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지원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우 상전(연극배우)
지금 전국연극제가 가칭 ‘대한민국연극제’를 꿈꾸고 있다. <한국연극>8월호가 이를 특집 좌담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좌담을 시도한 한국연극협회에 먼저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 해도, 이런 좌담을 성사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면 (사무국) 별도 조직을 구성해야 하는데, 별로 할 일이 없는 협회로서는 이런 ‘의견을 제시토록’ 한 것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협회 산하를 벗어나서 독립기구로 두는 것은 저도 반대해요.” 협회 운영에 밝은 김병호 편집위원이자 극단 ‘즐거운 사람들’ 대표의 우려가 있는 것으로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서울연극협회보다 훨씬 앞서 간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 협회란 원래 사(私)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직해 ‘이익단체’의 성격을 갖는 곳인데 우리 협회의 명확한 미션은 무엇인가, 지원대행업체(?)인가?
2. 협회가 매년 시행하는 ‘연극제’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제는 대학로에 기존의 ‘극단체제’가 무명무실해지고, 소극장이 자그마치 200여개에 이르고, 매년 연극대학 졸업생을 3천여 명을 배출하는 시대에 아직도 ‘연극제’를 매년 반복하고 있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3. 이제는 연극제가 연극계의 ‘적폐’로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우선 연극제가 ‘심사’를 통해 ‘경선’으로 치러지는데 있다.
예술의 생명이 다양성인데. 아직도 심사를 해서 공연의 우열을 가리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심사의 공정성도 커다란 문제지만, 젊은이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한국연극이 (변화가 극심한 우리사회에서) 현장 경험 없는 평론가나 노령의 심사위원을 동원해 우열을 가리고 순위를 매기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지난 시절, 후진성을 면치 못하던 시대에 시행된 관행을 여태껏 지속하므로 해서, 이제는 연극계에 적폐를 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심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과연 ‘연극제’가 연극계의 질적 발전에 진실로 이바지(공헌)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를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5. 연극인들이 ‘연극제’를 지원금 통로로 이용하면서 되레 일반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거부하고 ‘시상’으로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원체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6. 과연 ‘연극제’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 페스티벌이 되어 ‘즐기는 축제’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없애야 하는 것인가?
7. 한국문화에서 현재 경쟁력을 갖고 있는 장르는 무엇인가?
* K-POP 과 싸이의 ‘강남스타일’
* 한류 드라마
* 관객 1500만을 동원하는 한국영화
* 연 400여 편이 제작되는 한국뮤지컬
이게 다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예술위원회 등의 ‘제작지원사업’으로 이루어진 것들인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라의 문화정책(육성발전)의 패러다임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세계는 금융위기를 잘 이겨낸 ‘몇 안 되는 나라’로 한국을 인정하면서 우리 문화에 무척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문화수입국’에서 벗어나 국제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한국 문화 현실에서 문체부가 세종시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나주에 파묻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금이야 표현의 자유가 없어 그렇지, 중국이 정치만 안정되면 경제력을 발판으로 썰물처럼 중국문화가 밀려들어 우리를 위협할 거라고 하는 경고가 발령되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정부가 나서서’ 문화융성을 부르짖고 있을 것인가?
동시에, 지원금을 받아서 여는 연극제라는 오래된 관행(?)으로 과연 한국연극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대중문화와 예술은 다르다고?
이런 논리에 다수의 사람들은 대중문화와 예술은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이어서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으로 중흥을 이루기가 더욱 힘이 드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좌담이 전국연극제의 ‘적폐’에 대한 분석을 내놓는 것은 좋으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게 사실이다.
먼저 ‘전국연극제’의 어려움을 통해 외부지원의 ‘한계’부터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사업은 관이 중심이 되고 집행 측이 수행하는 단순구조인데 반하여 ‘전국연극제’는 다단계로 주최가 도(道) 단위고, 그 위에 실제적으로 문체부가 있어요. 또 시(市)까지 포함될 때는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즉 도나 시가 서로 자기주장을 한단 말예요. 다들 자기식의 운영이나 정산을 계속 요구한단 말이죠. 다구조여서 원활하게 조정이 안 돼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운영상의 문제점으로
“궁극적인 주최자는 한국연극협회인데. 협회구조가 3년 단위로 구성이 바뀌는 구조예요. 그리고 별도의 사무국도 안두고요. 그러면 일관성 있는 생각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인력이라도 배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가장 맹점이거든요. 노하우도 축적이 안 되고 무성한 말만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물론 이런 비효율성이 과연 ‘전국연극제’에만 국한된 사안일까? 더 주목할 것은 이런 비효율성이 한국연극제가 갖는 한계성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순박하게) 연극제가 ‘연극진흥’에 도움을 준다는 믿음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애초부터 이런 방식들의 지원에 의한 연극제로는 예술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차라리 이럴 바에는 ‘문화예술위원회’ 같은 지원기구를 포기하고 ‘예술인 복지재단’ 등을 통한 예술가 개개인의 복지개념으로 새롭게 전환하는 것은 어떨까?
