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복지법이 만능인가?
우상전(연극배우)
필요한 건 ‘고용보험’
어느 날 집에 근로복지공단에서 ‘예술인 산재보험 가입신청서’가 안내장과 함께 날아왔다. 물론 보험이란 삶에서 너무나 필요하다. 활동 중에 재해를 당하면 누구나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니 조금도 나쁠 게 없다.
하지만 매월 급여를 받지도 못하는 연극인들 입장에서는 부담도 가고 조금은 난감하기도 할 것이다. 급여를 받으면 매월 정기적으로 자동으로 납입이 가능하지만 그렇지도 않으면 일부러 납입을 해야 하고, 또 장기적으로 수입이 없을 때는 이마저도 엄청난 부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쩐지 보험에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먼저 고용보험이 시행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런 수입이 없이 놀 때도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고용보험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첫술에 배부를까’라는 생각에서 이런 혜택이라도 연극인들이 반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갈등이 생긴 게 사실이다.
사실 산재보험이야 영화나 TV에서 촬영 중에 (야외에서) 말도 타고 무술도 하는 연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긴요할 수 있다. 또 무대에서 춤을 추는 뮤지컬배우들에게도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로 소극장에서 활동을 하는 연극배우들에게 솔직히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기대하기 힘든 ‘복지혜택’
사실 연극에서 활동을 하면 너무나 수입이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이런 글을 써도 수입은 단 한 푼도 생기지 않는다. 예전에 모노드라마를 연출한 적이 있는데, 제작자로부터 단 푼의 개런티도 받지 못했다. 물론 연습 진행비, 교통비조차도… 그런데도 나는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다. 그때는 내가 국립극단의 단원이어서 ‘월급’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고 지금은 ‘연금’이라는 고정급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바로 예술인 복지법에 관한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연극 활동을 해서는 수입을 기대하기 힘든 연극인들이 생존을 영위하려면 다음의 방법을 취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1. 본인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즉 ‘투잡’이 있어야 한다.
2. 부모님(또는 배우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3. 국가(지자체)가 베푸는 사회안전망으로서의 복지 혜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연극인이 공연활동을 지속하려면 연극자체에 대한 단순한 제작지원이 아니라, 연극 종사자에 대한 개인적인 지원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연극인들이 현실적으로 ‘복지법’의 혜택을 보기에는 요원할 것 같다. 복지법보다는 차라리 늙어서 노약자의 혜택을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복지법은 우선 예산을 배정 받기도 어려울 것 같고, 설령 예산을 배정받는다고 해도 겨우 연명하기도 벅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부가 돈 쓸 곳은 많고 세계경제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최소한 10여 년간은 우리는 개인을 위한 복지혜택은 잊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대책을 세우고 정부에 건의를 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도 그럴게, 우선 연극인들이 노약자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니면서 복지법을 운운하는 게 일단은 거북스럽다. 가장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한 상대적으로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인 사람들이 곧바로 예술인 복지법으로 혜택을 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솔직히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연극만 불황이지 주변의 뮤지컬을 비롯해, 영화, TV 등은 역사상 최고의 호황을 맞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예술을 한다고 복지혜택을 달라는 게 어쩐지 개운치가 않다. 그렇다면 연극인들도 정부의 정책만 기대할 게 아니라 스스로 무슨 대책이라도 강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게 더 현명하고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예술의 양극화
한국은행은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국제수지 가운데 개인, 문화, 오락서비스의 수지가 약 1000억 원에 가까운 흑자를 냈다고 발표했다. 영화, TV, 프로그램, 애니메이션, 음악 등 한류산업이 이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는 문화 수입극에서 수출국으로 대전환을 이루었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른바 순수예술은 생계유지도 하기 힘든 지경에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가장 필요한 게 문화예술계가 정부의 도움으로 ‘동반성장’을 도모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계의 ‘동반성장’
지금 나라가 ‘동반성장’으로 어수선하다. 상생과 ‘골목상권보호’를 내세운 이 정책은 논란도 논란이지만 부작용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예전에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유모차를 지정하자 결국 외국의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유모차가 한국 시장을 석권해버렸다는 둥 시끄럽기 그지없다.
