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기의 공연산책 2014년 4월 공연총평
박정기
4월에는 서울연극제를 비롯해 국공립극단과 경향각지 극단의 활발한 공연활동이 이루어졌다. 그중 특기할만한 공연을 선정해 평하고, 2014 아시아 연출가전을 평하고, 2014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평은 다음 달에 하기로 한다.
1, 극단 목화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오태석 공연대본 연출의 <템페스트>
대학로 스타시티 예술공간 SM에서 극단 목화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오태석 공연대본·연출의 <템페스트>를 관람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말년에 쓴 희곡 <템페스트>를 통해 생의 찬가를 부른다. 오태석도 공연대본을 집필하며 같은 생각으로 각색을 했다. 특기할 것은 시대적 배경과 인물설정을 신라와 가락국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신라왕 가락 왕으로 바꾼 것이다.
연극은 도입에 안개가 농무로 변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소매가 긴 흰옷자락을 펄럭이며 폭풍과 파도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배가 난파하면서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을 붉은 색의 부채를 휘둘러 묘사함으로써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킬 때, 관객은 완전히 압도되어 손에 땀을 쥐고 극에 몰입하게 된다. 무대 왼쪽에서 대북을 두드리며 폭풍과 파도를 일으키는 유폐된 가락국왕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린 왕녀는 마술을 부리는 책을 펼쳐놓고 폭풍을 일으키는, 한때 가락국의 왕이었던 아버지에게 묻는다. “이 폭풍을 일으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아버지는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부녀가 이곳에 유폐된 내력을. 동생이 형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형과 세 살짜리 여식을 왕좌에서 몰아낸 그때의 상황을.
본래 이 섬의 마녀는 짐승 같은 쌍두아를 낳고 제웅을 노예로,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가락왕은 마녀를 물리치고, 제웅을 구해주고 마녀의 자식인 쌍두아를 자신의 하인으로 삼는다. 제웅은 자신을 구한 왕에게 충성을 다한다. 제웅과 쌍두아는 가락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그 대답을 원한다.
이 섬에 표류된 신라왕과 신하들의 모습이 12년 전 나라를 빼앗기고 이 섬에 정착하게 된 선왕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만들고, 폭풍 속에서 신라왕은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신하들에게 장사를 치르도록 분부한다. 그러나 왕자는 해변에 키를 쓴 채 기절했을 뿐, 가락 왕의 여식의 도움으로 깨어나고, 왕자와 왕녀의 첫 대면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어여쁘고 싱그러운 꽃망울처럼 피어나게 된다.
원수지간인 신라왕의 아들과 가락국왕의 딸과의 사랑은 <템페스트>에서 지고지순의 사랑으로 펼쳐진다. 셰익스피어의 사랑대사는 이 연극을 통해 아름답고 위대하고 찬란하게 그려진다. 마녀의 쌍두아가 가락 왕에게 말끝마다 독기어린 저주가 가득 들어있는 대사를 읊조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템페스트>는 비극이 비극적으로, 저주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비극을 거두고, 모든 저주를 풀어준다. 원수의 아들과 자신의 딸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혼례를 올리기에 이르자, 가락 왕은 철천지원수인 동생 신라왕과 화해한다. 그리고 가락 왕은 옷을 벗고 마법의 책을 던져버린다. ‘용서’라는 이름하에 온갖 저주를 풀어준다. 섬에 있던 동물들에 대한 저주가 풀린다. 그 뿐 아니라, 한 몸으로 있던 쌍두아는, 제각기의 몸으로 분리되면서 각자 독립된 생명체가 된다. 그들이 누리게 될 자유는 어느 누구의 자유보다 소중하다. 이는 오태석이 마녀의 딸 “캘리반을 ”쌍두아“로 설정하고, 대단원에서 각자 분리, 해방시킴으로써, 오태석의 <템페스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원작의 용서, 화해를 뛰어넘는 자유와 해방을 부각시켜, 원작을 극복한 <템페스트>로 탄생시켰다.
정진각, 송영광, 김성언, 정연주, 김준범, 이승배, 부혜정, 한지용, 조원준, 정주현, 김예연, 정지영, 윤민영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호흡의 일치는 한편의 걸작 총체극을 감상하는 느낌으로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고, 대단원에서 원수지간의 화해와 용서장면은 눈물이 솟는 감동으로 가슴깊이 스며든다.
다만 등장인물이 신라와 가락국 사람이니, 기왕에 경상도 방언을 사용하는 편이, 이 연극에서처럼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보다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제작감독 차현석, 의상 이승무, 움직임지도 문근성, 조명 이경천, 무대감독 하동욱, 조명팀 조세현 조성준 유태림 김진아 진진동 이형수 정하원, 사진 이도희 신귀만, 기획 오준현 한지용 등 스텝 모두의 열정이 하나가되어, 극단 목화와 이지 컨텐츠 그룹, 그리고 대한민국 셰익스피어 어워즈 조직위원회 주최,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오태석 각색 연출의 <템페스트>를 한편의 명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
2, 극단 로얄씨어터의 최명희 작, 류근혜 연출의 <화가 나혜석>
성남아트센터 앙상블 시어터에서 극단 로얄씨어터의 최명희 작, 류근혜 연출의 <화가 나혜석(羅蕙錫>을 관람했다.
최명희((崔明姬) 작가는 경기여고와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으로 1980년 ‘현대문학’을 통해 희곡 <미소 짓는 꿈>으로 등단했다. <길몽> <안개의 성>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허난설헌)> 등을 무대에 올린 1세대 희곡작가다.
이 연극은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예술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태어났다.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오빠 나경석(羅景錫)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崔承九)를 나혜석에게 소개했다. 최승구는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나혜석은 희망을 예술에 걸게 되었다.
1919년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 발발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우영(金宇英)의 구애를 받아들여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전을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남편 김우영과 함께 3년간의 유럽 일주 여행 도중 천도교의 교주였던 최린(崔麟)과 만나 불륜을 맺고,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게 된다.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한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의 병사 이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에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환희대에 오랫동안 머물었으나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사망하였다. 1918년에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1928>, <선죽교 1933>가 있다.