그 대신에 국공립극장의 조직과 기구를 더욱 공고히 해서, 개인지원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극작가만이 아닌) 더 명확한 기회를, 더 좋은 활동공간을 제공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체계도 갖추지 못한 단체들에 ‘관행적’으로 지원을 퍼붓는 것은 속된 말로 ‘한강에 돌 던지기’가 아닌지? 또 그런 결과를 모두가 인식하고 있으면서 지원금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언제까지 ‘집단’을 위한 지원방식의 관행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예술가 개개인에게 생존을 유지해 주고, 그들이 자신들의 열정으로 예술적 성공과 성과를 내게 하는 게 훨씬 좋은 지원정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왜? 이제 와서는 예술에서 소중한 것은 집단보다는 예술가 개개인의 열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니 부조리와 불합리가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왜 가칭 ‘대한민국연극제’를 꿈꾸는가?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전국연극제가 왜 ‘대한민국연극제’를 꿈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더 나은 ‘지역연극’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가? 이런 질문과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이번만이 아닌) 매년 이에 대한 관심과 토론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데 있을 것이다.
좌담에 참석한 문화예술위원회 – 이 축제를 뒤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의 팀장은 입만 열면 걱정이다. 안쓰러울 정도다.
“이 사업이 문예위 주최사업이고, 우리가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도 많이 하고, 의견을 들어서 뭔가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나 고민이 많은 거죠.”
현재 경향(京鄕)에서 시행되고 있는 ‘연극제’가 과연 연극예술에 공헌하고 있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시대에 연극을 아직도 ‘천연기념물’(?)로 여겨, 보호, 육성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또 이런 점에서 문체부의 진흥정책이 시대에 적합한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미션이 과연 바람직한가?
차라리 이런데 돈을 쓰느니 ‘복지재단’으로 돌려, 실질적으로 예술가를 직접 도와 스스로 자생하게 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전국연극제’만 해도 해마다 지역을 번갈아 개최하므로 해서 운영에 어려움이 많은데, 그 기초 작업으로 ‘매뉴얼 북’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연극’이 만들어질 것인가?
연극제는 물론이고 한국연극이 좋아지려면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게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백화점이 성공하려면, 물론 종업원의 서비스도 좋아야 하지만, 결국 핵심은 ‘좋은 물건’을 내놓아 진열해 놓고 ‘고객의 관심을 끌어야’ 가능해지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연극제도 ‘운용의 묘’를 살리는 기획도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은 ‘좋은 연극’을 생산, 유치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지역이든 서울이든 연극계가 ‘좋은 연극’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동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지금껏 ‘전국연극제’를 꾸준히 지켜본 김기란 평론가는
“너무 놀란 건 ‘30년이 흘렀는데도 똑 같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예산규모를 듣고는 더 놀랐죠. 10억이 넘는 돈을, 그렇게 오랜 기간 한 문화 아이템에 대해 국가가 지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드라마 (구닥다리 리얼리즘을 지칭)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데요. 이런 것들이 지금 21세기의 다매체시대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전국연극제’가 어떤 대의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치밀하게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관행적으로 정작 중요한 공연 자체는 낡은 감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식이예요.”
이런데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일시에 달라질 수 있을까?
이번 군산에서 열렸던 ‘전국연극제’의 집행위원장인 조민철 지역연극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선생님이 10억이 많은 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3,4일 축제에도 몇 억이 들어가는데, 전국연극제는 ‘20일 축제’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건 다른 축제들이 비록 ‘몇 일하지 않아도’ 관람객이나 관광객 등을 유치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어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연극제’에도 그런 축제들처럼 사람이 몰리고 있나, 수지타산을 맞추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시,도에 기회를 제공하려고 축제기간만 늘리고 있어 외려 비효율성만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작은 규모의 도시로 갈수록 이 기회에 전국단위의 대회 혹은 축제, 연극제를 경험하면서 문화 인력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는 기대가 있어요.” 몇 년에 한번 ‘자기 차례’가 돌아올까 말까한 지역축제를 대비해 연극 인력을 양성하려고 투자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축제를 위해 대신 인력을 양성해 주고자 함인가?
김기란 교수는 묻는다.
“연극제를 어떻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지가 사실은 굉장히 궁금해요. 수준이 높거나 아니면 지역민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축제로 남고자 하는지. 서울에서도 공연되고 이런 걸 궁극적으로 원하는지?”
단적으로 연극제의 목적성이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역 활성화가 말이 좋지, 자칫하면 ‘지역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작품은 서울에서 올리면 100% 흥행이 어려워요. 이 대회 ‘하나를 위해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용감한 건지, 제약이 없는 건지. 뭔가 굉장히 느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연극제이지만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빠져있는 것 같은?”
지금 한국연극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은 서울과 지역이 동일할 것이다. ‘좋은 연극’이 너무 귀하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볼만한 게 너무나 적다는데 있다. 이게 더 시급한 선결과제가 아닐까?
