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우리의 생존법을 익히자
우 상전(연극배우)
지난해 12월 서울연극센터가 ‘대학로 연극 실태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회를 가졌다. 언제나 변함없는 내용으로,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자 이른바 ‘민낯’이라 할 수 있을 것들을 들춰보였다.
솔직히 연극에서 생존법은 다음의 세 가지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일지라도 우리가 얻을 교훈은 최소한 우리도 이제는 우리의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 대학교수가 되는 것
2. 국공립단체에서 단원이 되거나 직책을 얻는 것
3. 영화나 TV로 진출하는 것
종사자 통계
● 응답자 중 남성이 53.8%, 20대와 30대 비중이 반수를 차지함
● 결혼 상태는 미혼이 78.8%로 대다수
지원정책
● 지원정책에 대해 불만족이 6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 만족은 5%에 그침
● 전체 응답자 중 58.8%가 ‘작품제작지원’이 최우선 순위 지원정책이라고 함
그 다음으로 ‘연극단체 행정지원’ ‘연극인 교육 프로그램’을 원함.
● 지원금의 총액 감소와 단기적 지원기간으로 지원제도 만족도 저조
● 잦은 지원제도의 변경으로 인해 지원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여전히 낮음
● 지원 대상에 대한 명확한 기준 마련 및 정산시스템 개선 시급
● 지원 목적 및 시행의 일관성이 필요하고, 기관 스스로 이를 홍보해야 함
연극동네환경
● 학전그린 소극장의 폐관, 장기 상연작 증가 등 대학로 연극 환경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장이 필요함
● 소극장과 중대형극장, 초연작과 장기 상연작의 공생구조를 위한 장기적인 제도 마련의 요구
● 무료 관람객 비율이 ‘연극 선호형’에서, 즉 연극이 33.5%로 가장 높음
● 객석규모는 90% 이상이 300석 미만의 소공연장
보수
● 연극종사자의 적정보수 월 평균 317만원, 실제보수는 113만원, 차이가 204만원
평균 월 소득 114만원, 월 300만 원 이상은 3%(5명)이 고작
● 연극배우와 연출, 극작가들은 월 평균 97만원
그 중에 연극 활동으로 인한 소득은 39%, 그러니까 97곱하기 0.39하면 대략 월 38만원 수준,
● 연극교육 등의 연극관련 활동으로 28%, 무관한 소득은 전체의 32%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듬
특히 연극배우들은 연극 활동 수입이 26%에 지나지 않으니까 97만원 곱하기 0.26이면 대략 월 25만원
보고서에 많이 등장한 용어들
이 보고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가 ‘상업성’과 ‘실험성’이다. 이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연극은 예술성과 실험성이, 뮤지컬은 대중성이 상대적으로 우위’
‘대학로의 다양성과 실험성은 여전히 중요한 포인트’
‘대학로 연극 종사자들은 대학로 작품의 ’실험성‘,’다양성‘ 및 ’전반적 수준‘이 대체로 낮아졌다고 판단하고 있음’
‘대학로 작품의 상업성의 경우 2,3년 전에 비해 높아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임’
‘시장규모 성장과 함께 대학로의 상업성도 증가’
‘대학로의 상업적 변화를 인정하며 이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도 느낌’
‘관객의 61.2%도 상업성이 과거에 비해 강해졌다고 인정함’
‘실험적이고 다양한, 젊은 뮤지컬 지원책이 필요함’
1. 여기서 우리가 새롭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보고서에 없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다. 이른바 ‘실험연극’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고 ‘상업연극’은 점점 부를 이루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보고자는 단지 이런 현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하는 것은 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자는 이를 문서화하지 않고 구두로만 설명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2. 여기서 우리는 연극을 ‘실험’과 ‘상업’으로 분류하는 것부터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왜? 분명히 ‘상업연극’은 존재한다. 하지만 ‘실험연극’은 대학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실험연극’으로 일반연극을 분류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3. 이제는 이런 보고서가 나와도 연극인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된 게 현실이다. 왜? 이런 보고서에 이미 익숙해져 그저 ‘자포자기’로 대응할 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연극계의 어젠다가 바뀌어야 한다. ‘예술성’에 대한 찬사를 뒤로 미루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젊은 리더십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에 성의를 보이는 자와 ‘정책설계’를 더 높이 평가하는 풍토를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보고서는 왜 ‘실험’과 ‘상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까?