무대는 화가 나혜석의 화실이다. 정면 왼쪽 출입구에 계단 대신 부드러운 곡선의 내려오는 길을 만들고, 출입구를 포함한 배경 막에 길게 가로 세워진 백색의 바탕 벽면에, 나혜석의 자화상이나, 회화작품, 또는 흩날리는 종이조각, 그리고 별무리 등의 영상을 투사해,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무대 중앙에는 이젤에 얹어놓은 캔버스와 팔레트, 유화물감, 그리고 붓 등 그림도구가 보이고, 좌우 벽에도 유화작품과 캔버스를 세워놓았다. 무대왼쪽에 의자와 탁자를 배치하고 오른쪽에도 책상과 의자가 있다.
연극은 도입에 말년의 나혜석이 지팡이를 짚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등장해 출입문에 돌아서 있는 나혜석 소녀시절의 모습을 향해 언덕을 오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여기자가 등장해 한창시절 나혜석이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그녀의 전시작품이 대량 팔려나갔던 시절의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젊은 시절 나혜석으로 변모해 다시 등장해 인터뷰에 응하면서 그녀의 극적인 삶이 하나하나 펼쳐진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동경유학생, 그리고 미모의 화가 나혜석은 만인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출발한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인기를 한 몸에 집중시키게 되는 여성이면 남성들의 관심을 끌게 마련이고, 그들의 유혹의 손길이 다가서게 된다.
남편과 함께 한 프랑스 빠리 여행에서 나혜석은 유혹의 달인에게 그만 걸려들게 되고, 그와 몸과 마음을 밀착시키기에 이른다. 이 사실을 남편이 눈치 채고,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남성들은 축첩을 하고 별의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여론은 잠잠했는데, 부인의 불륜은 뭇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용서치 못할 죄악으로 치부되던 시절이라, 나혜석은 작품이 아닌 그녀의 애정행각으로 해서 그림까지 평가절하 되고, 화 업도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나혜석의 마지막 전시회에서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 절망에 빠진 그녀의 인터뷰 모습이 극에 그려지고, 위자료로 받은 거액을 전시회 실패로 다 날려버리지만, 주저앉지 않고 그림을 그리러 파리로 가겠다는 의지와, 이미 몸이 의지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진 나혜석의 모습이 비장 침울하게 연극에 그려진다. 게다가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피던 친구이자 변호사 겸 후원자인 남성이 미술전 실패와, 나혜석이 한 점의 작품이라도 팔려고 고객에게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객석에 처연한 심정을 감돌게 만든다.
대단원에서 말년의 나혜석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출입문에 돌아서 있는 그녀의 소녀시절의 모습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푸치니 오페라의 아리아는 이 극과 절묘하게 어울려 관객의 가슴과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놓는다. 나혜석이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소녀시절의 나혜석이 객석을 향해 돌아서 꿈과 희망을 표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김민정, 윤여성, 권남희, 임윤선 등 출연자 전원의 성격창출과 호연은 관객을 연극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대디자인 이유정, 조명디자인 이상근, 무대감독 박인환 등 모두의 힘이 무대위에 드러나, 극단 로얄시어터의 최명희 작, 류근혜 연출의 <화가 나혜석>을 예술성이 높은 고품격 고수준의 연극으로 탄생시켰다.
3, 극단 물결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송현옥 각색 연출의 <햄릿, 여자의 아들>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극단 물결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송현옥 각색 연출의 <햄릿, 여자의 아들>을 관람했다.
극단 물결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송현옥(1961~) 세종대 교수는 2013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제33회 최우수 예술가상(연극부분)을 수상했다. 연극을 하게 된 동기가, 소녀시절 부친이신 고(故) 송영수(1930~197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께서, 미술대학 연극공연을 모친과 함께 관람하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필자가 서울미대 극회를 창단하고 출연과 연출을 했으니 감개무량하다.
근자에 이르러 국공립극단을 비롯해 각 극단마다 셰익스피어의 변형된 작품공연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극단 물결의 <햄릿, 여자의 아들>도 변형된 작품이지만, 기존의 틀과 주제를 극복하고, 철제 빔을 가로세로 엮어 만든 계단식 장치라든가, 폐타이어의 배치는, 무대구성과 표현에서, 약동하는 조형 예술적 무대로 연출방향을 설정한 것이 감지되고, 무용가를 주인공인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로 등장시켜, 대사를 몸짓으로 대체시켜, 언어 이상의 감성전달을 하는가 하면, 배경 막에 미디어 아트 식 영상투사로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등 한편의 총체적 예술지향 연극의 탄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부왕 햄릿의 망령이 거리의 청소부로 등장을 하고, 햄릿의 동료들을 코러스와 배우로 등장시켜 장면변화마다 신속하게 대처시키고, 연출가의 처녀시절모습과 방불한 오필리어를 등장시켜, 그녀 자신이 겪었던 사랑인 듯싶은 장면을 새로이 구현해 내고, 햄릿 3막 1장의 명대사를 천정에서 늘어뜨린 줄에 매달린 폐타이어에 몸을 싣고, 독백하는 햄릿의 모습은 명장면이기도 하다. 숙부왕이 세 개의 촛불을 켠 촛대를 들고 신께 참회하는 장면이라든가, 햄릿과 모후와의 대화를 엿듣다가 들켜 죽음을 당하는 폴로니우스 장면, 그리고 배우들이 연출해 내는 부왕시해 장면은 완전 새로운 연출기량으로 표현되고, 특히 폐타이어를 차례로 쌓아올린 오필리아의 시신의 납골당적인 표현은 이 연극의 백미(白眉)라 하겠다.
대단원에서는 기존극단의 공연에서 보여주던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장면 대신, 햄릿 귀국환영잔치로 대체시키고, 햄릿이 숙부 왕에게 복수하려 드는 것을 감지한 모후가 햄릿의 단검을 몰래 빼앗아 품에 감추는 장면이나, 숙부 클로디우스가 햄릿을 살해하려고, 독 진주를 담은 독배를, 모후 거투르드가 대신 마신 후, 절명하는 순간까지 햄릿의 복수를 만류하는 장면은, <햄릿, 여자의 아들>이라는 제목처럼, 햄릿의 복수심을 용서와 화해로 이끌어 가려는 모후 거투르드의 의지이자, 송현옥 연출가의 의지가, 무대 위에 아름답게드러나, 감동이 배가된 연극이었다.
