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세기
성유경
작: 유리동물원
연출: 한태숙
번역: 정명주
드라마터그: 강태경
공연일시: 2014/08/06~08/30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08/20 7.30
빛이다. 빛은 아름답다. 어둠은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가려주지만, 빛은 어둠 속에서 보이고 싶은 부분을 드러낸다. 영롱한 조명 역할로 매혹시키기도, 착시 효과를 일으켜 혼몽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빛은 위험하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1802년 영국에서 기원한 시각적인 환상을 표현하는 환등기. 판타스마고리아는 기술 미학이다. 강렬한 환등에 눈이 머는 감각적 방해를 통해 인간을 착각하게 만들고 현혹시킨다. 그리고 여러 예술이 상품 세상의 한 부분인 엔터테인먼트로서 판타스마고리아의 분야에 뛰어들었다. 영화, 광고,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등등. 영화 <킹콩>은 미국의 대공황이 한창일 때 대중들의 도피주의적 오락물이었다. (반면 리히펜슈탈의 선동영화에서는 히틀러에게 도취된 독일 대중들이 등장한다.) 산업문명이 안락함을 주는 꿈의 세계라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근대의 공장체계는 노동자들을 획일적인 작동에 틀 지워 그들의 상상력을 마비시켰다.
<유리동물원>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경험하는 대신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톰의 대사나 자신의 상상력을 가둬두는 획일적 노동에 참을 수 없어하며 끊임없이 시를 메모하는 톰의 행동은 1910년대에서 194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윙필드가 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무지개 빛과 몽롱한 음악을 쏟아내는―‘파라다이스 댄스홀’, 나날이 발전하고 다양해지는 가정용품(전기용품)을 소비하는 아만다의 모습, 변모하는 매체와 소비 대중사회의 기호들을 담은 대사들을 통해 대중주권ㆍ대량생산ㆍ대중문화로 일컬어지는 근대적 꿈의 세계란 상(허상)을 읽어낼 수 있다.(이상 수잔 벅 모스의 여러 논문 참조)
촛불, 횃불(짐에 대한 기사가 실린 잡지명)과 같은 물상은 화려한 스펙터클로, 번개처럼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통신으로 바뀐다. 순수하고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촛불과 달빛은 욕망의 환유적 빛에 가려진다. 따라서 현실을 망각한 듯한 윙필드가의 식구들이나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짐이나 환영의 허상 속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묶여지며, <유리동물원>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둔 테네시 윌리엄스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극이라 여겨진다. 한태숙 연출의 <유리동물원>에서 짐이 종종 쳐다보는 거울을 반짝반짝 빛나는 깨끗한 상태가 아닌 뿌옇고 흐린 상태로 처리했던데, 연출가가 짐을 이와 같은 관점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것 외에도 이번 공연은 디테일한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우선 의상이 돋보였다. 톰의 자유로운 영혼과 반항적인 성격을 드러낸 윗단추를 몇 개 푼 헐렁한 체크셔츠와 진팬츠, 이와 대조적으로 짐의 사회성과 격식이 몸에 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성장 차림, 아만다 전성기 때의 푸른빛을 노란 수선화와 매치시키면서 하늘하늘 아가씨 느낌을 전해준 부드러운 질감의 드레스, 로라의 소녀성과 순결함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잔잔한 꽃무늬에 푸른빛과 시각적 차별화를 둔 오렌지빛 드레스 등 의상이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톰과 짐의 성격을 신발까지(구두끈의 유무로) 고려해서 보여주거나, 아만다의 드레스를 무릎 선에서 자른 대신 로라의 드레스를 발목까지 길게 내린 점도 세심한 해석에서 나왔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로라와 짐의 본격적인 만남은 정전이 된 암흑 속에서 이뤄지는데, 아만다와 톰이 있는 부엌 공간을 차단시키는 하얀 빛의 커튼과 칙칙한 벽의 컬러, 위에서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첼리스트의 모습, 간유리 같은 조명의 느낌이 어우러지는 암흑 장면이 빛났다. 그리고 이미 <대학살의 신>에서 코믹센스를 보여준 연출가의 역능이 돋보였고, 대부분 관객들도 동의하겠지만 아만다가 톰의 머리를 매만지는 장면은 신선하고 개구지고 매력적이었다. 다만 첼로곡 선정은 아쉬웠다. 중하층 소시민 윙필드가 아파트와 어울리기엔 곡 선정이 고급스러웠고, 그렇다고 아만다의 남부 시절과 밀접한 것도 아니고, 작가의 지침대로 로라에게 초점을 맞춘 판단도 아닌 듯싶다. 로라와 딱 밀착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명동예술극장이 주는 아우라, 명동예술극장 관람객의 성향에 맞춰 음악을 클래시컬하게 깐 것 같다. <아워 타운> 역시 같은 극장이었지만 그때는 음악이 극에 잘 머문 감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뭔가 극보다 더 나아간 감상을 받았다. 물론 첼리스트의 연주는 일품이었다. 그러나 음악 활용이 극과 맞아떨어진 부분은 연주곡이 아닌 짐이 등장하면서 흥얼거린 아일랜드 민요였다 판단된다.
