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한국 연극계의 직업군을 엄격하게 분류하면 딱 2종류다. 하나는 수적으로 우세한 ‘배우군(群)’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명예로운 ‘대학교수’집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연출가나 극작가라고 해야 몇 되지도 않지만 거의 대다수가 대학교수를 겸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교수들이 모여 ‘한국연극배우를 위한 정책제안’이라는 이름으로 협회 정책위원의 자격으로 이야기판을 벌렸다. 그게 8월호 <한국연극>에 실려 있다.
먼저 사회자는 토론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대학로에 나오는 학생들이 현장연극인들에게 듣는 얘기가,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연기의 방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연기와 현장에서 가르치는 연기가 왜 다른지, 또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도 함께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극의 꽃’은 배우인데, 배우가 어떻게 양성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자가 (교수여서) 점잖게 이야기를 꺼내서 그렇지, 이를 압축하면 ‘연극대학의 무용론’이다. 현장에 나와서 써먹지도 못할 연기를 대학이 왜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현장연극인들의 질책이자 물음인 것이다.
사실 요새는 연기를 가르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아이돌’가수가 TV드라마를 장악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무용론’은 연극대학이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쳐 되레 ‘망치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표현일 것이다.
그 많은 연극대학과 연극대학의 역사가 자그마치 56년이 되는 나라에서, 또 현장에서 연극종사자의 태반이 배우(연기자)인 실정에서 현장의 배우들이 대학의 양성방법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하면, 한국에서 연극대학은 사실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좌담에서 또 다른 실례를 읽을 수 있는데, “배우로서의 첫 시작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준비하는 학생(입시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매년 반복됩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생들의 평가기준들이 가르치는 사설기관(학원이나 개인지도)의 교육과 어느 정도 매치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건 ‘작은 바람’이 아니라 중차대한 사안이다. 왜? 단적으로 연극은 고교과정에 없다. 따라서 입시학원(개인지도)으로 시작한다. 근데, 연극대학, 연극현장이 제각각 달리 연기를 가르치고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은퇴한 교수인 연출가 왈 “입시에서 5명이 심사를 하는데 점수가 각기 다 달라, 그것도 너무 편차가 커서, 입학 후에 보면 전혀 엉뚱한 친구들이 합격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입시 때 ‘신호’를 보내지. 쟤는 내가 뽑고 싶은 애라고.”
이런 실정이니 사설학원이 대학의 평가기준을 모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말이 좋아 평가기준이지, 아예 ‘기준’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한국연극교수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일이다. 연기를 아예 모르고 가르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학생들만 혼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중견배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대학 졸업 후 현장에 나와 2년 정도 지나면, 연기를 잘못 배운 것을 한탄하는 후배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리고 연극대학이 생긴 지 반세기를 넘기고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건 8월호의 토론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교수들이 이 토론에 대해서도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선 이런 이야기를 ‘정책토론회’로 가져가는 현실이 그렇다.
‘대학연기교육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교육적, 학문적 접근으로 토론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교수들은 아무런 현실인식이 없는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토론을 전개할 수 있는가?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어째서 연극대학이 생긴 지 56년이 되어도 이런 것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애초에 교육부의 입시제도에 문제점이 많았다. 그렇다 해도 이제는 적응이 가능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1968년)에 대학입학의 자격시험인 ‘학력고사’(수능고사의 전신)를 치루고 대학에 입학한 1기다. 그래서 당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연극교육은 대학입시가 전국일제고사(?)로 치러지는 ‘교육개혁’을 시발로 해서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로지 예체능계만 개별대학의 ‘실기’로 치러지면서 교수들에게 ‘평가기준’을 맡긴 게 불행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체능계에서 ‘입시부정’도 심심찮게 화제에 오르게 된 게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예능 중에서 오로지 연기만이 ‘조기교육’을 통해서 예능을 연마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니까 미술이나 음악, 무용처럼 조기에 기초기술을 연마하지 못하고, 겨우 대학에 와서 교육이 시작되는 게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능에 감당이 안 되는 교수들에게 – 아직도 연극대학의 많은 교수들은 연극을 ‘인문학’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 예능교육을 맡긴 게 반세기를 넘겨도 전혀 발전이 없는 이런 불상사를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중고교과정에서 기초교육을 시행했어야 하는데, 대학에 들어와서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예능교육을 맡긴 게 불행의 고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연극은 (학문적으로는) 이른바 문,사,철을 익혀야 하는 ‘인문교육’이고, (예능적으로는) ‘실기교육’인데,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연극대학이 이를 현명하고 조화롭게 결합시키지 못한 것이다. 또 우리의 ‘교수수준’이 이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의과대학의 예를 들어보면, 의대에서는 ‘책에서 배운 대로 환자를 치료하면 죽는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만큼 ‘임상의학’을 중요시하고 있다.