어느 정책이나 모두를 다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가령 대학의 ‘반값등록금’만 해도 그렇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넉넉하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시행을 해야 아무런 부작용이 없지, 한국처럼 모두가 대학을 다녀야 하는 나라에서는 우선 엄청난 복지비용이 소요되고, 점점 교육열만 부추기게 되어 당사자들은 취직하기만 힘들어질 뿐이고, 대학만 비대해지는 부작용을 더욱 심화시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또 국공립극단에서 단원제를 두는 것만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정착한 나라에서는 단원을 축출해도 생존에 지장을 받지 않아 무리가 따르지 않지만, 우리처럼 사회안전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축출하는 것은 당연히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이로 인한 갈등과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합당한 여건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시행하면 말썽이 뒤따르고 부작용, 반작용이 생기게 마련일 것이다.
‘생계형’ 연극인
이렇듯 예술인복지법도 부작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 노약자, 또는 아직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힘든 청소년들이 받아야 하는 혜택을 건전한 정신과 육체를 가진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젊은 예술인이 혜택을 받는 것은 몇 가지 부작용이 염려되는 게 사실이다.
예술인복지법의 혜택이 예술가를 이른바 ‘생계형 예술가’로 만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국립극단에서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아무리 예술활동을 한다 해도 월급을 받게 되면 일종의 ‘샐러리맨 증후군’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치열함이 사라진 생활인으로서의 매너리즘에 빠져 나태한 ‘생계형’ 예술가가 되기 쉬운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복지나 지원이 예술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자칫하면 오히려 질적 저하에 공헌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연극인 복지의 최고봉으로 여기는 프랑스만 해도 아비뇽에서 단편적으로 본 프랑스 연극이긴 하지만, 전혀 별로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어차피 연극은 흥행이 안 돼!’ 또는 세상에서 ‘연극을 통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없어’하면서 지원이나 복지타령만 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연극계에 번진 전반적인 나태함이나 무관심, 이기적 태도도 나름대로 지원이 활성화된 후에 나타난 현상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매년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최고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들이 교수로 배치되어 있는 대학마저도 자기들의 졸업생들이 그저 손 놓고 정부의 복지혜택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재학생들은 기획사를 기웃거리면서 휴학을 밥 먹듯 하고 있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별도로 레슨비를 지출하며 개인교습에 열을 내고 있는 현실이나, 기성연극인들마저도 영화에 출연하는 게 ‘꿈’이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 설령 복지혜택이 확대된다고 해도 이게 연극인에게 어떻게 기능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런 게 현실이라면 우리가 내세울 최선의 방법 중에 하나는 지금 한국 경제계를 강타하고 있는 ‘동반성장’을 우리도 타 장르와 도모해서 해결책을 찾는 게 더 합당한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존을 위한 지나친 노력으로 예술성이 말살되는 악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무능함도 지나칠 수 없는 게 인간사다.
그렇다면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생존과 예술적 성과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동반성장’의 해법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뇌는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연극인의 ‘동반성장’
연극인들이 복지혜택을 기다리기보다는 영화와 TV 또는 인터넷매체 등과 ‘동반성장’을 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어떨지? 그리면 경제처럼 부작용이나 상호간에 갈등도 생기지 않고 그들 매체와 진정한 상생이 이루어지면서 연극인들도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가장 쉽고 용이하면서 또 수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연극배우들이 먼저 타 장르와 ‘동반성장’을 꾀하는 것이다. 지금도 영화(TV포함)에서 활동하는 연기자의 대부분을 연극배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현재의 문제점은 일단 그 쪽에 진출하면 연극계를 떠나게 되는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동반성장’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 매체를 오가면서 배우로서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동반성장’이 이루어진다면 좋지 않을까. 지금은 영화에 진출하는 배우가 소수이고, 영화연기가 가능한 배우가 소수여서 이런 부작용이 당연하지만, 많은 인력이 영화에 종사하게 되면 이런 현상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극배우들이 ‘카메라(영상)연기’가 가능하도록 훈련된다면 누구나 필요에 따라(적역을 맡아) 영화를 하다가 다시금 연극무대로 돌아올 수 있게 될 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우교류의 선순환을 도모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일이 없을 때는 연극에 출연하고 영화배우들도 무대연기를 익혀 일이 없으면 무대에 서는 양립이 가능해지는 방식이다. 그렇게 되면 구태여 연극배우들이 영화배우로 남아 있을 이유도 없고 누구나 적역을 찾아 양 매체를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배우들도 무대연기가 가능하도록 훈련되고 경험을 쌓게 되면 자연스럽게 양 매체를 오가게 되어 나이가 들어 스타자리에서 밀려나도 자살을 꿈꾸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 매체를 오가면서 연기가 가능하도록 먼저 연극 쪽에서 교육과 훈련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먼저 연극 쪽이 연기의 스타일과 교육훈련 패턴을 새롭게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이것은 무대연기가 영상연기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연극계가 (지금처럼) 처음부터 하기 힘든 무대연기를 목표로 하지 않고 화술에서부터 ‘카메라연기’가 가능하도록 우선 훈련하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설명을 해보기로 하자.
