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느와르, 2인 극이 되다: <스테디 레인 (A Steady Rain)>
강수진(연극평론가)
작: 키스 허프 (Keith Huff)
연출: 김광보
공연 장소: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공연 일시: 2013. 12. 21~ 2014. 1. 29)
무대 위로 어두운 조명이 켜지면 차가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남자가 객석을 향해 앉아있다. 매춘, 토막살인, 마약에 찌든 아이들, 인육 매매 등,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극대화되는 밤거리의 두 경찰 조이와 데니. 한 명은 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생각이 많은 알코올 중독 전적의 독신(조이)이며, 또 한 명은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정이 많지만 천성적으로 거칠고 폭력적이며 급한 성격에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창녀들의 뒤를 봐주고 부수입을 챙기는 가장(데니)이다. 매우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작업 파트너이자 유치원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극이 시작되면, 관객은 두 배우가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대사들에 의해 묘사되는, 언젠가 본 듯한, 하드보일드 범죄 느와르 영화 속으로 초대된다. 비정한 도시, 어두운 거리,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늘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만을 입히는 주인공, 여운이 있는 모티브 음악, 주인공의 비극적인 파멸,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는 엔딩, 멜랑콜리한 감정들, 끝없이 내리는 비. 연극 <스테디 레인 (A Steady Rain)>은 1930년대의 느와르 영화들과 <씬 씨티>와 같은 최근의 범죄 영화들의 클리쉐를 그대로 담고 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또다시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공연을 보는 동안 관객들은 수많은 언어들로만 그려지는 경악할 만한 거친 세계를 정신 없이 쫓아간다. 폭력 씬, 섹스 씬, 자동차 추격 씬 등에 대한 묘사는 선명하며 배신과 파멸로 귀결되는 두 인물의 디테일한 심리의 흐름은 흥미롭다. 그러나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에 대한 대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 듯 하다. <스테디 레인>은 상업성과, 범죄와 도덕의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의 삶의 부조리를 담아내고자 하는 진지한 고민의 언저리 어딘가에서 방향을 잃고 결국 가족을 위해 희생한 주인공이라는 멜로드라마적 감상만 앙상하게 남긴 느낌이다.
사건은, 데니가 조이를 창녀 론다와 엮어주려고 저녁식사에 초대한 날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사되지 못한 커플 매칭으로 인해 저녁은 어색하게 마무리되고, 론다를 집에 바래다 주러 간 데니는 그녀와 정사를 나누게 된다. 차로 돌아오던 그는 한 꼬마가 자신의 차의 유리창을 깨는 것을 목격하고는 총을 장전한 뒤 쏟아지는 비를 뚫고 꼬마의 뒤를 쫓아간다. 꼬마 윌리는 데니를 커다란 쓰레기 통 뒤로 유인하고 그곳에 숨어있던 포주 월터 로렌츠가 자신의 수입원인 론다를 꼬여냈다는 이유로 데니의 허벅지에 심한 중상을 입힌다. 아내를 향한 죄책감 속에서 며칠을 보내던 데니의 집에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총을 쏘고 그의 막내아들 스튜이가 유리 파편에 중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데니는 자신의 집을 쏘고 달아나는 르망 자동차의 뒷모습 목격한다. 피를 쏟아내는 아들 스튜이를 한 손에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미친 사람처럼 도로의 차들을 전복시키며 데니는 병원으로 운전한다. 그러나 911을 기다리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로 운전한 대가로 스튜이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고 데니와 그의 아내 코니의 사이도 급격히 악화된다. 데니의 가족과 함께 있었던 조이는 다리를 다친 데니보다 재빨리 가족들을 보호하며 분노에 눈이 먼 데니를 대신해 가족을 위로하고 지킨다. 데니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거리를 누비며 점차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조이는 그들 곁에 머물며 코니와도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자신이 찾던 르망을 보게 된 데니는 차를 주격하고 도망치던 르망 자동차는 전복된다. 차를 운전하던 사람은 꼬마 윌리. 윌리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데니는 그를 쏘고, 죽은 꼬마 윌리의 가슴 속에서 발견된 것은 총이 아닌 작은 강아지였다. 윌리가 죽은 후, 데니가 지켜주던 창녀 론다는 토막살해가 된 채 발견되고 그녀의 아기는 쓰레기 봉투에 담긴 채 버려져 있음이 발견된다.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걷잡을 수 없는 사건들에 충격을 받은 데니는 점차 마약에 빠져들고, 오로지 아들 스튜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거리를 헤맨다. 게다가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그간 업무 수행을 하며 일으킨 실수(마약에 중독된 어린 베트남 소년을 무지의 상태에서 인육 매매범에게 돌려보내 결국 소년이 죽게 된 사건 등) 때문에 데니는 경찰자격을 박탈당하고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러 온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자신을 대신해 그의 “모든 것”인 가정을 차지하고 있는 조이. 아내와 아이들마저 자신이 아닌 조이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며, 데니는 홀로 목숨을 끊는다. 조이는 승진을 하고 막내 스튜이는 치료되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며 끝없이 내리던 비는 마침내 그친다.