의학이 생명체인 ‘인간’을 치료하는 것이어서, 각자가 각기 다른 체질을 타고나, 교과서적 논리만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기간 기초교육을 실시하고 그런 후에 인턴이나 레지던트 같은 임상을 위한 ‘수련의 과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연극교육은 교과서는 물론이고 교재도 없고, 즉 이론도 없고 의학처럼 임상을 위한 과정도 부실한 난맥상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연극은 의학이 왜 교과서를 부정하면서도 이를 통한 기초교육을 시행하고 있는가를 이제라고 깊이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술’을 빙자해 이론화를 통한 기초교육을 너무나 외면하지 않았나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예술교육은 각자의 개성이 중요하다고만 했지, 그래서 이론화가 무용하다고만 말하지, 진정으로 ‘교육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모른 채 연극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런데도 지망생들은 구름처럼 몰려드니, 교수들이 ‘배부른 게으름뱅이’가 된 게 사실이다. 이제는 결과적으로 취업률로 폐과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학생들은 ‘대학생’이 된 것만도 감사해 하며 대학에 체계를 요구하지도 못한 채 지금껏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는 서울대 국문과의 경우를 보자. 이번 학기에 교양강좌로 ‘창작의 세계’를 개설했다고 한다. 수업은 철저히 ‘창작위주’로 진행되며, 스스로 ‘문학을 연구하는 곳이지 창작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교수진에도 당연히 동문인 시인과 소설가가 포진하고 있다. 시대의 요구가 인문학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창작이라는 ‘실용’으로 전환하는 것일 거다. “창작교육이 서울대보다 활성화된 연대와 고대가 시인, 소설가를 활발하게 배출한 점도 자극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출신의 권혁웅 시인은 “창작을 통해 글쓰기의 욕망이 어떻게 나오는지 이해하는 게 문학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이제는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지식의 반감기’라는 것을 교수들이 인식하지 못한데 있다. 즉 지식에도 ‘유효기간’이 존재함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인식하지 못한 게 불찰이다.
요사이 외국에서 이에 대한 저서가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물리학의 유효기간은 13.07년, 경제학은 9.38년, 수학은 9.17년, 심리학은 7.15년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경제학 책이 출간된 지 9년 반 정도 지나면 절반은 쓸모없는 지식이 되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에 가장 빠른 게 변화하는 게 IT관련 지식이며, 인터넷의 등장으로 퍼져나가는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교수들은 ‘연수’ 등에 참여해 철저히 업데이트하고, 그렇지 않은 지식에도 관심을 열어두고 주기적으로 체크하라고 이 책은 조언하고 있다.
그럼 ‘연기술’은 어떤가? 한국의 경우, 민주화가 이룩된 80년대 후반에서 90년 초반 사이에 기존의 ‘연기방식’은 유통기한을 마감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또 다시 유통기간이 마감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오로지 연극대학교수들만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65세까지) 기존의 방식을 여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식의 ‘유통기한’과 ‘유효기간’이 존재함을 이해하지 못해 여태껏 ‘무용론’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런 사태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몇몇의 연극교수들은 토론에서 이런 문제가 제시될 때 속으로 “이크!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벌써 알고 있어, 새삼스럽게! 해결방법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이야기는 또 꺼내는 거야. 누구는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알아”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문제점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기 위한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래!