지역연극인들의 ‘자신감’
지역연극인들이 ‘대한민국연극제’를 꿈꾸는 자신감을 갖게 된 ‘원인제공’은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서울연극이 너무나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기화로 ‘서울연극협회’와 서울연극인들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서울연극제와 비교해도 예산에서부터 차별이 심하다. 행사주최 지자체가 10억을 대고 문화예술위원회가 5억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내년 울산시 행사에서는 자그마치 24억이 투자된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대한민국’을 꿈꿀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할 것이다.
좌담에서도 “대한민국연극제를 하자라고 기치를 올렸을 때의 핵심은 ‘서울과 해볼만하다는 거였어요”라는 사회자의 말이 이를 명확히 알게 해주고 있다.
좌담을 관통하고 있는 전반적인 흐름은 지역연극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서울연극에 도전하고 싶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연극까지를 포함한 ‘대(大) 영역’을 구축하고 싶은 것이다.
또 평론가 이은경은
“전국연극제가 초창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연극제의 영향으로 지역축제가 만들어지고, 지역대학에 연극영화학과도 만들어지고, 순기능이 컸다는 것을 인정해요. 이번 군산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보다는 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지역연극인들이 ‘대한민국연극제’를 완성해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지역문화의 한축을 구축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
‘대한민국연극제’로 가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을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기고 있다고 좌담자들은 말하고 있다. 서울연극제에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한다.
1. ‘매뉴얼 북’을 통한 체계를 갖추는 것
2. 사무국 기구를 통한 행사의 전문성 확보
3. 심사위원에 관한 것
4. 세대교체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5. 서울연극의 참가여부
그리고 여기에 몇 가지를 더 첨부하면
1. 축제의 성격, 즉 기존의 경선제를 고수할 것인가, 페스티발로 전환할 것인가
2. 한국연극협회의 대승적 결단
3. 문체부와 문화예술위원회의 ‘전국연극제’에 대한 신뢰성
4. 지역을 바꾸어 행사를 개최하는 어려움
5. ‘지역이기주의’의 극복
6. 지역연극인들의 ‘연극제’에 대한 열정적 참여
7. 지역연극의 질적인 한계극복
8. 전문 인력의 양성
9. 지역연극의 저변확대와 활성화로의 연계
10. 기득권을 버리고 변화와 개방을 시도할 수 있는가
부끄러운 서울연극인들
이번 <한국연극>8월호에 두 개의 좌담이 실려 있다. 하나는 앞에 거론한 ‘대한민국연극제’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울연극협회 정책위원들이 펼치는 ‘한국연극배우를 위한 정책제안’이다.
우선 ‘대한민국연극제’에 관한 좌담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전국연극제’를 관심 있게 지켜본 평론가 두 사람과 서울연극인인 김병호 대표. 지역연극인으로 조민철(이번 전국연극제 집행위원장) 그리고 주최자인 문예위의 담당팀장, 정말 짜임새 있는 구성이다.
그에 비하여 서울연극인들의 좌담을 보라! 비교를 하기에 너무 부끄러울 정도다. 협회의 정책위원이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중구난방’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서울연극인들이 왜 이렇게 엉성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과학적(?) 자료’를 증거로 다음 호에서 한번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경선’을 고수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대한민국연극제로 변화를 꾀한다고 했을 때 경선제로 갈 것인지. 아니면 페스티발로 전환할 것인지 대한 논의를 해봐야 할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은 무르익지 않았으나 문제는 변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명칭도 (대한민국 연극제) 예전에 썼던 것이어서 마음에 안 들어요.”
또 지역연극인은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어느 계기가 딱 왔을 때 그걸 놓치면 안 돼요.”
내년에 예산이 풍족한 울산축제를 중요한 모티브로 여기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연극제의 ‘독특한’(?) 경선시스템
먼저 우리 모두가 (경향에 걸쳐) 주목해야 할 것은 연극제의 ‘독특한’ 경선방식이다. 이게 지난 시절에는 나름 발전의 동력을 제공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런 독특한 경선방식이 외려 (서울과 지방 공히) 연극제의 발전과 연극계에 전반적인 퇴행을 가져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먼저 지역연극인의 ‘전국연극제’에 대한 소회와 분석을 들어보기로 하자.
“자화자찬에 가까운 자료들만이 남아있을 뿐 실제로 그동안 ‘자기반성’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경선제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별스러운 경선제도로 인한 한계, 정확한 지적이다.
바로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연극제의 문제성이 여기에 있다. 애초부터 공연작품이 심사위원의 예심(대본심사)을 거쳐 본선에 오른다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이건 이미 어떤 규범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로, 정확히 말하면 ‘창작극을 육성’한다는 특별한 목표가 이미 설정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의 모든 연극제, 영화제. 뮤지컬 축제치고 ‘시상’이 없는 게 없지만, 이는 공연된 작품을 대상으로 (어느 시기와 장소를 골라) 축제를 열어 이를 시상하며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연극제는 미리부터 ‘예심’을 통해 어떤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본심사’를 거쳐 본선에 오르게 한 후 이를 지켜보고 시상하는 의도적인(?) 행사를 치른다는 것이다. 이때 창작극 육성발전을 운운하며 운영되고 있다는데 있다.