뉴스에서 ‘식품첨가물’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요지는 현재 첨가물을 ‘합성’과 ‘천연’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용어 때문에 소비자들이 ‘합성’이라고 하면 마치 인체에 해로운 ‘불량식품’처럼 여겨 첨가물의 ‘용어’를 바꾸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만큼 용어사용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어째서 내가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가를 눈치 챘을 것이다. 연극에서 ‘상업성’이라고 하면 연극인들은 마치 ‘예술’ 또는 ‘연극’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병폐가 실존한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에 시달려도 절대로 ‘상업연극’은 하지 않겠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 배후에는 연극판의 ‘엘리트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대학이며, 비평가를 위시한 ‘연극과 교수’들인 게 현실이다. 왜? ‘실험’이 자신들의 위상을 확보하는 좋은 잣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업’이라는 용어에는 관객과의 ‘소통’과 ‘공감’이라는 주요한 코드가 숨어있음을 연극인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게 없으면 아무리 ‘상업’을 내세워도 흥행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로 세상과 대학교(학생들 수준도)는 저급화되어 가는데, 역으로 현대예술(연극)이 난해성이 강한 ‘실험’을 강요하고 있으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연극인들이 그나마 ‘상업성’마저 경원시하니 당연히 ‘빈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풍조가 지배하게 되어 지금 한국연극은 ‘멜로드라마’는 고사하고 ‘코미디’도 ‘풍자극’도 발전하지 못해 ‘가난’을 벗어나기가 점점 더 요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실험연극’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억지스럽고 부적합한 용어사용으로 인해 인식에 혼란만 야기 되고 있으며, 연극인들에게 부질없는 ‘자존심’만을 불러일으켜 제작환경만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게 작금의 연극판 현실이다.
‘실험연극’이라고?
실험극단이 미국에 갔을 때 극단‘명(名)’을 Experiment Company라고 가르쳐주자 미국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험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어떻게 실험을 생업으로 하면서 극단을 운영하는가가 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공연을 보고는 더욱 놀랐을 것이다. 새로울 게 없는, 즉 실험이 없는 ‘평범한’ 연극이어서 말이다.
(부자들의 ‘재테크’에 이바지하는) 현대미술이 아닌 연극에서 이런 분류나 용어사용은 무리다. 아마 보고서를 만들면서 현대미술의 ‘실험미술’과 ‘상업미술’이라는 용어를 차용해 온 듯싶은데, 연극에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 미술은 관객이 없어도 무방하다. 미술품을 구매하는 호사가만 있으면 된다. 또 당장에 그림이 팔리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연극공연은 당장 관객이 없으면 공연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소멸해버리는 게 무대공연이다.
따라서 공연예술에는 이런 분류가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왜? 공연예술은 어차피 관객을 모으려면 ‘상업성’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도 발레도 그리고 뮤지컬마저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상업’이라는 용어를 붙여도, 구태여 자기들에게 그렇게 비하적(?)인 말을 사용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게 ‘상업극’이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웃겨, 월 30만원도 못 버는 주제들이… 솔직히 혜화역 2번 출구에 깡통을 놓고 앉아있어도 월 30만원은 더 벌 거다.”
실제로 연극판에서 ‘상업연극’을 하는 집단으로 찍히면 지원도, 시상에서도 제외된다.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가 이를 ‘주홍글씨’처럼 – 연극인의 타락(?)으로 낙인찍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업’도 못하고 가난을 극복하느라 끙끙거리고 있는 게 보통의 연극인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상업 연극인들은 스스로 이를 표방한다. 왜? 상업성의 근간이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공연은 재미있고 볼만하니 많이 구경을 와주면 좋겠다’고 ‘상업성’을 표방하는(?) 광고를 한다.