현재의 연극배우들은 (물론 연기학원이나 대학교육도) 처음부터 무대에서 ‘소리를 지르는’ 연기를 시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부터 ‘카메라(영상)연기’와 빗나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문어체가 강한 번역극 등으로 연기를 시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장르의 연기가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카메라(영상)연기’ 특징
* 대본이 구어체- 일상처럼 짧은 대사를 선호한다.
* 연기자 자신의 이미지가 곧 역할이 되는 경향이 강해서 일부러 캐릭터를 만들 필요가 없 다. 역할을 위해서는 비주얼이 앞선다.
* 음향기기를 통해 목소리를 내서 무대발성을 하지 않아도 된다.
* 걷기와 같은 움직임이 거의 없다.
* 표정연기가 주를 이룬다.
* 자연스러운 말하기(흔히 우리말이라고 하는)를 잘하면 된다.
* 장소별로 촬영을 해서 극적(내용) 연결이 되지 않아서 순발력을 필요로 한다.
* 편집이 가능해 좋은 연기만 선택해 보여줄 수 있다.
* 연습 없이 현장중심이다.
‘무대(연극)연기’의 특징
* 대본이 문어체를 사용하고 대본의 기능이 아주 강한다. – 번역극도 있다.
* 인물(성격)창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연기자에게 변신이 요구되기도 한다.
* 무대발성을 해야 한다.
* 연기자가 철저히 대사를 암기해야 한다. -연기를 시작하면 편집이 불가능하다.
* 대본의 요구대로 (장면의 순서대로) 연기를 해야 한다.
* 연기자의 이미지(생김새)보다 발성(목소리), 화술과 같은 테크닉이 중요하다.
* 무대에서 걷고, 제스처를 많이 사용한다. – 신체를 많이 사용 한다. .
* 연기자의 전신이 관객에게 다 노출되므로 모든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 오랫동안 연습을 한다.
‘카메라연기’를 위한 충고
무대(연극)연기를 잊어라!
연극배우들이 ‘카메라연기’를 습득하는데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연극연기를 위한 습관들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물론 연기가 절차기억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어서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더 잊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1. 소리 지르지 말라! 연극배우들은 공간과 상대배우나 객석의 관객과의 거리감을 감지하고 또 전달을 목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카메라연기’에서는 연기를 하는 상대가 바로 ‘마이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먼저 영상연기에서 목소리를 높이면 연기자가 섬세한 감정을 잡기 힘들어지고, 입을 크게 움직여 화면에서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또 대사암기에도 지장을 받게 된다. 절대로 해서 안 되는 게 목소리를 크게 내려고 드는 것이다. 마이크가 너무 가까이 있으므로 항상 마이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말이 그렇지 습관에 젖은 연극배우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다. 지금 경상도 억양을 가진 배우들이 맹활약하는 것도 소리를 높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이 연극처럼 소리를 높이면 톤과 억양이 세서 배우로서 기능을 하기 힘들 것이다.
2. ‘카메라연기’는 장소를 쫒아 진행된다. 무대연기가 시간의 흐름을 쫒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맨 첫 장면과 끝 장면을 같이 찍을 수 있다. 따라서 연기도 장소에 따라 해야 한다. 이는 연기자에게 순발력을 발휘하도록 요구하게 한다. 그래서 연기자는 어느 장면을 찍을지 항상 미리 준비하고 파악해야 한다.