그로 인해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이에 따른 불합리와 부조리의 발생으로, 이제는 이게 ‘적폐’로 둔갑하게 된 게 사실이다. 우선 좌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심사제도’에 대한 병폐가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좌담에서 “50대, 60대 분들은 이런 식의 연극을 하면서 늙어오셨고 그걸로 남은 연극인생을 이어 가실 수 있지만, 문제는 20~30대라고 생각하거든요. 연극이 계속 새로운 감각을 충전하지 않으면 호응받기 어려운 시대가 분명히 오고 있고 이미 왔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평론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미리 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을 선정작으로 해서 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을 관람한 후에 이를 시상하는 별스런 운영이 결국 연극제를 연극의 발전은 물론이고 ‘축제’와도 거리가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1. 연극제의 참가가 창작극으로 제한할 경우에, 좋은 창작극이 양산되지 못하면 연극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맹점을 노출하고 만다는 것이다.
2. 이런 경우, 대본심사에서부터 작품의 수준이 심사위원들의 수준으로 고착되어, 이미 다양성을 갖기 힘들어 나중에 ‘축제’가 되기도 힘들다.
3. 거기다 심사와 시상이 공정성마저 갖지 못하면 한마디로 ‘안 하니만 못하게’ 될 뿐이다. 이게 ‘적폐’가 되고 있는 것이다.
4. 더구나 연극제가 ‘지원금의 통로’가 될 경우에 창조자의 안이함과 무능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5. 그렇다고 섣불리 ‘페스티발’로 전화하면 이미 ‘적폐’로 연극계의 기반이 허약해져 ‘시상’으로 경쟁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이미 경쟁력을 잃은 너무나 초라한 ‘페스티발’로 끝나버릴 공산이 커진다는 것이다.
지역연극인의 이런 한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초기에는 연극제를 통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상금도 적지 않았고요. 그런데 이제는 연극제에서 상을 받아도 그리 알아주지도 않아요. 효용성이나 가치가 이미 퇴색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구미를 당기거나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하는 존재 (전국연극제가)가 아닌 게 된 겁니다.
창작극 우선이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순기능이 많았는데. 지역작가를 배출하고 희곡상은 자신감 있게 활동하게 하는 매개였는데, 하지만 그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확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작가의 (지역)주소지 여부로 인해서 예상 밖의 작품에 상이 수여되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물론 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최고 역량의 작품이 아니라 제도를 위한 작품이 선택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죠. 이게 어쩌면 점진적인 발전을 꾀하는 데 오히려 ‘장애요소’로 작용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좋은 창작극이나 극작가 개인의 출중한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면, 즉 좋은 극작가의 탄생이 멈추면 이는 축제로서의 가치를 상실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전반의 육성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동력을 얻지 못하게 되는 맹점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서울연극제는 어떤가?
서울연극제만 하더라도 매년 이 때만 되면 (연례행사로) 자기의 희곡작품을 출품하는 극작가들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나만큼 작품을 쓰는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되는가! 내가 내면 무조건 뽑힌다. 나를 추종하는 심사위원들이 많으니 걱정 없다.”
이런 식이다.
그러니 단체는 그런 작품을 받아(?) 지원금 받아 공연해서 좋고, 작가는 확실하게 원고료 받아 좋고, 거기다 시상을 하게 되면 상금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보다 더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행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점이 없지 않다. 사실은 ‘연극적 상상력’이 빈곤한 현장인들이 – 배우는 연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또 연출가마저도 상상력 미비로, 오로지 연극공연을 극작가들의 창작극에 의존한 결과라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일지 모른다. 이런 ‘의존현상’은 아직까지도 진행형인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울연극제가 (애초에는 ‘대한민국연극제’)원인을 제공해 이런 결과가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현실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극작가를 통한 창작극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건지를 가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유치진, 차범석선생으로 이어진 연극제의 ‘극작가(창작극) 쏠림현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이제는 반추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게 이른바 근 40년을 이어온 연극제를 통한 한국연극의 ‘창작극 진흥정책’의 전부이자 병폐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뛰어난 극작가가 재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연극제는 어떤 방식을 취해서 진행해도 무용한 축제가 된 게 사실이다.
20세기 ‘100년 동안’ 세계연극은 연출가를 (‘공연작가’라 칭하며) 통해 연극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왔는데. 한국만 창작극 진흥을 명분으로 버티다가 ‘극작가 탄생’의 한계를 드러내, 오늘날 연극을 ‘시대의 부적응 예술’로 전락하고 만 게 경향(京鄕)에 걸쳐 숨길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연극제가 아닌 방식의 예술가 양성의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절실한 게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지원제도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즉 특정목적을 위한 진흥책이 아닌 좋은 예술가의 탄생을 위한 기반조성과 저변확대로 지원책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시간이 갈수록 경선제도의 결함이 드러나는데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이, 되레 이를 ‘관행’으로 여겨 이기주의와 무능, 안이함으로 지속한 잘못을 저지른 게 문제로 제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연극인은 이런 넋두리도 하고 있다.
