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빨간 버스/ 류호선

 

청소년 연극《빨간 버스》에 나타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의 의미
-청소년의 죽음을 바라보는 연출가의 시선-

 

류호선(동화작가, 초림초 교사)

 

 

“사람이 죽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을 가질 때는 삶의 고뇌가 이미 사람이 극복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었을 때다.

– 에우리피데스”

 

우리나라 청소년 사인의 1위는 사고도 질병도 자연 재해도 아닌 그들 스스로가 택한 죽음자살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교 기준으로 선호해 마지않는 OECD 가입국 10-30세의 자살률은 1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순위에 집착하는 우리 문화는 이러한 순위를 종종 방송에 내 보내며 이 나라의 청소년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 청소년 자살률(15-19세)은 2000년 13.6%에서 2010년 28%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뉴스와 많은 신문지상에 발표되었던 이제는 놀랍지조차 않은 덤덤해진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듯 2011년 5월 야심차게 출발한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극 연구소(소장 최영애) 역시 세 번째 작품 박근형 연출의 《빨간 버스》는 청소년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청소년극, 청소년 문학, 혹은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등 많은 작품 속에서 허무한 죽음과 자살은 더 이상 색다른 소재가 아닌, 한편으로는 진부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청소년의 죽음과 자살이 진부하다라는 사실 자체가 매우 안타까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청소년의 현실을 담고 있는 청소년 연극은 현실보다 더 치열하게 주제를 담고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는 삶 속에서 죽음만큼 치열하고 가장 막바지에 도달한 극한 상황이 또 있을까만은 그러하기에 더욱 다루기 어려운 주제가 죽음이다. 청소년 연극에 담긴 죽음 역시 죽음에 다다르게 되는 그들의 삶의 고뇌가 앞선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청소년들이 처한 한계를 넘어서 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번역된 외국의 청소년극 혹은 청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을 보더라도 삶과 죽음 그리고 자살에 대한 문제들이 심도 깊게 등장하고 있다. 2010년 브로드웨이에서 해리포터의 주인공인 다니엘 래드클리의 《에쿠우스》 역시 강렬한 죽음과 집착이 등장한다. 말을 인격화하여 집착하고 결국 말을 죽게 만드는 소년의 불안한 내면이 청소년의 심리적 표상을 말이라는 상징적인 매개체를 통해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청소년 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성적인 묘사와 소년의 정사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이러한 표현의 제약들로 인해 청소년연극의 한계성은 연출가에게 깊은 고민과 커다란 숙제를 안겨 준다. 자살률이 높은 북유럽의 청소년 문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나라 청소년 연극 안에서의 죽음이 주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깡마른 마야》, 《충분히 아름다운 너에게》등이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들을 청소년의 시선에서 풀어놓는다. 《깡마른 마야》의 경우 거식증에 걸린 16살 소녀의 이야기로, 제대로 음식 섭취가 되지 않아 자신의 몸을 혐오하는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다. 몸이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 되지 않으면서 주인공은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은연중에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들을 내어놓는다. 독자는 그러한 작품을 보면서 평범하지 못한 주인공 스스로가 느끼는 혐오감에 충분히 공감 한다. 《충분히 아름다운 너에게》의 작가는 한국 입양아로 노르웨이에서 성장기를 보낸 쉰네 순 뢰에스이다. 17살 동갑내기 두 소녀가 남에게 보이지 못하는 상처를 들춰 보이며 죽음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청소년극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살고 싶은 욕망의 미혼모 요한네와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는 제니, 양극단에 선 그들은 한 번도 조우하지 못했지만 7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죽음을 그들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토로하고 있다. 작가의 전작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침으로 꽃을 먹는 17살 소녀 미아의 이야기, 주인공 소녀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왜 꽃을 먹어야 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병원에 들어가는 가을부터 시작해 꽃을 먹어가며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소녀의 내면을 작가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이야기한다. 이렇듯 유럽의 청소년 문학 안에는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와 자살에 대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청소년들 삶 안에 투영 시켜 말한다. 에둘러 빙 돌아가지 않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의 죽음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측면도 없지 않다. 우리나라 청소년 극이나 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인공의 직접적인 죽음 보다는 주변인물의 죽음에서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또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박근형의 《빨간버스》에서는 과감하게도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이 죽는다. 그것도 사고로 허무하게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이 끝이 난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주는 매력은 분명 있다. 하지만 청소년 연극 《빨간버스》에서 보여주는 죽음의 의미는 어처구니조차 없는 죽음의 결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내용의 상투성은 제외하더라도 박근형 연극 안에서 박근형만이 보여주는 낯선 화법과 그만의 공포스러운 거리두기가 매우 구태의연했다. 아이를 출산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연극뿐 아니라 상업적 대중매체를 통해 빈번하게 접해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더 이상 깊이 있는 의미 전달을 하기도 어려운 극 속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근형의 전작들이 그러한 진부함을 과감히 탈피하는 모습들을 보여 왔기에 청소년극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매우 기대했었다. 미리 접한 보도 자료와 칭찬일색의 기사들은 그러한 기대치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뻔한 동아리 이야기, 선생님과의 갈등, 부모님의 이혼, 어려운 가정 형편, 청소년 작품에 등장할 수 있는 갈등이라는 모든 요소를 한자리에 펼쳐 비벼 버린,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되어 정작 청소년을 위해 만들었다고는 하나 청소년들에게조차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었다. 