3. 인물창조를 포기하라, 연극처럼 인물을 상정하고 어떻게 창조할지 고민하지 말라. 캐스팅에서부터 이미지를 고려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고수하면 된다. 연극배우들은 연극식으로 이미지를 만드는데 너무나 심혈을 기울여 오히려 이미지를 망치고 어색한 연기를 하게 되는 게 현실이다.
4. ‘카메라연기’의 백미는 ‘편집’에 있다. 따라서 우선 가장 좋은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연기를 해도 된다. 오히려 NG를 내면서 좋은 연기가 나오도록 하는 게 더 이롭다. 무대연기처럼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해서 연극배우들은 손해를 본다. 배우 김수미는 대사(내용)도 매번 다르게 하는데 인기만 좋다. 그건 편집을 해서 좋은 연기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5. ‘카메라연기’에서는 대사를 암기하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꼭 암기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도 있지만, 오히려 암기를 대충하는 게 더 이로운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편집’이 가능한 곳에서는 연극처럼 외워가지고 미리 고착시키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대사를 암기하도록 하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편집의 이점을 요령 있게 살리는 게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연극처럼 차례대로 몽땅 암기하려고 하면 괜히 긴장만 유발해 오히려 연기에 방해가 될 뿐이다.
6. ‘카메라공포증’을 염려하지 말라! 카메라에 익숙해지면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울렁증도 전신을 움직이며 관객에게 모든 것을 노출해야 하는 무대공포증이 더 세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다른 디테일한 것은 연습장에서 눈만 껌벅거리면서 앉아있는 연극연출자들과 달리, 원래 카메라가 기계의 작동이라 감독들이 충분히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조금 숙달하면 기계의 작동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연기요령만 잘 터득하면 무대처럼 오랜 기간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물론 움직일 것도 없으며, 대사도 소근 대면 되는, 좌우간 연극무대보다 훨씬 연기하기 좋은 이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돈벌이도 잘 안 되는 무대연기에 매진하려고 하지 말고 ‘카메라연기’를 습득한 후에 ‘진정한 연기’에 대한 갈망이 생기면 연극연기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또 무대연기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연기가 관객들의 호응이 좋아서 ‘카메라연기’를 통해 자연스러움을 먼저 익히는 게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두 장르를 오고가면서 연기를 하려면
두 장르를 오고가면서 연기를 꿈꾸는 배우들은 꼭 이걸 명심해야 한다. 한마디로 내가 주장하는 ‘발성의 5원칙’을 숙지하는 것이다. 왜냐면 ‘카메라연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러움을 덕목으로 해서 그냥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게 습관화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게 절차기억에 의해 고정되면 무대연기, 특히 대극장 연기에서는 절대로 좋은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해서는 무대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대사 전달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제대로 된 발성을 익히고 장르에 따라 목소리를 조절하는 능력만 키우면 얼마든지 두 장르를 오고가면서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동반성장’의 수혜를 입을 수 있다.
무대연기의 쾌감
처음부터 무대연기를 하면 ‘카메라연기’를 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카메라연기’를 하다가 무대연기를 하기는 아주 용이하다. 그것은 무대연기가 배우들에게 압박감이나 결벽증을 일으키기 좋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배우를 힘들게 하는 게 무대발성을 하려다가 몸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무대연기로 연기를 시작할 때는 무대발성과 인물창조로 인해 불필요한 힘이 몸에 들어가지 않게 훈련을 하는 게 필수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작단계에서부터 즉흥훈련을 위한 과정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즉흥훈련으로 몸과 화술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 즉 일상처럼 힘이 들어갈 때만 힘을 쓰고 일반적으로는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대연기가 기피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카메라에서 스타 소리를 들어도 무대연기를 해보지 않으면 평생 연기의 맛을 모를 수 있다. 순간적으로 표정만 짓는 ‘카메라연기’와 달리 무대연기는 연기자가 지속적으로 무대에서 극중인물이 되어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연기자가 엄청난 쾌감과 카다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연기자라면 무대연기를 해보지 않고서는 배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라이브’로 극장에서 관객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갖는 무대연기는 ‘카메라연기’로는 맛볼 수 있는 엄청난 쾌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카메라연기’만 고집하다가 연기자의 비주얼에 그만 실증을 느껴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는 ‘단기성 배우’보다는 – 시청자들이 오랫동안 연기자의 얼굴을 보게 되면 쉽게 실증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것 – 나중에 무대배우로 전향해 오랫동안 배우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야말로 보람 있는 인생설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동반성장’의 정신으로 교육과 훈련의 패턴을 자연스럽게 바꾸면 수선을 떨지 않고 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카메라연기’와 무대연기가 가능해질 수 있다.