그동안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 – 하루 3시간씩 10년을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이론’이 정설처럼 굳어 있었는데, 기사에 의하면 요즘 이 이론이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한다.
왜? 국제적 권위를 갖고 있는 ‘심리과학’이라는 학술지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 때문이다. 일간지가 이 학술지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아무리 노력해도 ‘선천적 재능’을 따라잡기 힘들다”고 해서 지금 세계적으로 화제 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잭 햄브릭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 연구팀의 ‘노력과 선천적 재능의 관계’를 조사한 이 논문이 – 물론 노력에 쏟은 시간의 중요도는 분야마다 차이가 나지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학술분야’다.
이 분야는 노력이 실력차이를 결정짓는 비율이 겨우 4%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학술분야는 ‘전수’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 성공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문은 ‘노력한다고 되는 분야가 아니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애당초 철저히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종사해야 하는 분야라는 것이다.
또 이 논문은 음악, 스포츠, 체스 등의 분야는 노력 시간의 비중이 20~ 25%였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음악은 재능 79%, 노력 21%, 스포츠는 재능 82%, 노력 18%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학문을 하려면 ‘끼’가 있어야 한데
연기에 ‘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문분야가 선천성이 없으면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이 학술(학문)분야야말로 ‘노력이 성공의 관건’이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도 ‘열심히’ 또는 ‘집중해서’ 또는 ‘오래 버티면’ 등의 노력을 권장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배우보다 더 많은 ‘끼’(?)를 타고나야 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스님이 좌선만 열심히 한다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이룰 ‘재능’- 영감이 작동할 수 있는 비밀(?)이 내면에 선천적으로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한국연극계에서도 그동안 ‘학술분야’는 연기나 연출과 달리 별 재능이 없어도 가능한 직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거나 ‘학위’만 따면 완성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툭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려고 나선 게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교수가 되었던 게 한국의 연극대학의 현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분야야말로 외려 예능분야보다 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것이다.
선천적 ‘끼’가 있어야 한데!
이는 ‘천재의 99%가 노력’이라는 에디슨의 말도 1%의 재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게 ‘학술분야’라고 신문은 떠들어대고 있다.
또 이 논문은 동시에 ‘나이’도 성공의 주요 요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이올린 등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구 등 운동을 할 때도 ‘조기교육’이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니 조기교육을 시행하는 다른 장르에 비해, ‘연기교육’의 경우는 좋은 배우를 발굴하기가 정말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내가 진즉부터 연극원에 ‘조기교육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게 틀린 말이 아님이 이번에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또 환경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할 때, 학습 진도도 빠르고 실력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집단토론’식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새로운 연구는 ‘노력을 위한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므로, 인간의 선천성의 발견이나 발굴을 노력보다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동안 연극대학에서 ‘학술부문’에 대한 선천성을 너무 소홀히 했거나, 아니면 전혀 타고난 재능이 없는 사람도 ‘학위’만 있으면 교수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연극대학의 현실
연극대학의 최고의 미션인 ‘연기교육’만 해도 대학에서 연기를 배워, (교수와 달리)학생들이 자기가 다닌 대학에 평생 종사하면서 연기자로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즉 사회의 현장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게 현장에서 적응이 불가능하다면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수는 자기 대학에서 배워 그곳에 평생 종사하므로 해서 실력이 없어도 절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연기는 다르다.
따라서 의대에서 익힌 ‘의술’로 밖에 나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할 수 없다면 의대를 다닐 필요가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해 배운 교육이 현장에 나와서 효험이 발휘되도록 애당초 교과과정을 잘 짜야 하는데, 전혀 학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관여하는 바람에 아직껏 체계를 갖추지 못해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와세다 대학처럼 ‘이론’만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으면서 ‘예능교육’을 실시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지금 연극대학이 ‘연기학교’를 운용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학생들의 ‘학벌’에 대한 욕구, 아니면 자기 대학의 교수인원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장에 공헌하는 바가 없는 게 사실이다.