황미숙이 거투르드, 김준삼이 클로시어스, 나현민이 햄릿, 오주원이 오필리어, 코러스 장 외 청소부 김충근, 폴로니어스 이영진, 로젠크란츠 박경호, 길든스턴 박상현, 그리고 성혜라, 권설아, 장해라, 박진영, 최민석, 이현우, 진여준, 황태규, 정소정, 도상란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이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고, 특히 황미숙의 몸짓으로의 대사전달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감동이 배가 되었다.
안무 홍선미, 무대디자인 표종현, 무대감독 황호연, 작곡 음향디자인 김태근, 조명디자인 정진철, 영상디자인 김태은, 조연출 김지현 조연출 소품 성진영, 음향오퍼 이준상 김동현, 사진촬영 브랜든 김, 디자인 송지연, 기획 김대산, 홍보 안내 안소림 박정현 등 스텝 모두의 역량과 열정이 일치되어, 극단 물결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송현옥 각색 연출의 <햄릿, 여자의 아들>을 총체극적 조형예술연극으로 창출시켰다.
4, 우리극연구소의 모리츠 링케 작, 이채경 각색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
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모리츠 링케(Moritz Rincke) 작, 이채경 각색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를 관람했다.
이 연극의 원제는 <여자 벗은 몸을 아직 못 본 사나이>다.
모리츠 링케(Moritz Rincke)는 독일태생으로 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 겸 배우다. <마를렌과의 하루(1995), <러브 퍼레이드(1997)>, <여자 몸을 아직 보지 못한 사나이(1997)>, 그리고 <리퍼블릭 비엔타(2000)> 등의 희곡을 써서 공연하고, 시나리오 <셉템버(2003)>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무대는 지하에 있는 연극 연습실이다. 배경 왼쪽에 연습실로 내려오는 계단이 있다. 무대 왼쪽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 병이 술병과 함께 놓여있다. 무대 오른쪽에는 정면 벽 가까이 커다란 냉장고가 있고, 그 앞으로 발코니 형태의 장치와 계단이 있다. 경사가 완만한 원추형 기구를 천정에서 늘어뜨린 줄에 매달아 놓고, 흰 휘장을 씌워 발코니 위로 늘어뜨려, 우아한 발코니 형상과 커튼구실을 한다. 발코니 바닥에는 요를 깔아두었다. 발코니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천사의 날개가 달린 사랑의 신 큐핏트의 백색 조각상이 있다.
연극은 도입에 연출가가 수석처럼 생긴 커다란 돌을 들고 연습실 계단을 내려와 무대 중앙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대본을 펴들고 배우를 기다린다. 밖에서는 군중소리와 폭발음이 들려온다. 연출가는 “왜 배우가 오지를 않지?”를 몇 차례 되 뇌이며 계속 밖을 쳐다보다가 깜빡 잠이 든다.
연출이 잠에서 깨어나면 동시에 조명이 들어오고, 연습실 바닥에 웬 청년이 백색으로 된 천을 덮고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다. 연출가가 다가가 천을 들추니, 청년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난다. 청년도 눈을 뜨고 연출가를 바라본다. 연출가는 청년을 일으켜 세우고, 천으로 나신을 감아주며, 제대로 몸을 가리라며 연습실 구석으로 데려간다.
연출가는 청년에게 오디션을 보러 왔느냐고 물으며, 공연관련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년은 분명한 대답이 없이 동문서답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하다가, 연출가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시작하고, 이야기 도중에 “여자의 벗은 몸을 아직 보지 못했노라”는 이야기도 한다.
포성과 폭발음이 계속되면서, 여배우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등장을 한다.
전쟁인지, 자연재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여배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여배우가 줄리엣, 젊은이가 로미오로 발코니 장면 연습이 시작되면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1968년에 제작된,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하고, 레너드 파이팅과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가인〈A Time For Us>가 연습장면의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발코니 장면 중, 줄리엣이 로미오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독백하는 명대사를, 연출가의 지시에 따른 감정변화와 함께, 여배우가 몇 번을 반복해 가며 되 뇌이고, 그 모습에 감동한 젊은이가 상대역으로 등장해, 신들린 듯, 로미오 역을 환상적으로 연기해 낸다. 연출가가 놀란 눈빛으로, 두 사람의 연기를 바라보면서, 두 연기자는 가상속의 극적인 연인관계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실제연인관계로 밀착된다. 이를 본 연출가가 분노를 터뜨리게 되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의 폭음도 절정을 이루면서 벽돌 무더기가 계단을 통해 실내로 쏟아져 내려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주변 환경과 감정격화로 연습의 중단과 계속이 이어지면서,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여배우나 연출가의 얼굴에 피가 낭자한 모습이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연출가는 질투심에서인지 젊은이를 냉장고에 집어넣어 몸을 얼도록 하기도 하지만, 무대에 있는 큐핏트의 상으로부터의 사랑의 화살을 맞은 남녀배우의 사랑의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대단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연출가가 깨어나고, 지구의 종말이 오드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의 연습을 계속하겠다는 연극인다운 의지를 보이면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배보람이 줄리엣, 강호석이 연출가, 임현준이 로미오로 등장해 독특한 성격창출과 열연으로 관객의 갈채를 받는다.
음악 폴 캐슬즈, 안무 박근태, 의상디자인 이윤정, 무대디자인 김서연, 무대제작 김경수, 조명디자인 조인곤, 사진촬영 조인곤 이윤주, 드라마투르기 김예나, 홍보디자인 손청강 황유진, 기획 홍보 노심동 김아영 등 스텝 진의 기량도 드러나, 게릴라극장 해외극페스티벌 첫 번째 작품, 우리극연구소의 모리츠 링케(Moritz Rincke) 작, 이채경 각색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를, 청년관객이면 누구나 연극을 하고 싶고,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연극으로 만들어 냈다.