이처럼 연극인들이 자신의 ‘상업성’을 내세울 때는 분명하고 명확하다. ‘오락성’을 내세워 관객을 모으고자 하는 시도를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부터, 포스터 디자인은 물론이고 기획단계에서부터 ‘상업적’ 색깔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실험극’(?)은 이런 식으로 광고를 하지 않는다. 즉 우리 연극은 “새로운 실험으로 관객들을 자극하고 있으니, 혹시 재미없고 난해할지라도 참고 구경을 해주면 좋겠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설령 공짜일지라도 이런 광고를 보고 구경 올 관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숨기고 재미있는 척(?)하기 일쑤다. 이런 게 연극인들이 매사에 이중성을 드러내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른바 ‘실험연극’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실험극’은 예술가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작업 -마스터베이션이 되기 쉽다.
이래서 새로운 시도는 자연히 관객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해서 소통을 하기 힘들다. 따라서 ‘실험연극’으로 분류된 연극은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연극이 어떻게 해야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 즉 소망대로 ‘상업성’을 내세우지 않고도 ‘흥행’을 도모할 수 있을까가 한국연극의 최고의 의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지원금을 받으려면 ‘자존심’이 상하게 마련인데,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지원금을 받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상업연극’을 하는 제작자는 30억짜리 저택에서 살고 있는 게 현실이고, 몇몇 상업성 작품의 경우는 연간 수입이 수억 단위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용어사용에 개의치 않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상업’은 연극용어로는 합당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 연극은 이런 분류를 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양극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우리에게 ‘실험연극’이 존재하는가?
솔직히 한국연극에서 ‘실험’이라고 하면 (내가 보기에)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광림교수가 주도한 극단 ‘우투리’ 작업을 유일하게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그들은 새로운 창작문법과 표현양식을 표방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이외에는 ‘실험연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처럼 연극에서 ‘실험’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용어다. 따져 보면 그저 전위적 일본연극인 ‘앙그라 연극’을 흉내 낸 짝퉁(?) ‘실험연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자신들의 연극이 ‘실험극’이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실험연극’이란 엄격하게 말하면 미천하게(?) 상행위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고상한 예술성을 표방하는 예술단체(극단)나 공연행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남의 인정과는 무관한 ‘자기 만족성’ 공연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의 연극인들이 가장 원하는 연극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롤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전위성과 난해성을 살리면서도, – 특정한 줄거리도 없이 황당한 대사와 무의미한 행동으로 일관하지만 – 즉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이 뭔가를 끝없이 ‘기다려야’하는 인생의 만고불변의 진리 -신일지도 모르고 자유와 행복일지도 모르는, 하지만 기다림이 인간의 운명임을 일깨워, 내용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대표적 작품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현대연극의 최고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들 최고의 로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이보다 탁월한 현대적이고 감동적인 ‘우문현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현대연극이, 우리 모두의 희망처럼 이러한 ‘재능’과 ‘행운’을 다 누릴 수 없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실험정신’을 구사하면서도 가난을 극복하는 ‘상업적 성취’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가 우리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해야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1. 연극인들이 베케트처럼 ‘천재적 재능’을 갖추어야 한다.
2. 이게 불가능하다면 비평과 이론가의 뒷받침을 받도록 해야 한다.
사실 모든 현대예술의 공통된 ‘생태계’는 난해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소비자들(관객)이 접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할 장치가 필수적이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술에 ‘현대’가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이야기하는데 왜 어려울까. 그렇다면 무엇이 어려운지 이야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장르 구분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러면 관객들은 이런 노력에 ‘완전매진’으로 답할 것이다.”