<스테디 레인>의 사건 전개와 주인공 데니의 선택은 마치 <씬 씨티>와 같은 흥행 영화들이 그러하듯 극단적이고 과장된 느낌이다. 도미노 현상처럼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의 악수를 낳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또 다른 사건은 더 큰 악수를 낳아 결국은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큰 장점은 파멸하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또 한 인간의 심리의 변화 과정에 대한 탁월한 묘사에 있다. <스테디 레인>은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진행시켜 나가는 방식을 관찰하게 한다. 폭력적이고 유혹에 쉽게 빠지며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거친 성품 때문에, 그리고 그 이면에 내재하는 인간적이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많은 성품 때문에 주인공 데니를 둘러싼 사건은 증폭되고 그로 인해 그는 파멸한다. 그가 사랑을 하는 방식은 거칠고 위험하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힌다. 자신의 모든 “모든 것”이자 무한한 자부심인 가정을 위해서라면 범죄도 불법도 게의치 않는 그는, 자신의 절친인 조이가 자신의 가정의 일원이 되겠다는 욕망을 품으면서 마침내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을 때,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를 확고하게 믿은 자만심이 낳은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그의 곁에 존재하던 조이는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친구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자 했던 가슴 깊은 곳의 욕망을 실현시켜 나간다. 어떠한 면에서 <스테디 레인>은 성격으로 인해 파멸하는,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 고귀한 마음을 간직한 인간을 다루는 비극의 요소를 가졌다.
<스테디 레인>은 미국의 극작가 키스 허프(Heith Huff)의 2007년도 작품이다. 원본은 액션에 대한 별다른 지문이 없이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노네임 씨어터 컴퍼니가 제작하고 김광보가 연출을 맡은 이번 한국 초연에서는 두 배우가 각기 관객을 향해 하는 독백 중간중간에 상황을 묘사하는 액션들과 동선을 창조하고 두 인물이 서로의 상황에 끼어들거나 응시하게 함으로서 관객들이 보다 쉽게 내용을 이해하고 극적인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연출은 단순화된 무대에서 원작의 영화적 뉘앙스를 감각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인물들의 정서감을 극대화시켰다.
그런데 원작 희곡을 읽으며 새삼 발견하게 된 사실은, 극의 초반부에 데니의 죽음이 이미 암시된다는 것이었다. 극의 초반에서 조이는 데니가 자신을 매일 밤 가족 저녁 식사에 함께 하게 했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데니는 늘 그랬어요, 항상 사람들을 챙겼죠. 그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인간적인 사람. (Denny was always doing things like that, always looking out for people. He was a good guy. A people person.)”
원작은 전체적으로 회상의 형식을 띠고 조이와 죽은 데니가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이어가는 느낌을 풍긴다. 두 인물은 때로는 회상하며 과거 시제로 말하고 때로는 그 과거 안에서 현재로 말한다. 조이가 데니를 회상하며 이렇듯 과거 시제로 말을 함으로서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었거나 데니가 죽은 것이 암시된다. 그러나 공연을 보는 동안 관객은 극의 엔딩에 가서 데니의 죽음을 발견할 때까지 이러한 힌트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뉘앙스들이 암시되지 않으면 데니가 죽는 시점까지 스토리의 긴장은 더욱 유지될 수 있지만, 죽은 인물인 데니와 살아남은 그의 친구 조이가 함께 90분 동안 무대 위에 공존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작품의 특이한 설정은 흐려진다는 점이다. 공연에서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유사한 복선이 있다. 데니의 가족과 함께하던 저녁 식사를 회상하며 조이가 데니를 흉내 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데니가 이렇게 말한다.
데니: 그게 나야. . . ? (That’s me. . . . ?)
조이: 너야. (That’s you.)
데니: 너 지금 나 하는 거야. (You’re doing me.)
조이: 내가 지금 너 하는 거야. (I’m doing you.)
이것은 마지막에 조이가 데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암시하는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이러한 복선 역시 표현되지 않고 넘어감으로서 두 인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 조금은 입체성을 잃은 느낌이었다.
배역은 이석준(데니)과 이명행(조이), 문종원(데니)과 지현준(조이)으로 이루어진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배우에 따라 인물과 공연의 질감이 달랐다. 이석원과 이명행 콤비는 데니와 조이의 대조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특히 데니 역의 이석준은 다혈질적이며 흔들리고 불안한 그의 심리와 어두운 세계의 질척한 삶, 꼬여가는 사건들로 인해 점차 파멸되어가는 데니의 육체적, 정신적 변화를 훌륭히 그려냈다. 극의 음울하고 습기 가득한 느낌은 그의 연기로 인해 더욱 짙은 농도로 느껴졌다. 이후에 대본을 읽으면서 배우 이석준이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하고 연습하여 몰입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문종원과 지현준은 배역 안에 완전히 스며들어가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각 인물에게 부여된 고뇌가 자기화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문종원에게서는 날 것 그대로의 살 냄새 풍기는 데니보다는 해설자의 느낌이 들었고 단단한 그의 체구와 세련된 말투에서는 점점 파멸로 향하는 나약한 인간 데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지현준의 조이 캐릭터의 구체화 역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조이의 내면에서 서서히 자라나게 되는 간절함과 욕망, 그로 인한 배신의 내적 과정이 보이지 않음으로서 결말의 그의 변화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많은 분량의 대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는데, 때로는 그것들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로 전달되어 두 시간 가량되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이 스토리텔링에 지치게 되는 느낌이 있었다.
극장은 관객들이 꽤 붐볐고 공연 후 배우들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관객들도 많았다. <스테디 레인>의 2009년 브로드웨이 공연이 휴 잭맨과 다니엘 크레이그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 극장은 그 두 명의 헐리우드 액션 스타가 영화 속에서 사회의 악과 맞서 싸우며 보여주었던 장면들을 가까이에서 그들의 대사를 통해 직접 감상하려는 관객들로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는 뉴욕타임즈의 리뷰는 납득이 되었다. 뉴욕타임즈의 리뷰는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올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