낯선 거리두기를 선생님의 집요한 사랑으로 표현하기에는 서툴렀으며 음악동아리 대회가 주는 희망적인 모습, 그리고 항상 등장하는 쿨하고 능력 있는 남자 친구, 이 모든 것이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하는 큰 의문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청소년 극은 성인이 보는 작품보다 깊이가 낮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그들의 눈높이에 더 다가가야 하며 그들이 가진 치열한 고민들을 다시 한 번 작품 안에 녹여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의 전작들 청춘예찬의 주인공 청년과 간질을 가진 청년의 여자 친구가 지금의 불안한 청소년의 모습과 더 중첩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주인공 세진이 혼자 바닷가 콘도에서 아이의 탯줄을 자르는 장면에서 극을 보는 청소년들은 배우와 함께 아주 잠시 몰입이 되지만 극의 전개는 그러한 몰입을 방해한다. 서사가 중심인 듯하나 뚝뚝 끊기며 단절되기도 하고,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나 그렇다고 치열한 시대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도 아닌 박근형 만의 화법이 《빨간버스》안에서는 매우 어색하게 나타난다. 마지막 장면은 신파 연극처럼 끝이 난다. 사고로 죽은 세진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온 동아리 친구들이 자신들이 대회에 나가서 부를 노래를 부르며 관객들을 향해 슬퍼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극을 보는 청소년들은 슬퍼야 한다고 외치는 배우들에게 이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히려 묻고 싶다고 했다. 죽기 전에 세진이 외치는 ‘모두가 타는 노란버스가 아니고 싶다’가 결말이냐며 갸우뚱 거리는 청소년들의 시선을 연극을 만드는 연출가나 극본을 쓰는 극작가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이 중고등학생이라고 전부 청소년 연극이 아니며 청소년이 극 안에서 누구인가 죽어야 했다면 그 죽음이 주는 의미가 극을 보는 관객층인 청소년들에게 충분히 납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죽기 전에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작가의 교훈적인 주제(획일적인 교육과 규율을 상징하는 노란버스)를 스테레오타입처럼 외치고 죽는다면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기 매우 힘들다. 독립영화 《파수꾼》 역시 청소년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주제의식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낯설면서도 세련된 작품이다. 학교폭력으로 자살해야 했던 주인공 재희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큰 반전이 있다. 재희는 학교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였던 학생이다. 청소년의 폭력은 가해자 역시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큰 주제를 영화에서 어느 누구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아들의 죽음을 쫓아가는 아버지의 공허한 시선만이 영화 안에 흐르고 있다. 이런 영화를 보았던 청소년들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작품을 보러 일부러 시간을 들여 극장을 찾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올해 보았던 작품 중 청소년의 죽음을 이야기한 수작은 일본 극작가 겸 연출 하타사와 세이고의 작품 《니 부모의 얼굴을 보고 싶다》였다. 낭독 공연 후 희곡이 소설로 완성되어 출판 되었다. 제목 그대로 한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죽음과 관련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학교에 모인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죽으면서 유서에 다섯 학생의 이름을 써놓았다. 부모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아이들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 한다. 결국 자신들의 아이들 때문에 죽어야 했던 소녀의 유서를 태우며 어떻게 하든 자신의 아이는 이 죽음의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부모들의 지극히 이기적이며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아이들의 폭력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한명의 아이도 작품에 나오지 않지만 분명한 청소년을 위한 연극이었다. 공연 기간이 짧았던 것이 매우 아쉬운 작품이었으며 이런 청소년 공연이 학교에서 공연 된다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 매우 관심이 가게 된 작품이었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의 문제가 더 이상 폭력의 가해자인 학생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가해자를 포함한 학교, 교사, 그 죽음을 목격한 가족,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만든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연극은 말하고 있다. 극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으며 보고 난 후에도 죽은 학생의 유서가 한동안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린 청소년의 죽음은 비극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런 극단적인 비극 안에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청소년극은 그 방향성을 함께 담고 있어야 한다. 주변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죽음으로 인한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청소년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궤적들을 깊이 있게 작품 안에서 찾아 낼 수 있는 청소년극들이 나와 주어야 한다. 청소년극이 그 길을 잃고 헤맨다면 그러한 연극을 자양분으로 하는 다른 범주의 예술(영화나 드라마)역시 함께 우왕좌왕할 수 도 있다. 청소년 연극을 준비하는 많은 희곡작가와 연출가들은 지금까지 나와 있는 우리 청소년 문학들을 더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청소년들의 현실을 보다 더 공감해야 할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한 말이지만, 상투적인 이야기와 식상한 결말은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훌륭한 극본 역시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청소년을 위한 그들의 진정한 이야기일 때 가뜩이나 문화 예술 공간에서 멀어진 우리의 청소년들이 훌륭한 작품 안에서의 진정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눈은 정확하다. 재미있고 없음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아는 것이다. 아름다운 청소년 시기를 운운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청소년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연극 작품 안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그들의 삶에 적용하며 그들 모두 느끼는 삶에 대한 성찰을 깊이 있게 할 수 있도록 청소년 연극은 작은 이정표를 찍어 주어야 한다. 물론 그 작은 이정표가 그들의 삶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화살표를 내보일 수도 있고, 혹은 전혀 다른 방향점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와 죽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결코 성인의 것과 밀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청소년 연극을 만드는 이들은 알아야 한다. 청소년 연극은 보다 확연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그들 안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울러야 할 것이다. 그 작품을 보는 관객이 노인이든,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작품의 완성도는 깊고 충실해야만 한다.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청소년 극이 나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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