“지금 전국연극제가 한계가 왔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거든요. 본질은 경선에 있다는 것이죠. 심사위원의 파워가 엄청나졌고, 심사위원의 기호에 따라서 그 대회 자체의 성격이 바뀌어버리기도 해요.
(구닥다리)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게 된 것도 어르신만을 심사위원으로 모신 연극협회의 잘못이 있어요. 그분들은 아예 실험을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고요.
오히려 연극실험은 연극제하고 무관하게 개인 작업을 해요. 사실은 ‘대한민국연극제’라는 이름은 이전에 썼던 이름이라 마음에 안 들어요.”
명칭만 들어도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서울연극인들도 그의 ‘방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 현재의 서울연극제의 현실이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칭 ‘대한민국연극제’가 되면 이런 병폐가 사라질까?
이런 현실에서, 그럼 연극제를 축제형식에 주안점을 두어 -페스티발 식 운영으로 바꾼다 해서 개선과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기구만을 확장한다고 해서, 또 시스템을 바꾼다고 해서, 지원금만 퍼붓는다고 해서, 또 지역의 연극제작의 제반여건의 개선 없이, 오랫동안 쌓여온 적폐를 해소하고 새롭게 변신을 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경선제도가 병폐라면, ‘페스티발’로 치루면 이런 것들이 해소될 수 있을까? 그럼 지역축제로 자리 잡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하나의 사례로 들어보자.
부산국제영화제는 지역축제로 최고의 명성을 얻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산이 한국영화의 메카가 된 것일까?
지금 영화판의 스타는, 특히 남자배우는 부산, 경남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송강호, 김윤석, 황정민을 위시해서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들이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가? 모두가 다 ‘영화사’가 있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니까 부산은 축제만 있지, 영화사 하나 없는 곳이라는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뮤지컬 축제를 대구에서 하고 있다. 그러면 대구에서 한국에 내놓을 튼실한 뮤지컬 공연을 만들고 있는가?
이를 통해서 우선 축제와 지역문화(연극)발전의 연계라는 명제를 깊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모이는 곳에 ‘문화’도 예술가도 동시에 생존이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술도 생존을 바탕으로 해서, 동물로 치면 ‘먹이사슬’이 형성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산은 고작 서울팀이 촬영을 오면 길 내주고, 건물만 빌려 줄뿐이지, 부산에 남아 있는 ‘영화자산’은 아무 것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받으면 배역에 오로지 경상도 사투리만 넘쳐날 뿐이다.
이건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깐느, 베를린, 베니스영화제가 유명한데, 프랑스, 독일, 이태리에 ‘영화’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따라서 지역문화축제라는 것도 그저 지역에 관광객을 모으는 ‘문화관광사업’에 지나지 않을 뿐, 지역의 문화(예술)발전과는 무관한 것이 현실이다.
축제가 지역발전과 연계되려면?
이명박 정부에서 실패한 사업하면 많은 사람들이 ‘4대강사업’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국음식세계화’라는 문화 사업이다. 이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런던에서 한국음식에 반한 영국요리사가 자기 돈으로 마련한 ‘한국음식축제’에 모두가 감탄하고 돌아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문화를 인위적으로 육성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외국인들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문화의 융성은 인위적으로, 그저 돈을 쳐 들인다고 되는 사업이 아닌, 예술가의 ‘자생적’ 열정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게 지역의 연극발전으로 연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에 거주하는 연극인들의 자발적인 열정이 없이 그저 외부의 지원금으로 화려한 축제를 개최해서는 그저 지역의 ‘문화관광사업’이 될 뿐이다.
‘지역연극’이 갖는 한계
그럼 지역에서 왜 연극을 ‘육성발전’시키기 힘든 것일까? 우선 지역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지역연극’이 자국의 ‘연극예술’을 대표하는 나라가 있는가! 연극이 번창하고 있는 런던, 뉴욕, 도쿄, 베를린, 파리, 모스크바, 이게 다 그 나라의 ‘지방도시’들인가?
원로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야, 말이 좋아 미국유학이지, 그나마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극 한편 보기도 힘들어!”
작가 조정래선생은 ‘전라도’에 살아도 소설을 쓰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왜? 혼자서 소설을 써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다르다. ‘종합예술’이어서 여러 분야의 인재가 모여야 연극공연이 가능해진다. 거기다 공연을 봐줄 ‘많은 인구’가 그 도시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영화는 지방과 서울이 동시에 상영이 가능해 이런 불합리(?)가 존재할 수 없지만 연극은 다르다. 연극은 극장에서 직접 배우에 의해 ‘매일 밤’ 공연이 이루어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은 종사자가 지역에서 ‘북박이’로 살아야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연극을 관람할 많은 인구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런던이나 뉴욕처럼 수많은 관광객들이 극장의 객석을 채워주는 활력이 없으면 번영을 구가하기 힘들어진다.
9.11 테러로 뉴욕에 관광객이 줄어들자 가장 피해를 본 게 브로드웨이 공연장이라는 사실로도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가칭 ‘대한민국연극제’를 통해 지역연극인들이 나서서 성공적인 공연성과를 거두어 훌륭한 작품과 연출가, 배우를 배출했다고 하자.