대학교육이 부실하면 안 되는 이유
학술지의 논문에 의하면 대략 75~80%의 선천성을 제하면, 배우에게 20~25%의 노력이 있어야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배우들의 이러한 ‘노력’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건 당연히 (실질적으로)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20~25%의 ‘노력’의 대부분을 대학교육에서 찾아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반세기를 넘긴 시점에서도 “어떻게 배우를 양성해야 좋을지를 한번 이야기해보기로 하죠!”하는 말이 나올 수는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연극의 꽃’인 배우뿐만 아니라, ‘꽃을 키우는 재배자’가 가져야 하는 (배우보다 많은) ‘선천성=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극인들이 함부로 “그래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나 노려보자!”고 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재배자’로서의 재능- 학술적 재능을 타고 났는지를 먼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흔히 연극인들이 내뱉는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연극이야!”도 너무나 무책임하고 무식한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배우로 성공하기가 사법고시에 합격해 출세하기 보다는 더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법학대학이나 사법연수원보다 더 잘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바로 ‘연극대학’인 셈이다.
다음에 소개될 이야기는 ‘꽃의 재배자’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연극대학이 학문과 동시에 예능교육으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보여 여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특히 새롭게 출발하는 젊을 세대들에게, 특히 ‘꽃의 재배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 인재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이야기다.
‘경주마와 조련사’에 관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경주마를 사육하고 조련하는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잘나가는 ‘조교사’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말의 ‘관상’을 보고 명마를 ‘족집게’처럼 뽑아 경마를 성공시키는 마력을 가졌는데, 그는 자그마치 6년 동안 경주로 총상금만 250억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비법이 아주 특이하고 우리에게도 생각할 점이 많아 여기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특이한 게 최고의 상금을 타는 명마의 선발에서 그는 거의 ‘불구자’인 말을 아주 적은 금액으로 사서, 최고의 상금을 타는데 있다.
지금 최고의 상금을 받는 명마 ‘감동의 바다’의 경우, 그 말은 애당초 다리에 뼛조각이 박힌 게 X선 검사에 나타났다고 한다. 뼈에 금이 갔는데 다시 붙일 때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 인기 없는 ‘찌질이’ 말을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말이 “아래턱이 넓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며 귀가 쫑긋한 게 명마의 자질이 엿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3천만 원에 샀는데 그런 말이 지금까지 자그마치 그 액수의 50배의 상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가 2006년에 선발한 말도 ‘절름발이’였다고 한다. ‘루나’라는 이름을 가진 이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인대염’으로 뒷다리를 저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말이 (비록 다리는 절지만) “얼굴이 작고 눈이 초롱초롱했으며 심폐기능이 뛰어난 말의 특징인 넓은 어깨를 지니고 있어 다리가 불편하다는 결점을 충분히 커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왜 이런 말들을 선택하는 것일까? 일단 구입할 때 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찰액도 역대 최저인 97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데리고 와 다리를 수술하는 대신 훈련방법을 달리해, (이 대목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즉 ‘허리를 강하게 하는’ 훈련법으로 스피드를 올려 경주에 투입했다고 한다.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몸값의 78배인 총 7억 5천7백만 원의 상금을 받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며, 이런 사연은 차태현 주연의 영화 ‘챔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단다.
한마디로 그는 외부로 드러나는 생김새를 보고 말의 경주에서의 재능(잠재력)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의 경마능력에 관한 그의 잠재력에 대한 판단과 관찰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소개하면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얼굴은 이마가 넓고 아래 입 쪽이 좁아지는 역삼각형이 좋다. 귀가 쫑긋해야 기수의 명령을 빨리 알아듣는다. 똑똑한 말은 기수가 때리지 않고 채찍만 들어도 속도를 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경주마의 머리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부위다. 말은 달리는 동안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하면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와 몸의 조화가 중요한데, 목 길이가 얼굴의 2배쯤 되는 게 적당한 비율이란다.
또 목은 지방 없이 근육으로 이뤄져야 고삐를 죄었다 늦췄다 하는 긴장도를 예민하게 알아채고 반응한다. 호흡을 잘 할 수 있도록 콧구멍이 크고 아래턱뼈가 넓어야 한다. 그래서 성형수술을 할 때가 있다.
