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망한 웃음이 만연한 시대
– <만주전선> 리뷰-
장윤정
작품명: <만주전선>
작: 박근형
연출: 박근형
단체: 극단 골목길
공연일시: 2014년 8월 8일(금)~8월 31일(일) 월, 화, 목, 금 8시/ 토요일 4시, 7시/ 일요일 4시/ 수요일 쉼
공연장소: 소극장 시월
관극일시: 2014년 8월 24일(일) pm4:00
모든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정의된다. 수많은 왕의 시호가 사후에 정의되었듯이 일정시기가 마감되었을 때 과거사실을 기반으로 한 결과가 역사인 것이다. 현재의 판단은 미래에 맡긴다. 엄밀한 분석은 과거의 사실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세상사를 엄정히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분석과 표기의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렇기에 역사의 정확성은 항상 의심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역사적 줄기를 의심 없이 습득하고 숙지한다. 다수의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유추되는 결과의 집대성을 역사적 ‘사실’로서 인식한다. 그런데 사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다채롭게 존재했으리라. 그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현실이 첫 째로 안타깝고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이 없었던 과거 인물들에 또 한 번 안타까움을 느낀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날엔 영웅이 되어있는 아이러니한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만주전선>은 보여주었다.
· 어떤 조국을 위하여
<만주전선>은 만주국시대의 인물들에 대하여 풍자와 비판, 한편으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3명의 젊은 여자와 3명의 젊은 남자들은 나름의 지식인으로서 그들만의 이상과 포부가 존재했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일본적 성향을 지향했으나 된장 냄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뼛속만큼은 아직 조선인이었다. 이들의 내면에는 두 가지가 충돌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개발된 일본문명을 선망하는 정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충돌이다. 이들은 철저히 일본인스럽게 사고하고 생활하며 조선인들을 비하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부정한다. 곧 조선인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는 태도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된장을 부정하면서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완벽한 일본인 아기를 낳길 바라면서 과민하게 조선인을 부정하고, 주님 아래선 모두가 하나라면서 조선인들을 무지몽매한 존재로 구분하는 태도, 일본인의 냉철한 이성적인 태도에서 느끼게 되는 순간적인 이질감 등. 스스로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들은 더욱 일본인처럼 되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에 덧붙여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이들의 행위에 당위성과 명분을 만들어준다. 조국의 미래를 위한 과정이라 여기면 그 어떤 일본 편향적 태도도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들이 지향하는 조국이 어떤 조국인지 그것이 화두가 될 것이다.
이들은 버려두고 온 조선을 조국이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며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고 싶은 곳이 조선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의 조국은 만주국을 의미하리라 짐작된다. 다양한 문명과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쉽게 패망할 것을 짐작하지 못한 이 인물들의 행동은 당시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물러갔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역적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여기서 박근형식의 아이러니함이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친일파의 삶을 간악한 모리배의 삶으로 파악해왔다. 이에 대하여 박근형은 어떤 간악한 의도 없이도 역사적으로 간악하게 남을 수 있음을 제시했다. 조선인을 괴롭힐 목적도, 핍박받아서도 아닌 오로지 이상적인 미래를 위하여 선택했던 삶이 간악한 모리배의 삶으로 남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그 간악한 모리배가 이후 6.25 참전 용사가 되어 역설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더불어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이어지는 한국인 후손은 국가별 인종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명확하게 역사가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엉키고 뒤얽혀 복잡 미묘한 것이 역사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복잡다단하므로 당연한 의미일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박근형은 과거 우리네 역사를 다시 한 번 뒤집어 보여준 것이다.
· 전선인 만주의 무게
<만주전선>의 인물들은 진중한 동시에 가볍다. 각자 자신의 상황에 진지해질수록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과거의 문명과 사상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현대인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덕분에 관객은 예민한 화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웃음이 풍자의 웃음인지 진실로 인물에 동의하는 웃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때로는 과장된 모습으로 풍자임을 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어서 진지하게 상황을 엮어가는 인물들을 바라보다보면 이것이 대체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작가가 의도한 풍자로서의 태도는 자칫 왜곡된 역사의식으로 오해받을 위험마저 있다.
