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는 가족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
강양은 (청운대학교 방송연기학과 조교수; 배우)
작: 김의경
연출: 이윤택
공연일시: 2014/06/24-07/13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4/06/26 7:30pm
연기를 하고 연기를 지도하는 예술인으로, 예술에 관한 작품을 보는 것만큼 희열과 공감, 또 다른 기대감에 가슴이 뛰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시대와 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예술이라는 무한한 그릇 속에 담긴 인간 영혼과 삶의 노래들이 필자에게 마음 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중섭(1916.9-1956.9) 화가, 필자는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접하고 알게 된 우리나라 대표 화가 중 한 분으로 ‘소’는 잘 알려진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즉, 대표작으로는 황소, 흰 소, 싸우는 소, 소와 아이, 소와 새와 게, 길 떠나는 가족, 길, 가족, 게와 가족, 파란 게와 가족, 꽃과 아이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등이 있다. 이 소재들은 작품에 나타나는 오브제(object)들이기도 하다. 이 공연을 통해, 이중섭화가의 삶과 예술세계가 일제 식민지 치하와 6.26전쟁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의 예술적 혼과 무대 위 배우들, 작품에 참여한 예술인들과 더불어 한 호흡으로 밀도 있게 펼쳐진다.
예술인으로서 이중섭의 고민과 절망은 우리 모두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생계유지가 불가한 화가로서의 삶,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맘껏 펼치지 못하는 아픔과 원망, 재능과 능력 결핍에 갈등하는 예술인으로 좌절과 낙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침, 한국 땅, 그 흙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의 예술의 정기 그리고 가족애 등은 그의 삶인 동시에 우리네 인생 얘기를 들려준다.
<길 떠나는 가족>의 그림을 묘사하는 배우들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슬로우모션(slow motion)으로 어디로 향해 움직인다. 달구지를 끄는 아빠가 되고 천진난만 아이가 되고 사랑 가득한 엄마가 되고 누이가 되어, 소와 더불어 꽃, 나비, 새, 게, 물고기와 함께, 어둠을 딛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희망을 노래하며 행복한 여행을 하는 듯하다.
공연을 보면서 필자는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그림 속 등장인물들이 생명을 받아 무대에 뛰어나와 한 선, 한 색을 그리고 채색하고 그림으로 돌아가는 듯한, 이중섭 화가와 그의 그림들이 상상의 공간에서 관객과 함께 동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3차원의 입체화된 대소도구가 아닌 이차원적인 평면적 소품들은 화가, 그림이라는 작품의 소재를 연극과 조화롭게 창의적으로 부각시킨다. 또한 무대 위에 펼쳐진 배우와 소품 등의 오브제(object)들의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표현력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배우들의 하체의 무게 중심을 둔 절제된 움직임과 배우와 소품의 일체감으로 배우를 통해 무생물이 생물로의 전이,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과 존재적 표현력은 참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특히 아이를 대변하는 퍼펫(puppet) 인형은 배우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또 다른 영혼의 깊은 울림을 전한다.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호흡을 전하는 배우들과 연출에 의해 전개되는 이중섭 화가의 작품들의 표현들은 예술적 미가 돋보인다.
그리고 오광수(미술평론가)가 언급한 것처럼 “이중섭 작품의 강인한 선조, 이미지를 상감하듯 종이 위에 연필로 강하게 그어 나가는 것과 유화 작품에서 끝이 뭉뚝하게 붓으로 휘휘 저어나간 듯한 속도의 운필”은 공연 속에서도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그 특징이 발견되고 드리워진다.*
그리고 기존 배우들의 상투적인 연기에 여전히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때, 이들의 연기와 공연은 클리셰(cliche)가 없이 살아있는 호흡으로의 에너지를 품어내므로, 같은 시공간 안에 있는 관객에게 함께 하는 공존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관객이 무엇을 사고하고 판단하고 어떤 감성이 자극이 되든지. **
명동예술극장 구자홍 극장장은 “좋은 연극을 만들어 좋은 관객을 창조하려는 모색과 도전 […] 관객들이 환호하는 탁월한 무대를 통해 관객층을 두텁게 함으로써 한국연극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5년의 작품 중 한국연극사를 빛낼 연극은 기대에 미흡했다는 의견에는 안타깝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윤택 연출은 “새것에의 욕구와 질주 속에서 옛날 연극을 다시 만든다. 그러면서 지금 이곳에서 다시 볼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새삼스럽게 살피게 된다. 옛날 연극을 지금 딱히 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 옛것이 여전히 옛것이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나름대로 볼만하다면 그런 볼만한 옛것들로 연극사가 채워지는 것 아닌가. 지금 새것도 어차피 옛것이지만 뒷전에 밀릴 운명 이것저것 새것을 뒤지는 것 보다 흐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옛것을 되살리는 것도 제법 쏠쏠한 작업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이들의 고백에서 참 바람직하고 좋은 고민과 노력의 결과를 엿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품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 공연을 위해 함께 힘을 쏟은 모든 관계된 이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와 연출, 작가, 디자이너, 감독, 지도 등 모두가 융합되어 같은 작품이 주는 호흡의 흐름을 타고 더불어 항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이중섭 화가의 작품 세계가 작가에 의해 그리고 공연자에 의해, 배우들 간의 연기적 호흡과 대사 속에서, 무대 위 그림에서 모두 잘 표현되어 있고 시대와 사회, 한 인간과 삶이 생명을 받아 자유롭고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의경 작가의 글을 통해 필자가 느끼는 공연의 ‘하나로의 융합’의 해답을 찾는다. “희곡이란 무대에서 완성된다. 희곡은 배우와 연출자, 그를 포함한 협력자들의 힘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어 탄생한다. 