넓은 어깨는 폐활량이 크다는 상징이다. 어깨는 또 발굽이 땅을 디딜 때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깨가 땅과 45도 각도를 이루면 완충역할이 잘된다.”
그는 “경주마의 능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혈통’이지만 혈통이 좋은 말은 비싸다. 따라서 말의 ‘관상’을 활용해 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성과를 거두는 게 상수다.”고 말하고 있다.
신문기사는 좋은 말의 생김새를 직접 ‘사진’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예부터 말은 관상을 보는 걸 ‘상마(相馬)’라 해서 이를 아주 중요 기술로 여겼다고 덧붙이고 있다. 왜? 요즘처럼 혈통계보가 없을 때여서 관상(생김새와 신체조건)을 보고 말의 능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말에 명마를 직접 구하기보다 ‘명마를 감정하는 능력’을 가진 백락(伯樂)을 찾으라 했다고 한다. ‘백락’은 이런 능력을 가진 중국의 ‘신화적’ 인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마주(馬主)들은 그의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만 살피는 실정이라는데, 자그마치 상금의 78%가 마주 몫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명 조련사 ‘김영관’이 검정고시로 얻은 고졸 학력이 전부이며, 기수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50kg이하로 내려야 하는 체중조절을 못한, 기수로서는 ‘실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는 ‘말 사육’이 발달한 선진국인 독일 등에 유학을 해 ‘박사학위’를 따온 사람도 아니고, 서울연극제 등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경력도 없는 ‘별 볼일 없는 배우’에 지나지 않았던 미미한 경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또, 기자는 이를 ‘관상’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건 너무나 명확한 ‘과학’이다. 왜? 관상이란 원래가 비과학적인 ‘점술’이지만, 이 조교사의 경우에는 (내가 보기에) 엄연히 경마와 경주마의 본질을 꿰뚫는 ‘과학’이자 ‘훈련방법론’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연극계라면 이런 재능을 갖춘 사람이 등장하면, 먼저 어느 대학 출신인가. 또는 어디에서 유학을 한 사람인가를 우선 따질 것이다. 즉 ‘학벌’이나 ‘해외유학’ 경력을 먼저 떠올리는 게 우리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성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17년 동안 뚝섬과 과천경마장에서 말과 함께 자며 말의 습성을 익히며 조교사의 자격을 얻었다”고 말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저 ‘필드’에서 말과 생활하고 싸우면서 ‘경주마의 본성’과 ‘경주마의 잠재된 특성과 재능’을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들
여기서 우리는 의학처럼 ‘생명체’를 다루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영감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연기’를 논할 때, 스스로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오로지 ‘남을 통한’ 배움을 전부로 알고 이에만 매달려 왔던 게 사실이다.
의학만 해도 처음에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의학교육에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미국으로 암수술을 하러 가면, “너희 나라가 더 수준이 높아!”하면서 외려 한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그 뿐인가. 외국유학이 아닌 국내의 토종 피아니스트들이 국제콩쿠르에서 좋은 성과를 내자, 외국의 교육자들이 한국교육을 살피기 위해 방한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연극대학은 (반세기가 지나도) 여태껏 ‘외국유학’만 부르짖고 있는 것인가? 경주마의 조교사처럼 우리 자신의 영감으로 발전시켜보고자 하는 노력도 없는 게 현실이다. 애당초 대학에 있을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이 방면에 포진한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까 자그마치 연극대학이 생긴 게 언제인데, 우리는 아직도 ‘배움에 답’이 있다는 믿음만으로, 여전히 유학할 곳을 살피고,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배움보다는 ‘깨달음’이 더 중요해
이 글을 읽고, 우리의 대학교수들은 입시전형에서 ‘무엇을 보고’ 학생을 선발할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수들은 ‘관상’에라도 의존하고 있는 것일까?
입시에서 3분 동안에 배우로서의 기량을 판단해야 하는데, 이때 우리의 교수님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명배우의 자질을 판단할까?