사실 현대예술이 지난 시절의 창작문법을 고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예술가들이 이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예술이 세상이 점점 단순해지는 엇박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상만사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데 공연을 보면서까지 골치가 아픈 것을 참아낼 관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예술에서 소비자의 ‘골치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이론가의 해설’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은 필수다. 그리고 이건 세계적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이걸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게 (오래 전부터) 국립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일 것이다. 국립발레단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발레의 대중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관객들이 현대예술을 빙자한(?) ‘난해성과 비감동성’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관객들이 행위자의 창조고통과 뒷이야기 등을 통해서 ‘공감의 장’을 마련하도록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렉처 퍼포먼스’가 대세를 이루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관객과의 대화’가 연극의 공연장에서는 너무나 허술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관계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 미진하고, 이를 흥미롭게 꾸려가는 말솜씨마저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자료제공이나 성의마저 부족하다.
(현대에 와서) 연극인들이 그토록 내세우고 싶은 지성적이고 현대적인 연극 – ‘실험극’이기를 원한다면 자신들의 ‘품위유지’가 가능한 해설과 ‘립 서비스’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처럼 ‘실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현대미술의 경우를 보더라도, 창작자에 의해 또 하나의 ‘실험미술’이 등장하면 반드시 이를 위한 ‘해설’이 등장한다.
왜 이런 작품을 시도했으며, 이건 무엇을 표현하고자한 작품이라는 것을 관객이 사전에 예비적으로 알지 않으면 흥미를 잃어 진정한 ‘감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해설’이 있어야 관객들이 예술가의 위대한 실험정신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관객은 전문가가 아니다. 또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호사가일 뿐이어서 그렇다.
한국평론의 오만함
그러면 우리의 현실을 한번 살펴보자. 올 연말에 평론가상을 탄 ‘황금용’을 예로 들어보자. 먼저 이 작품은 ‘해설’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연극이다. 평론가들의 ‘시상의 변’을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런 번역극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 수 있었을까? 당연히 독일희곡을 전공한 번역자와 이론가, 해설서 등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설명(?)과 자료를 통해 작가와 경향, 연기의 특성, 독일에서의 평가와 작품의 내면 등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도 당연히 이런 해설이 없이는 이해가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에게는 이런 서비스가 없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는 관객들이 현대연극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난해한 연극을 즐길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고 경향과 연기의 특성을 자세히 설명해서 관객들이 현대연극의 새로운 경향이라든가 현대연극의 발전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새로운 체험으로 받아들여 자신들도 지성인임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연극인과 평론가들은 자신들만이 그 가치를 아는 양 공연을 하고 연말에 ‘시상’을 하면서 끝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 이래서 나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한국연극의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칭한다. – 이러니 우리의 현대연극이 관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될지는 몰라도 즐길 수 없는 공연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가 ‘빈곤’을 극복하기는 힘든 현실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평론가와 연극담당기자들의 호평 속에 화려하게 ‘연극상’을 수상하는 창작극의 경우만 해도 관객들은 ‘내용을 몰라’ 객석에서 졸고 있는 공연이 태반이다. 왜? 그들만이 작가의 입이나 ‘보도자료’를 통해서 내용을 전달받을 뿐, 관객들은 여기서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비평이나 기사를 쓰기 위해, 이미 쓰여 졌던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작가의 입을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면서도, 자기들은 마치 한번 척보고 작품을 이해한 양 우월감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혼자서만 이해하는 양 호들갑을 떨면서, 관객들은 객석에서 꾸벅꾸벅 졸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미가 있다.” 자기들이 ‘베케트’인양 이런 헛소리(?)를 남발하고 있는 게 우리 연극계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해야 상상력도 발휘되는 것이다.