공연에서 힘주어 말하고픈 면은 배우의 연기와 연출가의 직감력이다. 아만다는 좋은 어머니면서 자식에게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주는 어머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생해주고픈 마음은 분명 있지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잔소리와 다혈질에 질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만다는 동정하게 되는 인물이며, 남부 전성기 때의 매력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김성녀 배우는 소녀와 처녀와 두 얼굴의 어머니와 안쓰러운 생과부와 유머와 생기와 화양연화의 추억과 정신력과 어둠의 잔등, 열거하기도 힘든 다양한 빛깔로 관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이 배우가 뿜어내는 매혹의 극치는 스크린에 떠오른 달을 가리키며 은빛 슬리퍼 같은 달이라고 외친 뒤 기뻐하는 장면. 이런 표현을 쓰기는 뭣하지만 아, 이렇게 귀여운 아만다라니! 원작에서 이 대사와 장면은 크게 돋아나지 않는다. 이 대사를 이런 느낌으로 살려내는 것에 감탄했다. 이렇게 도화가 강한 배우가 중심축에 있으면 연출가 입장에서 든든하고 열정이 샘솟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출가가 다른 그림을 만드는 데에 시간벌이를 도와준 셈이다. 그녀, 아만다가.
그림을 어떻게 맞추었냐 하면 그녀의 축이 워낙 탄탄하니 나머지 인물들 각자의 생을 정석적인 형상화보다는 참신하고 싱그럽게 뽑아내고자 한 것 같다. 이승주의 톰은 반항하는 청춘과 괴팍한 예술가적 성향으로 나아갔고, 이 배우의 금속성 톤이 강한 자극을 남긴다. 정운선의 로라는 여리고 여린 푸른 꽃송이 같다. 이 배우의 작고 여리고 가벼운 몸이 짐과 춤출 때 새처럼 공중을 날았다 떨어지는데 공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생각된다. 워낙 베이비 페이스라 톰과의 2인 구도에서 손위로 잡히는 감이 없는 듯도 했으나, 연출가가 그리고픈 로라는 오염되지 않은 피조물 같은 그런 느낌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심완준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것으로 아는데, 적격이었다. 중심축을 두고 꽃송이와 폭발물이 존재한다면, 이 배우는 태양이다. 다른 인물들에게 새 생명을 주러 온 것 같지만 홀로 타오르다 석양이 되어 사라진다. 그러니까 건강함과 열정을 품고 있는 이 배우의 외양과 음성이 무대를 빛나게 한 것이다. 연출가가 건강함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체중감량을 요구 안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톰 쪽을 조금 스키니하게 표현하려 해 (둘의) 높이보다는 부피적인 차이를 주지 않았나 가늠해 본다. 남배우들은 무용을 전공하거나 취미라도 삼은 것 같고, 동작의 선들이 보였다. 이번 공연은 빈틈없이 딱 떨어지는 정석보다는 신선함, 그림 만들기, 관극 후의 아련함, 유머코드, 첫사랑 이런 관점들로 작업한 듯한데, 이것은 논리적 성향이기보단 흔히 말하는 ‘필’, 그러니까 연출가의 직감력으로 진행했다 해석된다. 여러모로 재밌는 관극체험이었고, 예쁘면서도 어딘지 가슴 아프게 하는 장면들이 좋았다는 점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