5, 극단 풍경의 데니스 켈리 작, 성수정 역, 박정희 연출의 <러브 앤드 머니>
선돌극장에서 극단 풍경의 데니스 켈리 작, 성수정 역, 박정희 연출의 <Love&Money>를 관람했다.
데니스 켈리(Dennis Kelly 1970~)는 2010년에 초연된 뮤지컬 <마틸다(Matilda)>의 원작자로 처음 소개되었다. 2005년에는 <영웅 오사마(Osama the Hero)>로 주목을 받았고, 2006년에 <러브 앤 머니(Love&Money)>로 젊은 부부의 사랑과 돈에 관련된 비극적 이야기를 그려 많은 공감을 얻었다. 2014년에는 아침부터 밤까지(From morning to Midnight)라는 희곡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국극작가다.
번역을 한 성수정(成壽貞)은 <레드,> <에이미>, <셜리 발렌타인>, <나쁜자석>, <채권자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을 번역한 연극계의 보배다. 2002년 <거기>, 2003년 <달의 저편> 작품번역을 시작으로, 2004년에는 뮤지컬 <맘마미아>도 번역했다. 그녀는 대학(연세대 사학과)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영자신문(코리아 헤럴드)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2002년부터 희곡 번역을 시작했다. 외국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길 뿐 아니라 원작자와 저작권료 협상까지 한다. 인터넷을 통해 한 달에 20∼30권씩 외국 희곡을 구입하고 외국 신문의 공연 평을 빼놓지 않고 저장한다. 한국 젊은 작가의 희곡을 영어로 번역해, 외국 무대에 올려보고도 싶다는 그녀의 뜻을 충족시킬 젊은 작가의 희곡이 쏟아져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대는 선돌극장의 기존의 좌석배치를 바꿔, 원래 객석의 상단부분만 남기고, 무대자리에 좌석을 배치해, 내려다보는 무대가 아닌 올려다보는 무대가 되었다. 원래 객석상단부분과 소파가 장치와 대도구로 사용된다.
연극은 도입에 여자 친구에게 계속 문자를 보내는 젊은 남성의 모습과, 문자가 영상으로 배경 막과 무대에 투사되면서, 년대와 달, 그리고 날짜가 알려진다. 남성이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소파에 속옷 바람으로 누워 잠들고 있다. 아내를 깨우며 남편은 신형 아우디를 타고 왔노라며 자랑을 하지만, 아내는 반응이 없다. 남편은 아내를 건드려 보기도 하지만 숨 쉬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계속 여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한 시간 가량 지내도 아내가 움직이지를 않으니, 남편은 아내를 흔들어 깨운다. 그러자 아내는 소파 아래로 떨어져 내려와 바닥을 구른다. 깜짝 놀란 남편은 그제야 아내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것을 알고, 토하게 하려고 독한 술을 먹인다. 아내가 눈을 치켜뜨고 남편을 바라보지만, 그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남편은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하면서 장면전환이 되면, 연극은 곧바로 과거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부부는 부채가 있는 것으로 설정이 되고, 남편은 목돈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받는다. 새 직장은 남자의 여자 친구가 경영하는 휴대폰 관련 회사인데, 세일즈 담당이 아니라, 물품창고 지기라는 직함으로, 마음에 내키지는 안지만 취업을 하게 되면서 입사원서에 서명을 한다. 그런데 빚을 갚기 위한 상당액의 목돈을 회사에서 선금으로 지급하지 않으려하니 항의를 한다. 그러자 여자 친구인 회사대표가 다른 사원들을 내보내고, 남자친구에게 다가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여자상사에게 성적인 봉사를 해야 하는 업무(?)다.
장면이 바뀌면 휴대폰 회사의 상품판매와 관련된 광고에 출연해, 일사분란하고 조화로운 동작을 보이는 사원들과 남편의 모습이 관객의 눈길을 끈다.
장면전환이 되면 회사사원으로 출연한 나이든 출연자가 주점에서 여종업원과 대화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거의 딸 벌 밖에 아니 된 젊은 여종업원에게 치근거리는 모습이, 동서양이 다를 게 없다. 나이든 남성은 여종업원의 연락처와 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아내고서야 치근거리는 동작을 멈춘다.
남편은 아내가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리로 달려간다. 그런데 아내가 입원한 게 아니라, 아내가 어떤 남자를 응급실로 데려다 놓고, 지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내의 말로는 생판 모르는 남자의 휴대폰이 갑자기 튕겨나가 버스바퀴에 깔리면서 그리로 달려간 남자도 함께 다쳐 병원에 데려왔다는 이야기다. 옥스퍼드거리에 있다는 아내의 문자를 받은 남편이, 그 거리에서 훨씬 떨어진 거리 뒷골목에서 생긴 버스사고를 어떻게 알고, 사고로 다친 남자를 병원으로 데려오게 되었는가하는 남편의 질문에, 아내는 쇼핑을 하려고 왔을 뿐이라는 대답을 한다. 잠시 후 병실에서 의사가 나와서 남성이 절명했다는 소리를 하고 퇴장한다. 남편이 슬퍼하는 아내에게 무엇을 쇼핑했느냐며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니, 핸드백에서 DVD 테이프를 꺼내놓는다. 왜설 물 테이프임을 알고 분노한 남편이 밖으로 뛰어나간다.
대단원에는 죽기 직전의 아내의 모습과, 거액의 빚으로 해서, 2년밖에 아니 된 꿈속의 사랑 같은 결혼생활이 깨뜨려지는 것을, 안간힘으로 버티며 견뎌내려는 아내의 사랑스런 모습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김훈만, 박유밀, 김정호, 이서림, 최성민, 전유경, 안지윤, 김예은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은 일찌감치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고 갈채를 이끌어낸다.
무대 여신동, 조명 김창기, 의상 김지연, 음악 장영규, 분장 소품 장경숙, 안무 금배섭, 영상 윤민철, 조연출 김종수, 연출인턴 정승기 이다은, 그래픽 다홍디자인, 기획 홍보 코르코르디움 등 스텝 모두의 노력과 열정이 드러나, 극단 풍경의 데니스 켈리(Dennis Kelly) 작, 성수정 역, 유림 드라마터그, 박정희 연출의 <러브 앤 머니(Love&Money)>를, 동서양이 한가지로, 거울에 비추어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싶은 연극으로, 충격과 연민을 관객에게 던져준 한편의 문제작의 탄생이었다.