더 커다란 문제는 작가 자신들마저도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출연하는 배우들의 생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지원금은 가만히 있어도 ‘마스터베이션’의 동지(?)인 평론가들이 심사를 통해서 대줄 것이고, 배우는 학교 제자들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으니 그들이 ‘흥행’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힘없는 종사자들만 ‘가난’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끼리끼리’ 만족하고 끝내는 게 한국연극의 현실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해 질문이라도 나오면 “이거야말로 객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잠꼬대(?)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그러려면 최소한 관객들이 졸지는 않게 해야지, 마냥 졸리는데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이런 이론가와 평론가들의 오만이 어디 있는가? 아마 이건 한국연극에서만 존재하는 게 현실일 것이다. (해설은 고사하고) ‘비평’에 대한 반박과 같은 ‘싸움’도 사라졌다. 그저 연극판은 ‘추종’과 ‘편애’만이 판을 치고 ‘자기과시’만 넘쳐날 뿐이다.
그러다가 비평마저도 아마추어인 담당기자들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평론이 ‘전임교수’가 되는 과정의 ‘액세서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러니 연극에서 이제 평론가의 기능은 ‘심사 다니는 사람’이 된지 오래고, 연극은 관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오페라만 해도 얼마나 많은 해설자와 해설서가 있는가! 그래서 현대예술에서 한명의 유명예술가가 탄생하면 그로 인해 많은 해설가들이 밥벌이(?)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게 현대예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술가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현대예술일지라도 관객들이 난해성에 빠져 외면하면 ‘돈’을 벌어서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귀족이 지배하는 봉건사회도, 공산관료가 지배하는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시장경제’체제여서 그렇다.
한마디로 예술가 자신이 아무리 현대성을 강조해도 일정한 ‘수입’이 없으면 자본화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연극은 이런 ‘립 서비스’마저도 관객들에게 인색하다. 왜? 이론가나 평론가들이 자신들의 우월감을 만족시키는 데만 매진했기 때문이다. 또 진정으로 해설을 할 자질조차도 갖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모를 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으며, 나는 이렇게 즐기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오만의 극치다.
이러니 점점 연극관객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이의 실체를 모르고 추종하는 연극인들은 ‘빈곤’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실태 보고자는 연극계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 연극종사자들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으며 ‘상업극’과 ‘실험극’ 사이에서 부의 편중과 제작규모의 불균형을 실감한다는 – 이런 ‘문구’조차도 보고서에 삽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혹여 자신들의 보고서가 (양극화를 적시해) 옹색한 연극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지는’ 않을까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미처 문제해결을 위한 제시조차도 연극인들의 숙명처럼 다가온 ‘빈곤’이라는 생태계’를 어지럽힐까봐(?)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고서에 적시한 이런 ‘문구’들로 충분히 인지가 가능하다.
“연극 종사자가 (대학로 공연의)다양성, 실험성, 예술성에 우려를 표시하는 것은 그것이 대학로 공연시장의 건강한 생태계의 기본이 된다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임.”
다시 말해 연극인들은 연극예술이 대학로를 ‘비상업화’의 창작기지로 인식하고 있어서 ‘상업화’를 우려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대학로에 대한 미래의 전망마저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연극종사자가 대학로의 다양성, 실험성의 약화를 우려하는 한편, 관객들은 이를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겠음. 흥행공연과 뮤지컬을 보는 관객들에게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라는 의미가 연극종사자들과는 다른 개념이었을 것으로 판단됨.”
이건 연극 종사자들의 다양성이나 실험성에 대한 우려는 관객들이 말하는 다양성, 혹은 실험성(관객은 이걸 ‘새로운 시도’로 인식함)과는 인식에서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단적으로 연극인들의 인식과 달리 다양성과 실험성을 공연 인프라의 확대와 뮤지컬 및 흥행공연의 확대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니 연극인들의 반수가 20대와 30대이며, 78.8%가 결혼도 못하고 독신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실험연극’은 하고 싶은데 베케트처럼 재능은 없고, 그렇다고 까놓고 영혼을 파는(?) ‘상업연극’을 시도하기는 ‘죽기보다’ 싫은 모순에 빠져 있는 게 연극인들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월 30만원 수입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연극인을 위한 복지가 긴요한 현실이지만, 이는 현재로는 ‘기대가 난망’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비상책이나 대비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아무런 준비 없이 젊은 청춘들이 연극계의 ‘가난’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앙케트 조사에 의한 평균적인 수치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 왜? ‘부를 축적’한 연극인들은 앙케트에 응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국세청 등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의뢰해) 실질적인 수입을 조사해서 이른바 ‘양극화’의 현실을 모든 연극인들에게 적나라하게 펼쳐 보일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3. 이것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묘책은 없을까? 다음의 방법이 가장 합리적인 묘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창작극의 경우에는 가장 바람직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걸로 기억해 여기에 옮긴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었다.