그렇게 성공한 지역연극인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고 싶겠는가? ‘전국연극제’가 ‘서울연극제’와 겨뤄보고 싶듯이, 지역연극인이 서울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고 싶은 욕망을 일으킬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지역연극인에 의한 지역연극의 내실화는 어쩌면 꿈을 꾸는 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노무현정부는 ‘문화예술위원회’를 나주로 밀어내 버렸다. 나주에 문화단체가 몇 개나 있다고? 또 상주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또 어떻게 문화관광체육부를 세종시로 내려 보낼 수가 있는가? 거기서 이런 기관들이 활동할 게 무엇이 있다고?
이건 노무현정부의 (정책의) 대실패다. 이거야말로 지난 노정권이 지방과의 균형발전을 내세워 지방우대 정책을 내세운 결과다. 어쩌면 ‘서울’과 ‘강남’을 미워하는 ‘증오의 정치’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후유증은 영원히 심각성을 보일 것이다.
왜? 아예 ‘대못을 박은’ 격이 되어서다. 이게 각종 선거에서 지역의 표로 이어지기 되기 때문이다.
‘전국연극제’의 미래
이건 서울연극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처지는 다르지만, 창작극의 육성을 부르짖었던 연극제가 축제로서 공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때 되면 애한테 ‘젖 주듯이’ 연극제를 매년 개최해 지원금을 주어 창작극의 생산을 이어오게 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예술창조의 제반 여건의 형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한 게 패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무감각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여건을 개선하려는 연극인들의 노력이 부재한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연극제를 개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연극판의 제반 여건을 성숙시키는 기반조성에도 힘을 기울였어야 하는데, 이게 상호간에 연계 되지 않으니 점점 연극계가 피폐해져 결국 연극제가 ‘적폐’가 되는 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역의 여건 조성이나 관객들의 호응이 없이 ‘연극제’가 명칭을 바꾸고, 막대한 제작비를 퍼붓는다고 하루아침에 바람직한 연극제로 변신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한례로 한국축구가 세계에서 우뚝 서려면 ‘한국리그’가 활성화 되어야 한다. 건강한 젊은이들이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나서고, 이를 구경하려는 관중이 남미나 유럽처럼 몰려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못하니까 세계무대에 나가서 깨지기만 하면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려는 묘수만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외국인 감독마저 구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따라서 가칭 ‘대한민국연극제’는 연극축제인 아비뇽, 에딘버러 축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름한철 풍성하게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지역의 ‘경제활동’으로의 변신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런 축제를 통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영국)가 자국의 연극중흥을 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저 지역에서 문화를 파는 ‘관광형 사업’일 뿐이다. 또 한국 사람들이 이런 축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자체의 지원금만으로, 아니 스스로 자신들이 예산을 편성해 ‘지역에 의한 지역을 위한 지역인의 축제’가 되게 하는 게 정답이다. 일차적으로 지역문화인들이 그걸 통해서 수익을 얻고, 지역민들이 ‘고마워하는’ 축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선 지역에서 ‘연극의 발전’을 염두에 두지 말고 연극제를 ‘축제’로 성숙시키는 것이다. 다행이 이게 지역연극발전으로 성숙되면 좋고, 그렇지 못해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1년 동안’ 지역연극인들이 땀을 흘리는 것이다. 당장은 이를 ‘매뉴얼’로 만들어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 국민이 주시하는 ‘행복한 축제’가 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자체를 자극하는 것이다. 더 많은 투자가 가능하도록 말이다. 이게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또 ‘지역연극’의 불합리를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훌륭한 ‘지역축제’로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다. 서울의 재미있는 공연도 초청하고, 세계의 좋은 공연도 초대해 시민들을 즐겁게 하고 자신들도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건 서울연극제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평론가 김기란은 “21세기의 다매체시대에 부응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또 “지자체가 자체의 문화적 콘텐츠를 굉장히 갖고 싶어 하는 시대”라는 말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공연 자체는 낡은 감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식이예요. 아마 텍스트를 심사하고 텍스트를 그 지역의 대표극단이 만드는 시스템 때문에 어떤 밀도나 긴장감 없이 공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평이하고 올드한 이런 공연을 지역민이 원하는가” 이렇게 지역연극인에게 김기란은 묻고 있다.
따라서 출품작도 주소지를 따지지 않아야 한다. 타 지역사람의 것을 올려도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 외국의 번역극을 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개방과 변화가 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경쟁이 유발되지 않는 연극제에 연극인들의 열정이 사라지는 모순을 제거하는 게 발전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비뇽이나 에딘버러처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축제가 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게 ‘연극축제’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여전히 시상에 매달리고, 그리고 시상을 못하면 심사위원을 원망하며 좌절하는 ‘촌스러운’ 짓을 경향이 모두 버리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연극과 연극제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상 타려고 연극하나 즐기면 그만이지’ 이런 마인드를 연극인들이 갖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행여 ‘서울연극’과의 대결을 꿈꾸지 마라! 이런 것이야말로 부질없는 짓이다. 외려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분석하고 성찰해 연극제를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삼는 게 현명한 일이다.
