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호 편집인의 글)
소통 부재의 벽을 허물자
국립극단 예술감독 임명 문제로 연극 동네가 시끄럽다. 단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은 가장 먼저 문화부에 있다. 현정부 들어 연극 관련 기관장 임명에 대해 연극계는 여러 차례 불편한 내색을 하였다. 그러나 내색 정도로는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것인지 문화부가 이에 대해 반응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번 연극계의 집단 반발은 계속되는 무시에 대한 누적된 불만 표출이라 할 수도 있다. 더욱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이런저런 우려의 소리가 나왔던 터이니 일방적 발표에 분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과거 유인촌 장관은 국립극장으로부터 국립극단을 빼내 법인으로 독립시켰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변변한 전용극장도 없이 군부대 막사를 개조하여 사용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외국인 예술감독 영입 계획은 철회됐지만 ‘국립’이라는 이름에 비추어 참으로 초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왕 벌어진 일이니 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임명된 손진책 예술감독은 나름의 방향성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국립극단의 존재감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국립극단이 국립기획단이 되었다는 시니컬한 반응도 있었고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도 찬반이 엇갈리곤 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하기보다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다 박근형 연출의 <개구리> 사건이 터졌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공연 후 상당한 압력이 있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과연 국립극단에서 그렇게 현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을 올리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해서 연극계 내부에서조차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정부가 나서서 예술에 대해 참견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손진책 예술감독이 연임하지 않게 된 것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가 후임이 될지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 소문만 무성할 뿐 가닥을 잡을 수 없는 상태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그렇게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에 오르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십중팔구 마음의 상처만 입고 말았다.
그러나 국립극단의 방향성에 대한 토론도 없었고, 우리 연극에서 예술감독이 과연 무엇인지 밝히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러니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에 대해 형성된 공감대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던 중 김윤철 교수의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반응들이었다. 특히 국립예술자료원장으로 취임한지 몇 달 안 된 터라 아닐 거라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내정”이라는 최초 보도에 대해 문화부가 아니라고 해명까지 하면서 이런 견해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그 해명 뒤 불과 며칠도 안 돼서 김윤철 신임 예술감독 임명이 발표되었다. 이쯤 되면 연극계가 우롱 내지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이후 연극계의 반응은 무척 신속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다. 발표 직후 한국연극협회, 서울연극협회, 연극연출가협회, 배우협회 등의 연명으로 반대 성명이 나왔고, 결국 한국연극협회 대의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임명 철회 요구를 결의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번 사태가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정부의 태도가 이래서는 언제든 같은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장의 의견을 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제각각 다른 수많은 의견을 모아 하나의 결론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효율성을 생각하여 정보 공개를 안 하거나 최소화하고 싶어 하는 태도가 있다. 그러나 그건 효율성이 아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결론을 가지고 실제 일을 성공시키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앙정부 담당 공무원 한 명의 태도가 나라 전체의 어떤 분야를 좌우할 수 있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 한 명이 노력해서 그 분야가 잘 되기는 대단히 어렵고 반대로 그 한 명이 잘못하여 한 분야가 철저히 망가지는 것은 너무도 쉽다. 그 실패의 가장 흔한 이유는 소통의 부재이다.
공무원들이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이 알면 시끄럽고 그럼 뭐 하나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극히 제한된 인사들하고만 소통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수가 많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 소수가 담당 공무원 입맛대로 선택된 거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아예 이의가 없는 거수기 역할이거나, 약간의 문제 제기 흉내만 낼 뿐 전체적으로는 결코 공무원이 원하는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 자문이라면 그건 받으나마나이다.
민간 전문가들이 충분히 내용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충분한 정보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 즉 가능한 한 많이 알려준 뒤 지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려주지 않으면 지적도 없다. 지적이 없으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라 전체가 시간에 쫓긴다. 또 당장의 가시적 성과에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풍토에서 공무원들에게 앞서와 같은 주문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가 불 보듯 뻔한 길을 가라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럴듯한 계획서와 보고서만으로 현실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엄중한 진리만은 명심해야 한다.
다시 국립극단 문제로 돌아와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다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최초 연극인들의 반대 성명에 “현장 예술인”이란 표현이 있었고, 잠시 그것에 대해 논리적 반론이 있었다. 그러나 평론가가 “현장 예술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국립극단에 예술감독 제도가 생긴 후 줄곧 연출가가 예술감독이었기에 그걸 상식으로 보고 그것을 바꾸려면 그만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는 항변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오랜 세월 평론만 했으니 현장에 대한 감각은 아무래도 한 걸음 멀지 않겠느냐는 우려 역시 당연하다. 그런 것을 두고 논리 싸움을 벌이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선 문화부의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연극인들의 불쾌감과 깊은 우려에 대하여 반드시 성의 있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 불만을 달래고 안심시키고자 끈기를 갖고 노력하여야 한다. 연극인들의 요구대로 임명을 취소하게 될지 아니면 서로 신뢰가 회복되어 한 번 믿어보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소통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철칙을 깨닫고 이후 소통 부재의 벽을 허물기 위한 다짐과 약속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발 이것이 연극계를 위한, 또한 진정한 예술 발전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2014년 3월 3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