또 우리 교수들은 명배우가 지녀야할 선천적 재능 (잠재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것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또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가?
명배우가 가져야 될 ‘신체적 조건’이나 ‘내면의 자질’을 (김조교사처럼) 정말 알고 있기나 한가? 또 그런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토론에서 “사설기관의 교육과 매치시켜 달라는” 건의를 ‘작은 바람’이라며 간청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속된 말로) ‘자기 꼴리는 대로’ 아무 근거도 없이 연기력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주임교수가 입시현장에서 ‘신호’를 보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김영관 조교사는 경주마의 본질을 파악하고 나름의 자신감을 갖고 외려 경매에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가격이 싼 ‘찌질이’ 말을 고른다는데, 우리 교수들은 그런 ‘혜안’이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전공’이 아니어서?
이런 물음에 연극대학교수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 전공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기가 전공이 아니고, 배우 경험이나 경력이 없다 해도, 우리 속담에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자기의 전공이 아니어도 일정한 세월이 흐르면 어느 정도 자기 분야에 나름 정통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안정된 수입과 위상을 제공해 주는 게 바로 자신들의 제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새로운 미션을 개발하려고 드는 게 본능일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훌륭한 저서나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해야 ‘기호학’을 흉내 내려고 내용파악도 안 되는 글을 쓰고 있는 형편이 현실이지 않은가?
연기교육에서의 편견
여기서 필히 주목할 게, 무대에서(필드에서) 좋은 연기를 펼쳐 본 경력이 없어도 비록 뛰어난 ‘선천성’만 가지고 있다면, 또 이를 발휘할 수만 있다면 좋은 연기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주마의 조교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기를 전공해야 좋은 연기교수가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보이스코치인 영국의 ‘시실리 베리’ 할머니도 전혀 무대에서 배우 활동을 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언어음성학’을 전공한 분이다.
이처럼 무대에서 꼭 배우의 경험이 있어야만 좋은 연기교수가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빨리 버려야 한다. 외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성악계는 외려 ‘천재형 성악가’가 교사로서 자격이 더 부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천재적인 성악가의 경우, “넌 왜 노래가 안 돼? 어째서 거기서 소리를 못 올려? 이해할 수가 없네!” “나처럼 해봐. 이게 왜 안 돼?”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어 좋은 교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 배우들의 경우에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대성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100% ‘끼’로 배우가 된 형편이어서 더욱 ‘연기교사’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단적으로 (체계가 없이 배움을 가졌으니) 본인들이 경주마 조교사처럼 자신들이 이를 타고난 선천성과 노력으로 깨치지 않은 이상, 그들이 터득한 ‘연기경험’은 연기교육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수들은 이 정도의 깨달음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를 다루어 좋은 연기교수가 되는 것은 ‘학벌’도, ‘학위’도, ‘연기상’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생전에 장민호 선생도 가끔 술자리에서 “모 대학에서 ‘출강’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거절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대학교수들이 자기 학교의 명예(?)를 높이려는 속셈으로 ‘원로배우’의 영입을 시도한 것일 거다. ‘학과’를 살린다는 속셈으로 앞에서 얼마나 아양을 떨었을까 짐작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리한 분이셔서) 본인이 가르칠 재능이 없음을 아신 것 같다. “한번 해 보세요” 하고 주위에서 권유에도 절대로 출강하지 않았다. 그 때마다 “내 연기하기도 바뻐”하면서 손사레를 쳤다.
제발 이 정도라도 (우리 배우들과 교수들이) 깨달음(성찰력)을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감’의 작동
김영관조교사가 대단한 것은, 그가 경주마의 결정적인 약점인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다른 경주마가 갖지 못한 장점을 살려내는 탁월한 ‘맞춤훈련’을 시도하는 재능을 보이는 것일 거다.