평론가 이은경은 서울연극에 대한 도전을 좌담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함정에 빠진 거예요. 지금 서울연극제는 예전의 서울연극제가 아니거든요. 공공극장이 우수인력을 블랙홀처럼 끌어들이는 바람에 대학로가 ‘공동화 현상’에 빠진 거죠.
결국 서울연극제는 거기서 소외된 극단들과 차세대 극단들의 리그가 되어버렸어요. 더구나 심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면서 선정작에 대한 뒷말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그 작품들은 서울연극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죠.
서울연극제와 전국연극제의 참가작의 격차는 거의 없지만 진짜 베스트 작품들하고는 차이가 커요. 전국연극제가 (구닥다리) 리얼리즘에 머물러 다양한 형식 실험이 부재하다는 것도 문제죠.”
이런 이야기는 비록 지역연극인들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연극인들도 지원금 받아 공연하고, 시상으로 ‘상금과 영예’를 노리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보아주고 관심을 갖는 관객이 없이 자기들끼리 돌려가면서 관람하는 연극제를 지속하는 것에 깊은 회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서울의 수많은 연극인들은 너무나 지원에 ‘굶주려’있다. 가칭 ‘대한민국연극제’가 엄청난 재원을 확보하고 경선제를 도입해 상금을 내걸어 서울연극과 경쟁을 유도하면 서울단체들은 아마 ‘죽기 살기’로 덤빌 것이다.
‘부산국제연극제’에서 일등하면 여름에 ‘아비뇽축제’에 갈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도 지금 서울연극인들은 개런티 한 푼 받지 않고 온몸을 던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연극의 변신
박근혜 대통령이 매달 ‘문화의 날’에 공연을 관람한다고 연극계가 달라질 수 없다.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제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 있다. 따라서 이제는 정부의 관심만으로는 뜻을 이루기 힘들다. 이제는 그렇게 해서 문화가 융성하게 될 대한민국이 아니다.
문화예술의 ‘글로벌화’가 무엇인가? 세계의 좋은 문화와 예술이나 단체가 한국처럼 돈만 많은 나라를 ‘봉’으로 여기고 달려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도 철저히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는 장르가 있다. 발레. 오페라. 현대무용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갤럭시’를 내다 팔듯이, 그들이 ‘문화수출’을 꿈꾸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돈 많은 부자들에게는 ‘세계문화예술투어’를 즐기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펼쳐지는 각종 축제에 직접 비행기를 타고가 각국이 생산한 ‘브랜드 공연’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이걸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문체부도 이제는 한국문화나 예술을 외국에 알려 한국의 국가 위상을 높이고, 자국 상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며, 외국인들이 한국문화의 향취를 찾아 관광을 오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지, 괜히 인위적으로 자국의 문화와 예술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서면 자칫 예술가들만 타락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연극제’를 하든 ‘세계연극제’를 하든, 예술가 개개인의 열정에 의지하지 않으면 자국의 연극발전은 힘이 드는 구조로 되어있다.
역량이 되면 정부나 문예위가 거액의 지원금을 쏟아 붓도록 요구하지 말고, 자신들이 스스로 지자체의 관심과 후원으로 각 협회가 나서 지역 연극을 축제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자신들 스스로 도모해 보아라!
얼마 전에 아스테지 여름축제에 참가한 스페인 연극인도 이제는 뮤지컬의 등쌀에 자기나라 축제에 연극으로는 참가하기도 힘들어 점점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 축제에 계속 참가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건 세계적 현상으로 묵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같은 지원을 위한 기구는 이제 문을 닫아도 좋을 것이다. 차라리 예술인을 위한 개인 복지를 위해 만든 ‘복지재단’으로 업무를 이관해야 하는 게 그나마 미래를 위한 변신이 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이제는 정부도 지원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거듭 주장하지만 나라의 경제규모가 후진적일 때는 ‘지원’이 약효를 발휘하지만, 이제는 혁신 없이 매너리즘에 빠진 지원책으로는 예술가들에게 나태와 무능의 부작용을 일으키게만 할 뿐이다.
왜? 경제의 영향력과 파워가 너무 막강해져서 그렇다. 나라의 정치도 경제를 이겨내지 못하는 게 현실인데 말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근대산업사회가 진행되면서 예술의 창조도 유형을 달리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는 예술인 복지재단에 총력을 기울여 보자! 우리도 이제는 ‘인간’에게 과감히 투자를 해보자! 이런 점에서 ‘복지가 대세’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문체부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
“지원 사업들이 서울보다 지역이 훨씬 좋아요. 지역은 인원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따라서 지원을 받을 기회가 (지역이)훨씬 많다는 게예요. 위원회에서는 지역별로 기금을 별도로 할당을 하잖아요. 서울단체가 지원받기가 더 힘든 거죠.”
좌담에서 문예위 팀장이 한 말이다.
지방은 단체는 적은데, 지원 사업 배당금이 많으니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더 좋다는 말이다.