1. 남의 머리에 자기의 생각을 집어넣은 일
2. 남의 호주머니에 든 돈을 빼오는 일
이를 연극으로 대치하면 1번은 소통과 공감(감동)을 주는 일이며, 2번은 흥행에 성공을 도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장사꾼에게 1번은 필요치 않다. 또 소설가나 작곡가, 화가 등은 2번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2번이 결과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똑같은 공연예술이라도 뮤지컬은 1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소통보다는 오락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무용이나 음악공연도 마찬가지다. 연극에 비해 훨씬 덜하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는 연극만은 1번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언어는 인간생활에서 1번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점에서는 ‘영화’와 일치한다) 일단 말을 하게 되면 상호 간에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연극은 관객이 없으면 그나마도 존재가 불가능해서 더욱 그렇다. 희곡은 작가가 써놓으면 모든 게 끝나지만 연극은 공연을 통해 관객을 모야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 2번을 모두 다 만족시켜야 하는 ‘연극공연’은 이래서 어렵고 힘들며, 그래서 늘 ‘가난’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영화의 교훈
요즘 흥행에 성공하는 한국영화를 보자. 예전에는 영화판도 1번이 없이 2번에만 의존했다. 그래서 주로 미국영화인 ‘외화’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했다. 오락과 재미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관객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냈다. 특히 아카데미상을 탄 미국영화는 2번의 보증수표였다. 오죽하면 한국영화가 ‘스크린쿼터’라 해서 겨우 ‘끼워 팔기’ 신세로 연명하고 있었을까.
그런 한국영화가 요사이 1번과 2번의 비법을 터득했다. 1번을 통해, 즉 관객과의 공감과 소통을 통해 2번을 극복하면 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를 성공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1번에 성공하고도 2번에 실패한 한국영화를 골라, 관객들에게 ‘다시 봐주기’운동을 전개 했을까. 좋은 영화이니 믿고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신뢰를 쌓아갔던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한국영화는 대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관객동원이 2억 명에 달했는데, 이의 60%가 한국영화의 관객인 현실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영화의 ‘흥행마법’은 먼저 1번을 성공시켜, 즉 관객과의 소통을 놓치지 않으면서 신뢰를 쌓아 2번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연극도 생존을 유지하려면 영화와 같은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희곡이라는 텍스트로는. 왜? 일정한 장소(무대)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1번을 달성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은 무대예술만이 갖는 여러 기법들을 동원하지 않고는 이를 극복하기 힘들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연극은 매사를 이에 역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연극의 숙명론 – 역사의 교훈
여기다 연극은 ‘가난’을 위협하는 다른 많은 매체와 끊임없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호 본란에 실린 ‘무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읽고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역사를 모르면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거구나!’를 통감했다.
이재진 선배는 자신의 글에서 “연극무대는 다른 오락매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랫동안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연극의 살아남기 위한 일련의 발버둥이 바로 (서양)연극사다. – 못 읽으신 분들은 한번 꼭 읽어보라!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연극의 생존의 역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이래서 역사는 소중하다. 아니 이런 역사를 말해주는 사람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글은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주는 중대한 ‘역사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 자신부터) 이런 연극의 ‘비극적’(?) 운명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인간은 유사 이래 ‘재미있는 오락에’ 끝없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연극은 위대한 예술이어서 항상, 어느 시대에나 존중받고 있었다는 ‘환상’을 간직하도록 ‘의식화’되어 있었던 것일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락에 더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유럽에 가면 밤 9시만 되면 멀쩡하던 TV가 갑자기 ‘포르노와 매춘의 홈쇼핑’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도 그저 요즘 세상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현상으로만 인식했을까.