“그런 말을 헐값에 구입해 다리를 수술하는 대신 훈련방법을 달리해, 즉 ‘허리를 강하게 하는’ 훈련법으로 스피드를 올려 경주에 투입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얼굴이 작고 눈이 초롱초롱했으며 심폐기능이 뛰어난 말의 특징인 넓은 어깨를 지니고 있어 다리가 불편하다는 결점을 충분히 커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교수들도 자기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유용한 ‘맞춤형 훈련법’을 터득하고 있을까? 아니면 노력이라도 시도한 적이 있는가? 아무리 이론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실천할 ‘교육훈련’을 갖추지 못하면 ‘의술이 없어 치료가 불가능한 의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연극교육계에 절실한 게 바로 ‘찌질이’에 관한 관심일 것이다. 왜? 멀쩡하게 생긴 연기지망생들은 모두 ‘뮤지컬’이나 영상배우가 되겠다고 나서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대학교육이 우뚝 서려면 이런 ‘찌질이’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재능을 ‘명마’로 바꾸는 교수들의 재능일 것이다.
그래야 다시금 연극의 ‘권토중래’를 꿈꿀 수 있고, 연극대학이 제대로 된 미션을 수행해 현장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우리의 교수진으로 가능한 일일까?
왜 이론적 체계와 영감이 필요한가?
많은 연극인들은 우리 대학의 부실교육에 대해서 이런 논지의 말을 하기도 한다. 교수들이 ‘자존심이 강해 협동하지 않고’ 각자가 따로 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위험 때문에 연기학교의 개설에 신중을 기한다고 한다. 또 일단 만들어지면 상호 교류를 통해 교육적 기초와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연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협동심’보다도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연기의 본질에 대한 이해심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연기의 본질’이 발성과 공명에 있으며, 이는 배우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일차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모른 채, “내가 연기는 잘 안다”든지, “우리말을 못하는 배우는 짐싸!” 등을 남발하면서 아는 체를 하는 게 현실이다.
어떻게 ‘연극대사’가 우리말인가? 써놓은 대사가 ‘우리글’일 뿐이지, 그게 어떻게 우리말인가? 대사는 그저 작가가 우리글로 만들어놓은 ‘글말’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연기자들이 자기의 목소리로 소리 말(우리말)의 리듬(억양)을 빌어 (비슷하게라도) 입히는 작업이 화술(연기)인 것이다.
특히 무대배우가 ‘쪼’의 위험에 떨고 있는 것도, 우리말이 아닌 문어체의 글말에 소리 말(우리말)의 리듬을 붙여야 해서 항상 연극배우는 ‘쪼’라는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크게 발성을 해야 해서 (호흡의 난조로) 영상연기자들보다 더욱 ‘쪼’에 취약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극작가가 극심한 문어체를 선호하면 연기자들은 그런 글말에 구어체의 ‘소리 말 리듬’을 입히려고 엄청나게 고통을 받는 게 화술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보이스코치’를 두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우리말처럼 작가가 ‘짧고 편하게’ 대사를 써놓으면 어떤 배우가 우리말을 못할까? 그냥 목소리 내면 우리말이 되는데. 이래서 소리 말과 글말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이 정도의 상식도 일반화되지 못한 게 우리대학의 연기교육의 수준이다.
그럼 우리의 입시전형을 한번 보자. 우리는 어려운 문어체 대사로 이루어진 번역극 – (경력자도 힘들어 하는)셰익스피어 대사나 희랍비극 대사를 오로지 입시생의 재능에 ‘변별력’ 높인다는 명목으로 그 어려운 대사를 초보자인 입시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학원에서부터 ‘쪼’가 박혀 평생 고생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배우는 짐싸!”라고 무책임한 말만 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먼저 짐싸!”라고 외치고 싶다.