‘동반성장’의 장점
일본에서는 무대에서 매력적인 중년의 여배우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경력을 보면 ‘최고 흥행장르’인 상업극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배출한 은퇴한 여배우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그곳에 몸담았다가 은퇴를 하면(결혼을 해도 은퇴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극무대의 배우로 변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매력적인 여배우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동반성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런 ‘동반성장’이 없어 TV에서도 보톡스(성형주사)를 맞아 말을 할 때도 볼조차 움직이지 않는 인조인간(?)의 여배우만을 보게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는 ‘동반성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연극만으로 배우를 지탱하려고 하거나 카메라배우만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초고령화시대’에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재양성과 콘텐츠의 개발
먼저 조계종 승가대학원장을 지낸 무비스님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어느 시대나 앞선 선각자가 있어야 합니다. 인재가 없이는 미래가 없습니다. 높은 안목을 가진 인재를 끊임없이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불교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불교를 ‘한국연극’으로만 바꾸면 될 것이다.
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조직이든 외부 변화속도가 내부의 변화속도를 추월하면 그 조직은 이미 종말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 “공산권이 무너진 게 혁명이론이 부실해 그런 게 아니라 먹고사는 대중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연극대학을 향해 ‘죄짓지 말라’고 외치는 것도 대학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인재양성을 위한 노력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은 한명의 천재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사실 예술에는 창작이 쉬운 장르가 있고 어려운 장르가 있다. 가령 클래식 작곡이나 희곡의 창작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기에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장르다. 모차르트나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가 아니면 쉽지 않다. 하지만 추상적 표현이 얼마든지 가능한 무용의 창작이나 현대미술은 비교적 쉽다.
백남준도 생전에 이런 말로 이를 설명했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음악가는 고작 3천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8만 명가량 된다.”그는 이만큼 음악 창작이 어렵고 힘들다고 했다.
가령 같은 장르라도 발레리나(무용수)는 비교적 양성이 쉽지만 발레 안무가에게는 고도의 창작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한국의 춤꾼들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지만 여전히 안무가는 러시아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장르와 기능에 따라 난이도가 다른 게 현실이다. 따라서 연극인들도 고도로 어려운 ‘창작 장르’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비교적 창작이 용이하고 돈벌이가 쉬운 장르로 콘텐츠를 개발해 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의 교과과정과 교수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지나친 문학성과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관객들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의 개발이나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령 관객과 쉽게 밀착이 가능한 거리극의 개발이나 가족극, 코믹 냄새가 강한 사극이나 정치(또는 섹스)풍자극 같은 장르의 개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상업주의’니 하면서 비난할 게 아니라, 또 설령 처음에는 완성도가 좀 떨어져도 흥분할 게 아니라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젊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실패한(?) 기성연극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연극제’도 이제 변신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전혀 새로움이 없는 기성연극인들을 모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의도라면 TV의 막장드라마의 수준이 아니면 슬쩍 눈을 감아주는 아량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콘텐츠 개발이 그들에게 가능해질 것이다.
어느 대학 강사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해보겠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대학은 강의실에 들어서면 인물이 훤한 남녀 탤런트들과 그 지망생들로 가득 차 있는데, 강의를 시작하면 무슨 말인지를 통 알아듣지를 못해 벽을 보고 강의를 하는 것 같다고 나에게 한탄을 하더라. 각종 연극상 심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실력자(?)가 교수로 있는 대학의 사례다.
자기 자신은 학교를 ‘강남의 연예기획사’처럼 운영하면서 입만 열면 연극계가 엘리트들로 넘쳐나기를 설파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면서 좋은 공연을 찾아 시상하겠다고 심사를 하러다니는 것은 너무 뻔뻔한 일이 아닐까?