이 많은 이들의 ”일치된 순간“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일치된 순간“을 기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작가의 생가, 연출자의 생각, 배우들의 생각, 연극 제작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생각이 조화롭게 ”하나로“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적이 신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30분을 본 듯한 느낌의 공연은 초반부터 시작된다. 작품을 시작한다고 하여 아무런 끄는 힘이 없어 퍼져있는 그런 시작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객을 붙잡는 힘은 칭찬 받을 만하다. 작품의 기승단계라고 하여 절대 작품이 가지는 힘이나 배우들의 내적 에너지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들끼리 주고받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의 힘이다. 이것은 긴장감의 고조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장면마다의 인물마다의 순간적 비트의 올바른 당김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 작품 속 모든 이들의 노력과 열정과 에너지는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극장과 연출, 배우들과 공연관련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의 좋은 활동과 작품을 앞으로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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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미술관 큐레이터 오광수는 팜플렛의 글에서 “아이들과 동물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인간과 동물의 조화는 자연이란 커다란 범주 속에 동화되어감으로써 우주의 질서를 원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이중섭의 열망에서 빚어지고 있음을 엿본다”라고 언급한다. “<길 떠나는 가족>은 가족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장면을 묘출한 것이다. 앞에서 소를 모는 남정네도 고개를 젖힌 채 노래라도 부르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달구지에 탄 여인네와 두 아이는 꽃을 뿌리기도 하고 비둘기를 날리기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노래 부르고 있다. 단순한 나들이를 가는 장면이라기보다는 행복이 넘치는 이상향을 향해 가는 설정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따뜻한 남쪽 나라는 아마도 이중섭이 꿈에 그리는 이상향, 가족이 길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먼저 그들의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연상시킨다. 앞에서 소달구지를 이끌고 있는 남정네-실은 이중섭 자신-는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남정네는 가족들을 이끈다는 뿌듯한 감정에 젖어 있는 몸짓이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가족이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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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속이 채워지지 않은 채, 인물과 대사에 생명이 실려지지 않은 채, 소리로만 그럴싸하게 꾸며지는 연기에 익숙해져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안타까워 한 적이 참 많다. 관객들이 정확히 연기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평가하지는 못할 수 있으나 이미 그들의 수준은 배우들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공연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기성배우부터 신세대까지 대학로의 예술인 모두가 고민하고 연구하고 배움의 자세로 좀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얘기해 본다.
강양은교수가 배우이자 연기교육자여서 한마디하고자 한다.
‘길떠나는 가족’에서 먼저 거론할 문제점은 연기와 배우캐스팅이다. 왜? 요사이 뜨고 있는 지현준만 해도 발성이 힘들어 너무나 목에 핏대를 세운다. 그리고 대극장 부담감인지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니 ‘이중섭’이 날라갔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중섭이다. 그가 소리를 질러대니 ‘나쁜남지’처럼 보인다. 물론 정신착란을 일으킬 때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도 그에게 최소한의 품위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정신착란’으로 생을 마친 예술가는 숱하게 많다. 그래서 예술가의 정신착란과 ‘발광’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인물창조에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왜? 우리가 존경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의 자문도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대극장공연에서 유의할 점은 제작비때문인지 젊은 배우만으로 꾸며진다는 사실이다. 꼭 나이먹은 배우가 필요하다. 요사이 대학교수들이 많아져서 학교의 워크숍공연에 눈이 길들여져 이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이는 심대한 일이다. 설령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나이에 의한 균형이 대극장공에서는 유의할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품위유지가 안되는 대학의 워크숍공연이 될 뿐이다.
나는 우리 평론이 범하는 실수를 자기의 ‘관념’으로만 연극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예술가의 일대기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내용이 어느 정도는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자신들은 이중섭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임하지만 관객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 수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솔직히 관객들은 이중섭을 ‘미친놈’으로만 볼 수 있다, 아니면 그냥 ‘가십’으로만 대할 수 있다. 왜? 정보(내용)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중섭의 내면적 고민과 이게 시대의 상황과 어우러지는 고뇌와 파탄,그런 바탕이 없다. 그저 재주가 뛰어난 미술가라는 원초적인 ‘영웅화’가 미완성으로 다가올 뿐이다. 따라서 수준있는 관객과의 눈높이를 맞추는 비평이 필요하다. 공연을 ‘자기관념’에만 충실한 평론가들 보라고 만드는 게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