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호 편집인의 글)
기록과 평가
이번 31호부터는 서울연극인대상 평가위원들의 단평이 실린다. 애초 500자평을 제안했지만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따라 200자평으로 조정했다. 200자면 대단히 짧다. 그러나 처음부터 만족스러울 순 없고, 같은 작품에 대해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평가 의견을 밝힌 적이 거의 없는 우리 풍토를 감안할 때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떤 극단 대표로부터 이런 불만을 들었다. 공연을 앞두고 국립예술자료원에서 제공하는 영상 촬영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연락을 해봤더니 심의 결과 대상으로 선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가부를 알려주지 않은 무성의도 그렇지만 공연도 하기 전에 가치 판정을 해버리는 그 오만에 당연히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국립예술자료원의 입장은 딱하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이럴 거면 왜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독립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 1년 20억 좀 넘는 예산에 비상임 원장을 세워 놓고 무슨 일을 하라는 건지…… 예산도 적고 상임도 아닌 걸 보면 많은 이들이 의심하는 위인설관이라는 단어는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판단이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예술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싫어도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예술 시장에서는 가격 책정을 위해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공립예술단의 오디션도 평가의 일종이며, 콩쿠르나 입시도 평가를 바탕으로 하고, 창작 지원도 평가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도 예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평가 역량이 축적되지 않거나 또는 심하게 왜곡된다.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고도의 예술성이 있는가 하면 기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있건만 기본적인 것조차 예술이라는 방패에 숨으며 표준화된 평가 기준의 확립을 가로막힌다. 그래서 엉터리가 예술의 탈을 쓰고 군림하는 부적절한 상황도 벌어진다.
한마디로 예술 평가에 있어 우리는 표준이 없는 초보 상태 내지는 혼란 상태이다.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집단지성이다. 이번 서울연극인대상이 참여를 신청한 작품에 전문평가단 10명과 시민평가단 10명을 보내 평가하도록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마 신청만 하면 평가단을 보내는 것도 드문 일이고 더욱이 20명의 평가단을 파견하는 것이나 시민평가단을 포함시키는 것 등은 처음 있는 시도일 것이다.
앞서 국립예술자료원의 영상 촬영 대상 선정에 대해 지적하였다. 사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 행위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어떤 것이 자료로 남길 만한지 가려내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고 위험하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기록을 남겨 놓는 것이 좋다. 판단을 역사에 맡기려면 그래야 한다. 예산이 덜 들면서 골고루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많은 기록을 모아놓고 나면 거기서 저절로 의미가 발생한다. 즉 굳이 평가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가치의 흐름이 형성된다. 앞서 집단지성이란 단어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물론 ‘오늘의 서울연극’과 ‘연극기록실’이 ‘서울연극인대상’을 통해 기록을 모으는 것은 일종의 실험이다. 엄청난 규모의 일을 변변한 예산 없이 거의 자원봉사로 하려는 이 계획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할 게 아니면 하지 말라는 말만 하면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채 시간만 보내기보다는 설령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도전하자는 것이 우리의 뜻이며 의지이다. 부디 기록의 민족이라는 별명에 맞게 충실한 기록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 함께 정진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2013년 5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