6, 예술의전당의 볼프강 폰 괴테 원작, 한아름 재창작, 서재형 연출의 <메피스토>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볼프강 폰 괴테 원작, 한아름 재창작, 서재형 연출의 <메피스토>를 관람했다.
이 연극에서는 원작의 <메피스토>를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재창작한 음악극이다.
무대는 오케스트라 박스에 가득채운 책장과 잔뜩 꽂힌 서적들로 해서 파우스트 박사의 서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무대는 “ㅅ” 자 형태의 장치로 채워져 파우스트 박사의 서재 겸 거실로 사용되고, 무대 왼쪽 상단에는 의자에 앉은 사람크기의 여자인형이 눈에 띄고, 후에 그 인형은 그레첸 역할로 바뀐다. 왼쪽 하단에는 장식장이 있어 간단한 소품과 더불어 해골바가지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무대 오른쪽에는 소형 피아노가 놓여있고, 그 옆으로 출입문이 있다. 극의 진행에 따라, 영상투사로 무대전체를 숲속분위기로 만드는가 하면, 메피스토를 닮은 여성얼굴의 영상을 투사하기도 한다. 천정으로부터 줄에 매단 등롱 수십 개가 내려와 허공에 매달린 풍경을 연출해 내고, 무대바닥의 뚜껑이 열리면 지옥의 정령들이 출현하고, 무대 좌우의 벽면 출입구는 메피스토와 개의 등퇴장 로가 되기도 한다. “ㅅ” 자 형태의 세트가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이동식 침대를 들여와 그레첸의 침실 구실을 하고, 굴뚝형태의 수직의 건조물이 세워지거나, 나무기둥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단원에서는 정령들이 관을 들여오기도 한다.
연극은 도입에 파우스트박사의 평생 이룩한 학문적 업적과 거기에 따르는 열정과 고뇌의 세월, 그리고 백발이 되어서야, 젊음을 잃은 것에 대한 후회가, 남성 파우스트 박사의 젊은 여성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으로 나타나고,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파우스트의 욕망은, 젊음을 회복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메피스토에게 맡기라는 계약을, 사탄인 메피스토와 맺게 된다. 메피스토를 따르는 지옥의 정령들이 둘러싼 가운데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시작한다. 너무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젊은 청년시절로 변신하는 파우스트의 모습과 음성이 관객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그런 후 그레첸을 찾아가 지옥의 정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그레첸이 두 사람의 주변에 사탄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피력하자, 파우스트는 욕망의 불길에서 순수한 사랑 쪽으로 심경을 바꾸려하지만, 모습은 젊어졌어도 욕망은 노년의 욕정이기에, 이성에 따르는 양심과 감성적 욕망 사이에서 파우스트는 다시 한 번 갈등과 고뇌에 빠져 몸부림친다.
게다가 파우스트가 그레첸과 몸과 마음을 밀착시켰을 때 돌연 입속으로 쥐가 한 마리 뛰어 들어간 느낌을 받고, 그 쥐를 뱉어버리는 행동이, 그레첸이 파우스트 박사의 씨를 잉태한 후, 그 출산과정에서 뱉은 쥐처럼, 아기가 죽은 것으로 묘사되면서, 결국 그레첸도 비탄과 함께 아기의 뒤를 따라 죽음의 나라로 떠나버린다.
파우스트 박사의 비통함이 극에 달하고, 모든 것을 종전의 상태로 되돌려 달라고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하늘이 파우스트를 천국으로 데려가니, 지옥의 정령들도 모두 모습을 감추고, 홀로 남은 메피스토가 계약서를 꺼내들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파우스트로 정동환, 메피스토로 전미도, 그레첸으로 이진희가 출연해 기존의 파우스트나 메피스토, 그리고 그레첸 역과는 전혀 다른 성격창출과 호연으로 연극을 이끌어가고, 관객을 일치감치 연극에 몰입을 시킨다. 정령들의 코라스 역시 일사분란하고 조화된 연기와 노래로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작곡 황호준, 안무 장은정, 무대 여신동, 조명 서재형 강대근, 영상 김장연, 음향 한국란, 의상 이유선, 소품 구은혜, 분장 채송화, 기술감독 윤대성, 무대감독 송민경, 조연출 김재형 황슬기 등 모두의 노력과 기량이 일치되어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 기획 제작, 볼프강 폰 괴테 원작, 한아름 재창작, 서재형 연출의 <메피스토>를, 원작<파우스트>를 한 단계 넘어선 독특한 음악극 <메피스토>로 창출시켰다.
7, 국립극단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정의신 극본 연출의 <노래하는 샤일록>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정의신 극본 연출의 <노래하는 샤일록>을 관람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기념공연의 하나로 국립극단이 마련한 정의신 극본 연출의 <노래하는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유태인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그릇된 시각과 영국인의 통념을 부각시키고,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뇌를 그려내어, 그와 적대관계였던 안토니오를 통해, 베니스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혐오와 냉대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깨닫도록 만들고, 자신이 목숨까지 바쳐 도와주려 했던 절친한 친구 밧사니오를 포함한 베니스인 동료들의 유태인에 대한 그릇된 통념에 실망하여 종당에는 안토니오가 허탈감에 빠지는 것으로 작품에 그려낸다. 대단원에서 샤일록은 딸을 데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딸까지 태어나 성장한 고장, 베니스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장면을 마무리로, 400여 년 만에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인종에 대한 편견과 단점을 부각시켜, 원작을 극복한 정의신 극본 연출의 <노래하는 샤일록>으로 탄생시켰다.
다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혜롭지도 않고 분별력도 없는 것으로 묘사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까지는 지적하지 못한 것은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대는 왼쪽에 샤일록의 집 기둥과 지붕이 보이고, 중앙에는 난간이 달린 반원형의 다리가 있다. 다리는 출연자들이 움직이면 360도 회전을 할 수 있어, 장면변화에 대처한다.
