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 이예은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2014 봄 페스티벌 ‘전통’

<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 – 데모 버전>


이예은(드라마터그, 연극학 강사)

작: 공동창작
연출: 윤한솔
단체: 그린피그
공연일시: 2014/03/20 ~ 2014/03/30
공연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관극일시: 2014.03.22.(토)

 

어떠한 장르의 작품을 접하든 초반부터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한 방’에 익숙한 요즘의 관객들에게, 힘겹게 견뎌내야만 하는 껄끄러운 시간을 연극 초반에 대면케 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검은 벽면 위에 지나치게 밝은 채도의 노란 색깔로 쓰여진 커다란 문구, “전화기의 벨, 진동이 터지는 순간 공연을 종료합니다.”는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에게 섣부른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느낌마저 준다. (실제로 3월 27일 공연에서는 실제로 전화기 진동 소리가 울려 시작 18분 만에 공연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마치 나에겐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으니 네가 알아서 비켜가라고 첫 만남에서부터 무책임하게 자기 상처를 일일이 다 꺼내어 보이는 미숙하고 가난한 자의 느낌이랄까. 그 지극히 강렬한 표현이 거북하기도, 애처롭기도 하다.

우리의 시작은 그러했다. 연극이 시작되고 한참 동안은 무대만 보고 있기에 괴로운 소외감이 밀어닥칠 지경이었다. 일부러 일본어로 말을 주고받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알 수 없는 한국어-한자어가 대부분인-로 말을 주고받는다. 과연 이렇게 무대와 관객 사이를 계속 소외시켜대다가 언제쯤 프로그램북에 적힌 판소리의 ‘한(恨)’을 실행할 것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이어서 통역자가 한 명이 등장한다. 바로 앞 장면에서 읊은 소절 사이사이에 통역자를 내세워 다시 한 번 읊는다. 마치 텍스트에 각주를 넣듯이. 그리고 이어지는 사투리 강습. 그리고는 우리가 학습한 한자어와 사투리를 섞어서 다시 한 번 같은 소절을 읊는다. 이제야 켜켜이 쌓여 온 소외된 언어들이 군데군데 생김새를 찾아간다. 의미가 들어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언어와 의미가 결합하는 그 ‘사이’의 형세가 들어온다. 소외와 친교 사이, 편견과 교감 사이, 소문과 실체 사이, 컨셉과 정신 사이. 객석을 향해 텍스트처럼 일렬로 정렬해 앉아 있던 배우들의 얼굴이 이제야 사람 같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덧입혀지는 노래. 노래로 덧입혀진 소절을 열창하며 배우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오히려 마지막에 이르러 배우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대목보다, 배우에게서 관객에게로, 최초로 언어가 의미가 되어 터져 나왔던 그 순간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배우와 관객 사이를 채우는 공기 속으로 비로소 붉은 피가 돌았다. 그 지점이 뜨거워졌던 이유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만남이 무던히 힘겹게 성립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힘겨움은 연극과 관객 사이의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사람과 사람의 것이기도, 이 작품의 경우에는 한이라는 정서의 것이기도 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묵직하고도 뜨거웠다.

 

소통이 가장 이루어지기 힘들 법한 먼 거리에서부터 차츰 거리를 좁혀 가며 판소리라는 먼 실체를 더듬어나가는 이 연극의 화법은, 도전적이면서도 가장 솔직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연극은 일본어와 한자어로 번역된 판소리로 시작을 함으로써, ‘전통’이라는 화두로 회자되는 그 먼 거리의 대상인 판소리를 아예 조금 더 먼 곳으로까지 끌고 간다. 그 의도적인 횡포에서부터 시작된 먼 거리의 서사화는 끝내 관객에게 시간의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저항력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는 점차 좁혀지는 거리와 거리 사이를 체험해내는 인내의 장력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일본어에서부터 그 시작을 보듬어 내어, 표준어로 번역한 판소리-그리하여 한자어가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어, 이어 전라도 사투리, 노래를 덧입힌 버전으로 점차 그 생경함의 수준을 단계적으로 끌어내려 가는 이 연극의 전략적인 화술. 특히 전라도 사투리 버전과 노래를 덧입힌 버전의 판소리는 점차 언어가 음악화 되어 가는 쾌감과 안도감마저 준다. 그리고 음악성이 내포되면서 점차 언어의 의미까지도 역동적인 힘을 더해가는 인상을 준다.

 

이 공연을 보았다고 하여 판소리를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공연이 일정 부분 렉쳐의 형식으로 판소리 감상법을 이끌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 공연이 판소리를 고증해내는 방식은 그다지 객관적이지도, 전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 공연은 판소리라는 화두, 판소리라는 정서를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는 공연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공연만의 조립법으로 구사해 낸 판소리의 형체가 이 공연의 시간 동안 견딤의 미학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극은 달구어짐의 미학이다. 시간의 달구어짐을 견뎌내는 미학이다. 어느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도 이같이 직접 몸으로 시간을 달구어내는 능력은 없다. 이것은 연극의 능력임과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초반부터 ‘한 방’을 기대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실망을 사기 일쑤다. 그러한 점에서 어쩌면 연극은 가장 사람을 닮아 있는 예술일 수 있겠다. 그 무엇도 아닌 사람을 만나고 돌아 온 느낌. 그것이 연극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힘이 아닐까. 이왕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일이라면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이라면 좋겠다. 관객들이 원하는 조금 당연한 거짓말을 기어코 꺼내 놓지 않는 법을 아는 연극.

한 시간 반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쉽지 않은-그러나 단지 머리로 푸는 난해함이 아닌- 몸으로 견뎌내는 쉽지 않은 교감을 이루어 낸 것 자체가 이 공연이 풀어낸 힘이며, 또한 이 공연에서 전하고자 했던 판소리의 한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로 합창된 판소리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울음으로 터져 나왔을 때 관객들에게도 함께 울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든다. 그 견딤의 시간 동안 관객들을 조금 더 달구어 주었더라면.

젊은 예술, 실험 등의 단어를 기대하며 찾게 되는 혜화동 1번지 동인들의 공연. 올해 봄, 5기 동인들이 펼쳐내는 공연의 화두는 <전통>이다. 그 첫 프로그램으로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형식과 발화법으로 ‘전통’의 문제를 꺼내어준 이 공연 덕분에 앞으로 남은 네 극단의 공연들 또한 궁금증과 설렘과 두려움으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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