지역연극인은
“제가 사는 전주만 해도 수없이 많은 축제나 행사들이 있어요. 한 달에 도대체 몇 건인지 몰라요. 그래서 서울의 경우, 연극 유사 장르에서 ‘알바’를 하는 비율이 매우 낮지만 지역에서는 연극인의 90% 이상이 유사작업을 해요. 축제. 행사 등에서 연출 등에서 스태프 일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거기 뭐라도 마음먹고 못 걸치는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연극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고도 남아요. 그러면서 지역의 맹주로 군림까지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뭐가 아쉬워서 ‘전국연극제’에 목숨 걸고 하겠습니까?”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서울 정부예산에 속해 있는 것들은 서울에서만 경쟁하지 않고 지역에서도 가끔씩 끼어들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서울에서 지역으로 내려가면 서울 팀은 배제되죠.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느냐면서.”
이건 자신들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해서 하는 넋두리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연극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다 지방우대정책의 후유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경제의 흐름’이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 간다는 사실이다.
“작년에 협회에서 여론조사까지 하면서 ‘대한민국연극제’로의 필요성에 대해 세미나 발제를 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몇 명 참석하지도 않았지만 참석 연극인들도 여론조사에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죠.”
그러면서도
“어쨌든 협회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논의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예요. 솔직히 명칭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는 것이 우선 돼야죠.”
김기란 평론가은
“전국연극제가 그렇게 해서 지역의 연극인을 기르고 지역의 연극에 대한 시너지를 내는 데 어떤 일정한 역할이나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계속 되묻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예산활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평론가 이은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연극협회도 고민이 많겠지만, 준비 없이 이름만 바꾸고 예산만 늘리겠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에요.”
아스테지 이사장을 하면서 해외공연을 접해 본 김병호 대표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공예산으로 이렇게 지원해주는 나라가 없어요.”
그러면서 ‘쓴소리’도 덧붙이고 있다.
“매년 ‘전국연극제’를 개최하면서 이런 논의가 계속되었어요. 지회장이나 지부장처럼 직접 당사자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지역)연극인이라면 적어도 전국연극제에 와서 한 작품 정도는 보고, 출품하는 당사자들은 전 작품을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진정한 ‘대한민국연극제’로의 전환이지요. 예술가들의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를 본질적으로 생각해봐야 해요. 그래서 정말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이건 말짱 도루묵입니다.”
우선 인재난에 대한 극복이 과제
지역연극의 활성화에서 인재양성의 어려움이 갖는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를 극복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게 현실이다.
문예위 팀장은 먼저 전국연극제의 심사위원 선정의 어려움에 대해서 “심사위원의 경우 하루 왕복이동 거리가 안 되는 지역으로 내려 갈수록 다양한 분들의 참여가 어려워지죠. 한 지역에 20일 동안, 혹은 그 이상 머물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보니까 시간상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 참여하실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완을 할까 고민하고 있죠.”
20여일 머물 사람을 찾기도 힘든 게 현실인데. 지방에서 줄곧 생활을 할 ‘연극인재’를 찾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지역연극인은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준비과정부터 시작해서 설제 운영인력을 연극계 외에서 들여온다고 했을 때의 여러 가지 여파들이 있습니다. 완전한 전문가는 아니어도 능력 있는 연극인을 추려서 쓰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에요. 전문가들을 써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면 훨씬 더 잘 돌아갔을 거예요.
아마도, 사실은 작은 규모의 도시로 갈수록 이 기회에 전국단위의 대회 혹은 축제. 연극제를 경험하면서 문화 인력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는 기대가 있어요.”
인력난과 인재난에 대한 지역연극의 고민이 숨어있다. 문체부나 문예위도 문화와 예술을 인재양성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지원금과 정책으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협회라는 인적 풀 말고 좀 더 넓혀서 보면 인적교류를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좌담에 보니 대극장 공연을 기피한다고 하는데. 나도 나에게 나의 전문분야 (화술이나 아이디어)를 원하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450석이나 600석 정도의 중극장까지는 가능하지만 (이 정도는 서울에서도 걱정거리인 건 마찬가지다) 1000석이 넘는 대극장은 엄청 부담이 되거든요. 참여 극단도 대부분 소극장 작품으로 제작하기를 원하고요.” 하지만 이것도 발성훈련과 아이디어만 좋으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
솔직히 ‘중극장 발성’은 서울연극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난제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론
어쩌면 연극인들이 예술에 대한 의욕을 버리면 새로운 세상(?)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버리면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너진다고 여기는 ‘세뇌’가 너무 뿌리 깊게 박혀서 그렇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기 최면에 걸린 ‘자존심’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점점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서울도 그런데, 지역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건 세계적인 현상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원보다 우선하는 게 연극인 개개인들의 열정이다. 지원금도 아니고 ‘시상’도 아니다. 그래서 지원책도 개개인의 재능과 열정에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극이 좋은 인재들에게 연극에 몸을 담겠다고 달려들게 하는 매력을 유지하는 것일 거다. 그게 저변의 확대고, 이게 전문 인력의 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