<만주전선> 안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선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정체성의 문제, 마냥 노력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점, 역사와 민족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등. 각 의미는 비등한 위치에 존재했고 작품에서는 이렇다 할 제시를 던져주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로지 사실의 나열과 서술만이 있을 뿐이다. 관객 개개인은 독립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작가의 한 마디를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관객은 각 인물들의 행보파악과 함께 갑작스런 결말을 맞는다.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아있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관객들은 해석의 문제를 떠안게 된다. 작가의 의도가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의 결말은 어리둥절함만을 남길 뿐이다. 본래 저변에 자리한 화두가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인 만큼 그저 웃음으로 시종일관 마무리되기엔 아쉽다. 가벼운 웃음 아래 묵직한 화두가 어느 정도 제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 시대가 가볍지 않았고 역사는 언제나 그 자체로 진중하기 때문이다. 만주전선에 존재했던 각 인물군의 다양한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성향을 넘어서 본질적인 인간 내면이 좀 더 드러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박근형 연출 특유의 극적인 상황과 매력적인 캐릭터는 언제나 흥미롭다. 다만 <청춘예찬>에서처럼 가볍게 표현 하면서도 큰 울림을 전달하던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진한 역사의 흔적
연출적인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박근형식으로 기지 넘쳤다. 특히 무대는 마치 카툰의 한 컷을 보는듯 했으며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녹아있었다. 또, 한 공간에서 적절한 조명과 소품으로 다양한 시공간적, 심리적 연출이 표현되었다. 다만 큰 벼락소리는 제 역할을 다 해주지 못하고 있었음에 아쉽다. 폭우와 벼락의 상징적 의미는 이해되지만 극 속에서 효과적인 장치가 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엄청난 벼락 소리는 마치 이후의 갈등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상황 변화에 따라 다시 급작스레 맑아지면서 그저 단순히 갈등 고조를 위한 수단으로 그치는데 이에 아쉬움이 있다.
배우들은 극단 골목길 배우들답게 다들 능청스러움의 대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나오미역의 강지은과 게이코역의 이봉련은 누구보다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려내었다. 요시에역의 정세라와 아스카역의 김은우는 무게 중심의 중추역할을 해야 했기에 능청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캐릭터의 매력이 덜 드러나 보이겠지만 역할의 특성에 따라 이유 있는 연기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마치 전래동화나 우화를 보는 듯한 과정이기에 조금은 여유가 묻어나는 모습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기무라는 가장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극 전반과 마지막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급작스럽게 일본인 병원 원장의 데릴사위로 가버리는 인물이기에 이 인물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한편으론 계산적이기까지 한지 짐작할 수 있다. 매우 입체적인 캐릭터인데 이 매력이 마지막 한 장면으로 모두 드러나 버린다. 아마 배우 권혁은 이 한 장면으로 기무라의 모든 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장면에서 기무라라는 인물의 본 면모가 드러나야 한다. 아쉽게도 아직은 전반적으로 기무라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오미의 말을 통하여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런 그가 어떠한 생각으로 나오미를 떠나버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관객은 거기까지 알 필요도 없다. 일본인의 냉철한 이성을 지향하며 이상을 펼치러 떠나는 기무라의 본심이 드러난 대목이라 짐작도 가능하다. 다만 한 인물로서 변모된 모습이 조금은 명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그저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만일 이를 의도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는 의문스럽다. 역설의 효과를 기대했다면 아직 아쉬운 느낌이 들기에 좀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네다역의 김동원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할아버지인 가네다와 손자의 역할을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역할 구분이 능수능란해야 한다. 가네다로서 극을 진행하다 연이어서 손자의 역할로 넘어오기 때문에 자칫 리듬을 놓치게 되면 이 인물도 저 인물도 아니게 되고 만다. 그 순간 작품 전반의 분위기가 허물어지므로 연기에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역할일 것이다. 아쉬운 것은 가네다나 손자나 가네다 한 명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칫 가네다도 아닌 김동원으로 보일 위험마저 만든다. 가네다와 손자의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보다는 과거와 현실을 오가는 과정에 있어 그 분위기가 약간 더 달랐으면 한다. 단순히 조명에 구분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배우의 연기가 좀 더 힘이 있을 때 관객은 순식간에 서로 다른 현상에 빠져들고 그에 따라 극은 더 극적으로 진행된다. 이 점을 유의하여 더 발전된 변화를 기대해본다.
<만주전선>의 만주 일대는 어느새 잊혀진 과거가 되었었다. 역사는 묻혔고 인물들은 사라졌다. 이를 다시 파내어 썩은 뼈마디 하나하나 훑어보는 작품이 <만주전선>이다. 썩은 뼈마디 들고서 감히 파안대소를 늘어놓지만 그것이 마냥 대소가 아님을 우리는 짐작해야 한다. 썩은 곳곳이 어떤 맛을 하고 있는지 더 진하게 핥아보기를 권유해보고 싶다. <만주전선>으로 돌아온 황망했던 그 시대가 아직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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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아, “만주국 조선인 고등 관료의 후예” (제 47호 수록) http://3.39.255.51/?p=2116
오세곤, “박근형 작, 연출의 <만주전선>” (제 47호 수록) http://3.39.255.51/?p=2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