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두고 온 것과의 화해를 위한 ‘멈춤’: <오래된, 기억>
최하은
작/연출: 이지영
단체: 극단 코끼리만보, 혜화동1번지 5기동인
공연일시: 2014.8.8.~8.17.
공연장소: 혜화동1번지
관극일시: 2014.8.12.
오래된, 기억. 이 짧은 제목이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와중에도 한 번 턱 걸린다. 두 단어 사이에 태연자약 자리 잡은 쉼표 때문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무언가에 발목을 텁 붙들린 사람처럼 걸리고, 끊기고, 멈추고, 우두커니 길모퉁이에 서서 뒤를 돌아본다. 멀리, 이제는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흐려지고 만 시작점을 응시한다. 그러나 떠나온 길 위로는 어느 샌가 안개가, 거의 먹구름에 가깝게 검은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어쩌면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떠나왔다는 것은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다시 앞을 본다. 앞만 본다. 잊어진 데에는 잊어진 이유가 다 있는 것이라고 망각을 위안한다. 제목이 주는 느낌이 대강 이러하므로 이 극에서 중요한 것은 ‘오래된’ 것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삶의 분절 기점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이 수수하고 거대한 쉼표 한 점이 아닐까 감히 의심해 본다.
<오래된, 기억>은 한 여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해묵은 기억들을 주섬주섬 도로 주워 담는 과정을 그린 극이다. 취업 준비생인 동생과 함께 고향인 마산을 떠나 서울에서 살고 있던 여자는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레 하루 상경한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여자는 그 날 서울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가기로 약속한다. 이 일을 계기로 여자는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회상한다.
이때 여자가 피하고 있었던 기억의 활성화에 기폭제로 작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셋방 아래층에 혼자 사는 노인의 고독사이다. 여자는 우연히 노인의 죽음의 최초 목격자가 되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노인의 시체가 썩어가며 풍기는 냄새가 이웃에 진동하게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결국 냄새로 인해 노인의 죽음이 발각되고, 그와 함께 여자는 자신이 17년 전 학생이었을 무렵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와 관련된 끔찍한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17년 전 여자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아버지가 멀리 길가에서 젊은 남자들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일이 있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 패닉 상태에 빠진 여자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구하고자 행동하지 못한다. 여자는 폭행당하는 아버지를 못 본 척 한다. 마치 17년 후의 여자가 노인의 시체를 보지 못한 척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의 시체가 수습된 후 여자는 서울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가고, 그곳에서 17년 전의 폭행으로 인해 다리를 저는 나이든 아버지와 재회한다.
비록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시간 순으로 플롯을 설명했지만 사실 이 극은 우리에게 친숙한 기승전결의 형태 혹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논리적인 서사 구조를 띠고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는 두서없이 뒤섞이고 사람들의 대화는 지극히 구어적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허공을 맴도는 느낌을 주었다. 여자의 엄마, 젊은 시절의 아빠, 남동생, 이웃사람, 죽은 노인 등 모든 여자의 주변인물을 단 한 명의 남자배우가 바쁘게 연기하는 것은 확실히 연극적인 볼거리였고 그 연기력이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간소화되고 시각적으로 상징화된 무대는 지나치게 단출한 탓에 관객의 상상력보다는 민망함을 더 자극했다. 아버지가 왜 폭행을 당해야만 했는지, 아버지가 마을의 청소년선도회장이 된 에피소드가 그렇게 비중 있게 그려졌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이야기의 허점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러한 모든 거칠음과 미숙함들이 마치 의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며, 극이 끝났을 무렵에는 이것이야말로 이 극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트라우마로 인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불행을 오랜 시간 동안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른 척을 일삼아온 여자가 17년의 세월이 지나 자신의 외면의 시작과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어떻게 그다지도 논리정연할 수 있었겠는가. 툭툭 끊기는 장면들의 비시계열적인 나열, 시언어와 구어의 무분별한 혼용, 그로테스크한 연기형식 등 극의 요소요소가 갖는 불친절함이 마치 여자의 불안 심리를 그려내기 위한 다분히 고의적인 연출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극을 시작하는 질문이었던 ‘여자의 아버지가 왜 서울에 혼자 당일 왕복으로 올라오기로 했는지’가 극중에서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여자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점철된 기억과 새로이 마주하는 어려운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왜 상경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극중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여자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다른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사뭇 따뜻하고 편안한 것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극의 제목을 읽어본다. 오래된, 기억. 쉼표는 그 한 번의 삐침 속에 많은 숨들을 내포하고 있다. 여자의 삶에서 쉼표는 이웃 노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목격하고도 모른 척 등을 돌려버린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쉼표는 여자의 발목을 잡고 멈추게 했다. 그럼으로써 과거에 또 한 번 자신이 외면했던 아버지의 불행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검은 안개의 장막이 드리운 꼬부랑길을 네 발로 기듯 어렵사리 헤쳐 모든 기억의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 길고 모진 화해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험난함을 드러내는 듯한 단절적이고 무기질적인 연출 기법. 세련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극이었고, 초반부의 헛도는 느낌을 제외하면 중후반부는 상당히 몰입해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도 강점이었다.
다만 이것은 상당히 호의적인 해석으로, 만일 극의 만듦새만을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분명히 깎아야 할 부분과 덧붙여야 할 부분이 존재했다. 이를 면밀히 다듬고 세심하게 재배치하지 않는 한 미묘하게 설익은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는 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공연의 기회가 있다면 이러한 부분이 보완되어 보다 이 극이 가진 인간 심리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추적과 따뜻한 포옹이 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작품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