독특한 점은 원작의 남자등장인물을 여성출연자로 대체시키거나, 여성 역을 남성출연자가 대신함으로써 극적흥미를 배가시킨다. 의상 역시 남녀출연자의 바뀐 성별에 맞춘 의상의 변화로, 의상효과 역시 드러나 보인다.
안토니오의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장면은 커다란 천으로 무대를 덮고 흔들어 높은 파도를 연출해 낸다.
음악도 연극의 내용과 상응한 적절한 곡이고, 노래 역시 극 내용과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 상승의 주도적 역할을 한다.
연극은 도입에 광대형상의 여성출연자를 등장시켜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고, 안토니오가 친구 밧사니오를 위해 샤일록과 계약을 맺는 장면에서의 밧사니오가 자신의 온 몸을 북을 치듯 두드리는 연기 설정,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의 부각과, 샤일록의 딸이 베니스의 건달에게 유혹당해,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금을 챙겨들고 건달과 함께 집에서 도망하는 장면, 밧사니오의 연인을 중년에 가까운 노처녀 포오샤로 설정하고, 나이든 포오샤의 아버지의 유언대로, 구혼자 중 한 사람인 유색인을 등장시켜 금, 은, 동 함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장면과, 밧사니오 역시 그중 하나를 열어 구혼자로 선택되는 장면이 자못 희극적으로 그려져 객석으로부터 폭소가 끊이지를 않는다.
샤일록의 재판장면과 포오샤가 몸종과 남성정장으로 등장하면서 익살맞게 보이는 동작과 연기, 그리고 판사 포오샤가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가슴에서 1파운드의 살을 베어내되 한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아니 된다는 억지판결이 베니스의 법정에서는 정당하고 정의로운 판결로 인정되고, 유태인에 대한 냉대와 편파적 판결이 샤일록을 법정패소로 몰아가고, 그 장면에서 샤일록의 괴로움과 억울함이 극에 제대로 부각된다.
승소 후 귀가한 포오샤의 결혼반지 이야기라든가, 밧사니오가 안토니오를 포오샤에게 목숨보다 귀한 친구라고 소개하자, 반지를 친구에게 드리라는 포오샤의 권고에, 반지를 젊은 판사에게 선물한 이야기, 그리고 젊은 판사가 포오샤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밧사니오 부부의 금실이 더해가지만, 안토니오는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빠진 친구를 돕기 위해 샤일록에게 돈을 무이자로 빌리고, 대신 장난처럼 가슴살 한 근을 주기로 계약한 것이, 법정에서 유태인에 대한 냉대와 혐오 때문에, 엉뚱한 판결로까지 비화한 것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리고 패소와 더불어 전 재산을 상실하게 된 샤일록의 처지를 되새기면서 동정심을 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어쩌랴?
샤일록의 딸이 베니스 건달에게 버림받고 반미치광이 걸인처럼 된 모습으로 다리 밑에 주저앉은 모습과, 샤일록이 딸을 보고 비탄에 빠지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딸을 끌어안으며 일어서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대단원에서 광대를 제외한 샤일록과 모든 출연자들이 백색의상을 착용하고 샤일록 부녀를 배웅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박기륭, 윤부진, 김정은, 이윤재, 이동준, 유정민, 구도균, 박현철, 유종연, 박주용, 김지훈, 이재근, 권소현, 양한슬 등 출연자 모두의 호연과 열연이 관객을 극에 완전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고, 미미, 이준희, 김하나, 최명환 등의 연주가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무대 이케다 토모유키, 조명 김창기, 의상 김지연, 작곡 김철환, 안무 박은영, 장치 및 소품 최슬기, 분장 길자연, 음악감독 김시율, 음향 강국현, 편곡 및 노래지도 미미, 격투지 쿠리하라 나오키, 그 외 스텝 진의 열정과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재)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정의신 극본 연출의 <노래하는 샤일록>을 원작을 극복하고, 한걸음 성큼 뛰어넘는 연극으로 창출시켰다.
8,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 <바후차라마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 <바후차라마타>를 관람했다.
<바후차라마타(Bahuchara Mata)>는 성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인도어로, 극의 내용은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다. 여성이면서도 남성처럼 생각하고 자라나 남성으로 행세하고, 남성이면서도 여성처럼 생각하고 자라나 여성행세를 하며, 동성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도를 극의 배경으로 한 것은 현재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수천 년간 인도인의 생활 규율 역할을 해 온 카스트제도는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관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고, 이 안에는 다시 수많은 하위카스트(subcaste)가 있다.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 있다. 카스트제도가 생긴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졌다. 엄격한 카스트제도 하에서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 규범을 준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브라만은 반드시 해가 지거나 뜰 때 기도를 해야 했고 경을 외워야 했다.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 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크다. 부처가 태어난 나라지만 인도사람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기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를 포함한 많은 사회 개혁 운동가들은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 보호에 앞장섰다. 오늘날 인도에는 1억 명이 넘는 하리잔이 있다. 인도 정부에서는 입학이나 취업 시 일정 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동성애, 자기와 다른 성으로의 행세,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결혼은 인도인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흡사한 인간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특히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의 환관(宦官), 다시 말해 “내시”를 생각나게 하는 연극이다.
무대는 배경 막 가까이에 연주석이 마련되어 있고, 건반악기,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연주하는 4인의 연주자가 자리한다. 한 계단 아래에는 이십여 개의 화장대를 가로 놓아 출연자들이 거울을 세우고, 의상을 갈아입거나 분장을 하도록 하고, 무대 위에는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의자를 늘어놓아 연기자들이 앉도록 해 놓았다. 종반에 천정에서 줄에 맨 수백 개의 방석을 내려뜨려, 관객을 무대 위로 인도해 방석에 앉도록 하기도 한다.