대학에서부터 좋은 인재를 뽑아 양성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통해 신선한 콘텐츠를 개발해 관객들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게 복지혜택을 바라는 기대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교훈
종신제를 거부(?)한 교황의 소식을 접하고 우리의 예술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고도의 초고령화 사회에서 종신제가 과연 합당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위시해서 많은 연극후배들이 줄줄이 늙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죽을 때까지 명예직을 고수한다는 게 과연 시대정신에 맞는 일 일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의학계는 통상 80대부터는 인지와 신체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는데, 이마저도 고령으로 자기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 종신제를 고수하게 된다고 충고하고 있다.
영국여왕의 아들도 종신제 때문에 왕이 돼보지도 못하고 먼저 죽게 생겼다. 그래서 여기저기 생각이 있는 분들은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종신제인 미국 대법관도 네덜란드 여왕도 스스로 사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예술원은 여전히 종신제를 고집하고 있다. 물론 예술원회원은 명예직이어서 이런 것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명예직일수록 스스로 후배들에게도 물려주는 미덕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솔직히 예술원회원들인 연극인들은 소시적에 충분히 모든 명예를 다 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공로나 예술성에 비해 많은 영예를 누리면서 일생을 살아온 분들이 연극계에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예술원회원도 종신제를 지양하고 임기제를 도입하는 게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이건 노후의 복지와도 절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배우들만 해도 말년에 10원 한 장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예술인회원이라도 되어서 복지혜택을 받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CJ토월극장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이 <CJ>라는 이름을 갖는다고 했을 때 많은 연극인들이 분개했다. 한마디로 신극의 역사에 중요한 공헌을 한 <토월(회) >앞에 어떻게 기업이름을 붙이는 불경함을 저지를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특히 진보적인 연극인들에게서 ‘개념이 없음’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컸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른데 있다. 토월극장이 <CJ>라는 이름을 갖는 속마음은 다름 아닌 이 극장을 <뮤지컬극장>화 하고자 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극장 측도 연극만으로 유지가 불가능, 투자만 많고 흥행이 안 되니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어 꼼수를 써서라도 슬그머니 뮤지컬 공연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CJ>라는 명칭이 붙게 된 건 극장과 기업이 서로 의기투합을 해서다. 연극 전용극장으로 사용될 것 같으면 앞에 <살아있는 기업 CJ>를 붙여준 데도 10원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극장 측이 뮤지컬을 할 수 있도록 객석을 670석에서 1000석으로 넓히겠다고 하니 서슴없이 투자를 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극장의 객석을 개조하면 무대가 보이지 않아 티켓을 팔 수 없는 이른바 사석(死席)이 많아진다. 그래도 뮤지컬극장으로 대관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객석이 1000석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투자한 생색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CJ>라는 로고를 상호간에 원하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연극인들이 반대를 하려면 이런 음모를 지적했어야 했다. 그런데 정치적 감각으로 <CJ>라는 ‘재벌’ 이미지만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우리 연극계에 진보성향인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연극계의 변화와 연극인의 장래를 위해 투쟁하려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정치투쟁에만 열심이다. 이것은 자주 마주치는 연극인들끼리 서로 낯을 붉히는 것은 피하면서도 시대정신을 가진 예술인으로 보이려면, 또 나름 자기만족을 위해서 정치투쟁을 더 선호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아메리카노 커피’도 마시지 않는 반미주의자들이 미국문화의 쓰레기(?)인 뮤지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미제는 (쇠고기나 커피 등) 안 되고 눈이나 귀로 들어가 머리를 잠식하는 미제 문화인 뮤지컬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묻고 싶은 심정이 들어서다.
좌우간 연극계의 진보를 지향하는 인사들도 이제는 ‘문재인 후보’ 지지서명이나 제주도 해군기지에 가서 두 눈을 부릅뜨고 몸부림만 치지 말고 연극계의 혁신을 위해서도 몸부림치며 외치는 투쟁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젊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내친김에 한마디만 더 해보자. 우리 연극인들이 한동안 우리 정치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특히 배우 3인방이 크게 활약했다. 배우 유인촌, 최종원, 문성근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배우들은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조폭의 ‘행동대장’을 연상시키는 모습밖에는 보이지 못할까하는 자괴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조직에 충성은 혼자 다하고, 어째서 연극판에 조차 나오지 못하고 숨어살아야 하는 끝맺음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배우의 심성 탓일까? 아니면 연기 외에 다른 분야에 손을 대면 이런 결과를 맞게 되는 숙명 때문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곳에서 독설을 내뿜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배우인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