이게 극장으로 관객이 몰리지 않을까봐 밤에 TV드라마를 볼 수 없게 하기 위한 정부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째서 별 감동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흥미진진한 오락물이 등장할 때마다 연극무대는 고전하며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 몸부림을 쳤다.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서사극은 무대를 통해 이념을 실현하려던 무대혁명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매체에 맞서 관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
내가 배운 세계연극사는 연극은 제의로 출발해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그리고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고대, 중세를 이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위해 봉사해 왔고, 이를 위해 이바지한 고귀한 자세를 잃지 않은 인류문명의 최고의 예술로만 연극을 설명하고 있었을까.
셰익스피어 연극의 공연장 옆에서도 ‘곰과 사육사가 싸움판을 벌리면’ 관객들은 그곳으로 몰려갔다는 이 평범한 진실(현실)에 왜 우리는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연극의 인류사적 운명과 인간의 본성에 눈을 감고 있었으니, 아무리 ‘실태조사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회를 가져도 연극인들은 이에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뮤지컬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한국연극은 여전히 ‘엘리트주의’를 외치며, 관객들이 극의 내용도 모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연극에 온갖 ‘연극상’의 시혜를 베풀고, 지원금을 주며 장려하고 있었으니 연극인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새삼 이번 보고회에서도 보고자가 보고서에도 없는 연극(인)의 ‘양극화’ 현상을 말하면서 그렇게 조심성을 보였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내놓고 이야기했다가 자신의 보고로 인해 연극에서 권장해야(?) 할 ‘실험극’ – 모든 연극인들의 ‘희망’인 엘리트연극이 ‘상업극’에게 밀리는 영향을 걱정하며 고심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제는 어떤 누구도 이런 식의 ‘실태조사’에 놀라움을 갖지 않고 오히려 짜증을 낸다. 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연극인들의 생활이 더 나아지지도, 제작환경에 변화가 오는 것도 아니니 이제는 모두가 ‘무력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선 짜증부터 먼저 내게 된 것이다.
이제는 국민들도 “형편이 이런데 왜 그 짓을 멈추지 않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사람들의 인식이 이렇게 바뀌어 버린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보고서가 이제는 우리 스스로에게 ‘좌절과 망신’을 자초하는 보고서로 변질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자본주의’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연극인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추신수’ 선수는 월 1천 500달러를 받던 마이너리그 선수로 출발해 지금은 7년에 1억 3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로 성공했다. 그렇다면 그를 (보고서 용어를 차용하면) 이제는 ‘상업성’ 야구선수, 또는 ‘상업(야구)선수’라고 불러야 하는가.
한편의 영화에 30만원으로 출연하기 시작한 연극배우 송강호가 편당 출연료가 9억인 영화배우로 성공했으니 이제는 그를 ‘상업 배우’라 불러야 하는가.
비록 ‘혜화동1번지’에서 실험성을 내세워 5천 원짜리 연극으로 시작했더라도, 20년, 30년이 지나면 ‘아르코 대극장’에서 10만 원짜리 티켓을 파는 상업성이 강한 연극을 하는 연극인이나 단체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실험극’ 단체로 분류돼 5천원이나 1만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면, 그나마도 공짜 관객의 비율이 3분의 1인 33%에 이르는, 전혀 발전이 없는 ‘실험연극’을 하고 있는데도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어떻게 이를 정상적인 공연행위로 볼 수 있겠는가.