연극은 도입에 연출자가 등장해, 극에 관한 해설자 역할을 한다. 극의 중간 중간에 등장해 해설을 하고, 극의 마무리까지 해설자 역할을 연출이 착실히 해낸다. 출연자들도 객석 앞줄에 앉아 있다가 등장해, 각자 의자에 앉아 자기소개를 한다. 인도출신 연기자가 대사를 할 때에는 배경에 자막 영상이 투사된다. 우리나라 연기자가 대사를 할 경우에는 영어자막이 투사된다. 연출이 7년간 인도에 머무르며, 트랜스젠더와 만나 대화하며 얻은 소재라는 설명과 함께 시작되면, 배우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남성행세, 여성행세를 하게 된 경위와 동성과 또는 이성과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동기를 극적으로 구현해 낸다. 출연자가 일체가 되어 무용하듯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짝을 이루어 연기하고, 개인이 무언으로 표현해 내기도 하며, 1시간 45분간을 관객을 공연에 몰입시킨다. 종반에는 천정에서 무대로 내려온 수백 개의 방석에 관객을 앉도록 해, 연극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연출가의 무대 활용과 동선활용이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시킨 독특한 공연이었다.
최재영, 이지연, 공병준, 최수진, 조아라, 황혜란, 발라크리쉬난, 팔라니 무루간, 엔젤 글레디, 푸자 발루 등 출연자들의 일사 분란한 연기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고, 갈채를 이끌어 낸다.
연리목, 마두앙, 스리 사미르 라오, 비시와 바랏, 김우조 등 연주자의 연주도 극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이끌어간다.
조연출 김혜성, 드라마터그 황혜란, 무대미술 김경희, 의상 이진희, 의상 어시스트 고혜영, 조명 강정희, 김요찬 음향 등 스텝 진의 역할도 극적 분위기 상승의 주요한 역할을 해,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 <바후차라마타(Bahuchara Mata)>를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어 냈다
9, 극단 성좌의 몰리에르 작, 안영선 번역, 권은아 연출의 <허풍>
혜화동 아름다운 극장에서 극단 성좌의 몰리에르 원작, 안영선 번역, 권은아 연출의 <허풍>을 관람했다.
허풍은 몰리에르(Moliere 1622~1673)의 <할 수 없이 의사가 되어(Le Médecin malgré lui)>를 한국판으로 번안과 각색을 해 마당극으로 만들었다.
몰리에르는 당대의 사회 귀족층과 성직자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그의 작품 중에는 의사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몰리에르가 의사를 자주 등장시킨 이유에 대해,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가, 의사의 반복되는 진료에도 차도가 없자, 의사에 대한 반감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 보수적인 그들의 권위의식과 융통성 없는 태도에 대한 불신을 작품에 그려냈다.
몰리에르의 <할 수 없이 의사가 되어>는 도박과 술로 모든 재산을 날린 남편을 아내인 마르띤느가 유능한 의사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해, 억지로 의사행세를 하게 된 스가나렐의 이야기다. 스가나렐은 사람들을 속이고 교묘히 의사 행세를 하며 돈과 명예를 얻는다. 남편 스가나렐의 아내에 대한 폭행에 아내인 마르띤느의 복수가, 오히려 스가나렐의 거짓 의사행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스가나렐은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주절거리고, 라틴어를 모르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가슴의 오른편에서 심장을 찾는 등 <억지의사>인 가짜 의사 스가나렐의 모습을 통해 지식인의 허식과 자기과시, 그리고 그러한 가짜 지성에게 속는 세태를 조롱하듯 작품에 그려 넣었다.
극단 성좌는 <가짜 의사> 대신 <허풍>이라는 가짜 무당으로 변신을 시켜 등장시킨다. 땅꾼 노릇을 하며, 뱀을 만병통치약인양 선전을 해 팔아먹고, 술과 도박으로 소일하는가 하면, 부부싸움마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골탕 먹이려고, 어느 부자 집 여식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이 벙어리 귀신을 퇴치할 수 있는 초능력자 무당이라 속여, 소문을 듣고 부잣집 사람들이 찾아와 <허풍>을 강제로 끌어다 주인 앞에 대령시킨다.
부잣집 딸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하자, 딸이 벙어리 행세를 하는 것임을 <허풍>이 우연히 알게 되고, <허풍>의 작전이 벌어져, 딸은 자신의 의도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지만, <허풍>이 가짜무당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허풍>은 죽음의 면전에 놓인다. 그 때 부인이 등장해 자신이 짓궂게 남편이 봉변을 당하도록 거짓 소문을 퍼뜨린 사실을 고백하고, 찾아와 용서를 구하니, 부자는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돌린다는 행복한 귀결의 희극이다.
연극은 도입에서부터 흥겨운 장단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시작해, 객석과 일체가 되어 놀이마당으로 펼쳐지다가 대단원에 이르러 감동적인 마무리를 하는 걸작 마당극 <허풍>이 되었다.
장영주, 조주현, 구본임, 강상훈, 홍성숙, 안홍진, 강신구, 이동환, 윤관우, 박선정, 김미라, 전민지, 최창배, 김정욱 등이 출연해 활력 넘치는 동작과 출중한 호연을 펼쳐 갈채를 받는다.
음악 한철, 무대미술 서인석, 무대감독 이한규, 의상 김정향, 사진 이도의, 분장 전은실 등 스텝진의 기량도 드러나 극단 성좌의 몰리에르 작, 안영선 번역, 권은아 연출의 <허풍>을 흔쾌하고 밝고 명랑한 걸작 마당놀이로 탄생시켰다.
10, 서울시극단의 김혜련 예술감독, 윤정모 작, 구태환 연출의 <봉선화>
세종문화회관 M 시어터에서 서울시극단의 김혜련 예술감독, 윤정모 작, 구태환 연출의 <봉선화>를 관람했다.
<봉선화>는 일제시대, 종군 위안부 문제를 객관적 입장이 아닌 가족의 입장에서 다룬 연극이다.
종군 위안부 동원에 관계한 일본인의 증언을 소개한다.
