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에 있었다.
내 몸의 어딘가에 그들처럼 절실하게 갈구하는 마음이 있었고, 조각처럼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한 그들의 몸 안에는 내 기형적인 마음이 투명하게 담겼다. 절실함을 통해 하나가 된 배우와 나는 폭력의 가해와 피해를 넘어 화해의 공간에서 동등하게 공존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무대를 향한 나의 뜨거운 박수가, 허세를 가장한 관용인가 따위를 의심하던 무가치한 의식에서 벗어나 비틀어진 세계 속에서 함께 유영하는 가련한 인간으로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