연극계가 제대로 ‘이론화’를 시도하려면 이런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대학원에서 가장 많이 개설한 학과가 바로 ‘예술경영’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이런 질문과 해설은 없는 모양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 입장료를 책정해 관객을 모으는 ‘상업행위’를 하면서 ‘예술성과 실험성’을 내세워, 공짜 관객으로 객석을 채우는 연극을 ‘실험연극’이라 해서 우대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실험극’(?)을 하고 있으니, ‘상업극’은 자기들의 영역을 침탈하면 안 된다고 이를 ‘규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해괴망측’한 이론을 내세워도 되는 것인가. 연극이 공연을 하려면 당연히 관객을 모아야 하고, 관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연극을 선택할 권리를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하는 ‘실험극’의 위축을 걱정해 ‘상업극’에 규제와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입장료도 받지 않고 실험만 하면 모를까, 스스로 ‘가난’을 감수하면서 스스로를 ‘예술의 희생양’처럼 ‘영웅시’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돈을 버는 것도 자신들의 능력인 것이다. 선의로만 경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무슨 우월감으로 이런 차별을 시도하는 것인가. 혹 잘못된 ‘선민의식’이 연극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인들은 왜 ‘상업화’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연극 종사자들이 대학로가 ‘상업화’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일교포 작가 정의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본 연극인들은 ‘한국의 대학로’를 가장 부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에게는 ‘대학로’가 가장 안정된 연극의 흥행을 도모하는 곳으로 인식되는데, 한국의 연극인들은 이를 ‘실험적’ 연극을 하는 도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다양성을 시도하고 실험적인 연극을 시도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해 ‘상업화’ 되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대학로’를 부러워하는 것은 흥행이 어려운 현실에서 대학로와 같은 기지창이 있으므로 해서 흥행에 안정성을 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연극인들은 왜 대학로를 ‘흥행장’이 아닌 ‘실험장’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대학에서 연마한 ‘실험극’을 발전시켜 대학로에서 안정적인 흥행을 도모해야 하는 게 옳은 일일 텐데, 어째서 연극인들은 이를 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공연행위야말로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문화)서비스업의 일종으로 ‘상행위’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 연극인들은 공연행위를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령 프랑스의 ‘아비뇽 축제’를 보자. 이런 축제에서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지지만 그들은 이를 ‘실험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의 반응을 통해 자기들 연극의 ‘흥행적 가치’를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공연을 유럽이나 세계에 알리는 창구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로를 ‘실험장’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을 모으는 흥행이다. 흥행이 잘되어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일상인으로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연극종사자들도 대학로를 안정적으로 ‘흥행’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로 인식해야 하는데, 이를 실험성도 보이지 못하는 ‘실험연극’을 하면서 대학로를 연극의 시연장으로 인식해 상업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지원제도의 개선이 시급
여기서 우리가 진실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가난’이 가져오는 연극인들의 정신적인 고통이다. 빈곤에 지치면 패배주의는 물론이고, 이게 삶의 부정적인 태도와 사고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더 경계할 것은 이거다.
한마디로 빈곤이 야기하는 정신적 황폐에 더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연극인들이 ‘정신질환’까지 감수하면서 ‘실험성’을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지원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이의 개선을 통해 잘못된 연극제작 환경과 인식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쉽게 설명하면 ‘젊어서는 실험을, 경력이 쌓이면 상업을’ 하는 것을 당연시해야 한다. 그래도 실험을 지속하고 싶은 경력자는 지원 없이 자기 능력껏 실력을 발휘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름 성공을 이루면 이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방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원금은 연극인들에게 불필요한(?) 실험을 연명하게 하는 기능만을 할 뿐이다. 이 과제는 다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제가 답답해하던 것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다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우선생님은 보기 드문 용기를 가지고 계신 어른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촌철살인의 의견 개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극단 인어의 연극 [변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극장에 찾아주십시오.
연극인은 아니지만..
경영전문가로써 참 진실된 접근이라 보여지는군요.
부디 예술성과 고객만족(상업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연극들이 많아지길 기원합니다.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