1943년부터 1945년 8월 8일 패전(敗戰)까지 일본 야마구치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일했던 요시다 세이지는 1991년 11월 21일 훗카이도 신문과의 회견에서 ‘유언하는 심정’으로 조선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 연행한 자신의 체험을 털어놓았다. 요시다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조선 여성들을 강제 연행하여 종군위안부로 보낸 사실을 생생하게 밝혔다. 요시다는 ‘인간 사냥꾼’이 되어 부녀자 6천명을 연행한 자신의 비인도적 행위는 뒤늦게나마 눈물로써 참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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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일행은 경찰 30~50명을 대동하고 경찰용 호송 트럭으로 예정된 마을을 급습한다. 우선 경찰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마을 전체를 포위하여 도망가는 사람을 막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한다. 마을 사람이 전부 모여도 정신대로 끌어갈 만한 여자는 3~4명에 불과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경찰이 사정없이 목검(木劍)으로 내리치고, 울부짖는 여자들을 후려갈기며 젖먹이 아이를 팔에서 잡아떼며 억지로 트럭에 실었다. 아이를 업고 나온 여자들은 반 광란상태였다. 아기를 여자로부터 떼어내 노인에게 던져 주고 머리채를 질질 끌어 무조건 호송차에 실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울면서 호송차를 뒤 쫓아왔다. 그 아이를 팽개쳐 밀어내고 애원하는 노인은 발길질로 넘어뜨렸다. 온 마을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마을에서 반항할 만한 젊은이들은 이미 군대나 노무자로 끌려가고 없었기 때문에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더구나 무장한 경찰관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요시다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뒤지면서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사냥’을 저질렀다. 이렇게 끌어 모은 여자들은 수백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화물열차에 실려 부산으로 이송되어 관부연락선에 태워졌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서부군사령부에 인계하는 것까지가 요시다의 임무였다. 끌려온 조선 여성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남방의 일본군 위안소로 보내졌다.
요시다와 같은 임무를 가진 수만 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군부의 명령을 착착 실행했다.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본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강제 종군위안부를 포함한 강제 연행 관련의 공식 기록이나 관계 문서는 패전 직후 일본 내무성 사무차관의 통첩에 의해 모두 소각 처분되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여한 바 없다고 우겨 온 것이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자신의 체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과 경찰 및 행정기관이 일체가 되어서 한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연극 <봉선화>에서는 어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 현재 대학학장인 아들과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고 성장해 온 손녀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벌이는 부녀간의 갈등과 일제시대, 할머니의 위안부로서의 고난의 삶이 복선으로 전개되는 연극이다.
무대는 스크린, 망사막, 백색바탕의 가리개를 중간 막으로 장면변화마다 상하 좌우로 사용하고, 영상으로 실크 스크린에 일제시대, 종군위안부들의 모습을 투사하면서 연극을 이끌어간다. 사각의 입체조형물을 사용해, 소녀들의 놀이터 장면에 배치하고, 일본군들이 위안부들과 벌이는 육체접촉 장소로 묘사되기도 하면서, 탁자와 의자를 들여와 대학 이사장 실이나, 학장실의 대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단원에서 종국위안부였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그 묘소가 영상으로 투사되고, 그 아들이 슬픔에 못 이겨 쓰러지기까지, 무대는 출연자들의 연기와 조화를 이룬, 무대전체의 변화가, 하나의 움직이는 조형예술작품 같은 느낌의 공연으로 창출되었다.
연극은 도입에 대학 이사장인 할아버지가 예술대학장인 사위에게 대학총창 직을 맡기려는 자리에, 손녀가 역사다큐멘터리 작품을 제작하는 재일동포청년과 함께 등장한다. 손녀는 그 자리에서 학위논문으로 일제시대의 종군위안부문제를 다루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어른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을 준비 못하도록 조처한다.
장면이 바뀌면 일본패망과 함께 귀국한 종군위안부였던 아내를 박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이를 힘을 다해 말리는 아들, 그리고 아들까지 두들겨 패는 아버지의 모습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결국 술로 인해 저세상으로 가게 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주위사람들이 하게 된다. 연극에서는 바로 그 종군위안부의 아들이 장차 대학의 총장이 되려는 현재 예술대학 학장이자, 여주인공인 손녀의 아버지다. 그렇기에 할머니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아버지로서는 딸의 논문준비를 적극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딸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딸은 종군위안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발고 그 당사자인 자신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는 참혹한 세월과 역사적 질곡을 견디고 이겨낸 여인답게, 의젓하고, 자애롭고, 아름다운 심성으로, 아들의 출세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아들과 멀리 떨어져 홀로 살고 있음이 알려진다. 물론 손녀는 자신의 친 할머니인 것을 모르고 다가간다. 그리고 종군위안부의 삶이, 불량배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것처럼 억울한 일이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딸의 이러한 움직임에 아버지도 자신의 어머니를 남모르게 찾아 나선다. 그리고 백발의 어머니의 모습을 눈물을 삼키며 몰래 지켜본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행동을 딸의 친구인 재일동포청년이 영상으로 잡는다.
대단원에서 아버지와 딸이 할머니 문제로 맞닥뜨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 앞에서 끝까지 부인을 한다. 그러자 딸은 며칠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묘소 의 영상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린다. 아버지의 통곡과 슬픔이 아버지를 실신시키기에 이르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딸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일으켜 세우고, 부녀가 깊게 포옹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이창직, 강신구, 김신기, 주성환, 최나라, 이재희, 황연희, 이경, 권재원, 박신운, 김대현, 박수현, 이수형, 강보미, 김현정, 인혜선, 이민주, 최문혁, 김수금 등 출연자 전원의 열연과 호연은 관객을 시종일관 연극에 몰입시키고, 감동적인 마무리까지 이끌어 간다.
드라마트루크 양윤석·김경주, 작곡·음악감독 김태근, 무대미술 임일진, 미술어시스트 오미연, 조명 김학철, 조명프로그래머 김정태, 조명오퍼 설정식, 조명크루 조성준·유태림·진진동·이전한,음향 이유진, 음향크루 김원심·송민준·계명준, 소품 서현석, 의상 홍정희, 의상어시스트 최서진, 분장 김선미, 다큐영상 강영만, 무대감독 장연희, 무대조감독 박창명, 조연출 김정아, 홍보 ·위더플랜, 진행 김바우, 기획 이강선 등 스텝진의 열정이 하나로 되어, 서울시극단의 김혜련 예술감독, 윤정모 작, 구태환 연출의 <봉선화>를 걸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