영국에서도 ‘줄여서’ 셰익스피어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독백’이라는 이름으로 전부다 읊으라고 초년생들에게 강요하지를 않나, 또 재학 중에 얼마나 셰익스피어 공연을 한다고, 그걸 요구해서 지망생의 연기 인생을 시작부터 망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족보에도 없는 ‘종합연기’를 하게 해서 애송이시절부터 애당초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지껄이게 하지를 않나! 그러니 사설기관이 대학을 향해 – 대단한 학위자들에게 ‘작은 바람’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사람이나 말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잘 다루려면 의학처럼 의술=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터득해야 한다.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니, 연극대학교수들이 일단 ‘전문가’로서의 타고난 자질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56년의 세월이 흘러도 ‘연극대학의 무용론’이 연극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연극인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성악계의 노력
서울음대 성악과 ‘교수임용사태’ 때문인지, 또 애국가의 ‘조옮김’ 때문인지, 신문이 음악계 소식을 자주 다루고 있다. 서울음대 교수임용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전성기의 테너가 결국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닌가?” 이런 도전적인 질문도 던지고 있다.
이런 기사도 볼 수 있다. “힘 있는 소리는 근육에서 나오기 때문에 지방이 늘어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지금 성악계는 ‘발성과 근육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직도 논란을 벌리고 있다.
아마 발성이 어떻고, 호흡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지껄이는 곳은 성악(가창)과 연극(연기)뿐일 것이다. 오로지 여기서만 ‘발성과 호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너는 발성이 안 되는구나”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로지 연극배우가 무대에 섰을 때만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업자(?)인 성악계를 관심 있게 살펴보면) 테너 박인수씨는 이에 대해 “노래 잘하는 사람이 몸도 풍만한 경우가 우연히 많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성악가 최현수교수는 “성악가가 살이 찌면 오히려 숨이 짧아지고 지구력이 떨어진다.”라고도 주장하고 있으며, 또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씨는 “오히려 요즘 성악가 중에는 풍채 좋은 사람이 이상할 정도”라며 “성악가에 대한 상식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다.
좌우간 최근 주목받는 성악가들은 대부분 ‘날씬하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또 성악가들은 노래는 몸을 탐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노래할 때만큼은 나, 내 몸만 생각해도 돼요.” 또 “잘하든 못하든 (몸을) 탐구하면서 하는 거예요.” 이런 주장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호흡을 통제하며 감정을 내보이는 훈련, 그게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노래를 잘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깨달음’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있다.
내가 성악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자 해서다. 그런데 우리 연극판에서는 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의 불행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정말 연극계는 ‘학술’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부질없는 자만심만 높여 연극계를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결론
8월 20~23일 독일 린다우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주제가 ‘경제학은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유용한가’를 가지고 토론하기 위해서였는데, 신문 기사는 ‘세상에 어떤 학자들이 자기 학문이 쓸모가 있는지 토론을 할까’라며 대견해 하고 있다.
세계대전과 같은 대 전쟁이 없자. 세계인들은 경제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해 경제에 대한 전망과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자,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의 기능과 역할이 자연히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좋은 분석이나 전망을 내놓아도 이를 정치인들이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유용성이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는 등으로 토론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한 게 ‘한국에서 연기교육이 필요한가. 또는 어떻게 해야 유용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이를 위한 모임과 토론이 너무나 절실하다.
더 나아가서 ‘연극교육’의 전반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저 대학본부가 연극과를 폐과하려고 나서면 그때만 모여서 떠들 일이 아니다. 연극의 장래와 현장의 무용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우리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해외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기도 힘들고, 또 살아서 숨 쉬는 인간의 일이기에 어지간해서 ‘학문’으로 이를 완성시키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럼 배우들이라도 나서야 하는데, 여기는 더 문제가 심각하다. 애초에 ‘끼’만으로 진입하는 게 한국배우의 현실이어서 그렇다.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현실의 문제에서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한국배우협회라는 게 있으나 매번 ‘산행’하자고, 또는 회비 내라고 문자가 올 뿐, 세미나 한번을 개최하지 못한다. 그럴 능력조차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배우 자신들을 위한 ‘복지’를 또렷하게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정부에서 지원금이 많이 나올 때는 협회사무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던 게 숨길 수 없는 과거였다.
지금 대학교육이 부실하면 연극에서의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다. 왜? 모두가 ‘학위’로 ‘학벌’을 위해 대학의 언저리에만 모여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이 부실하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더욱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연극이 쇠퇴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연극이 존재할 필요는 분명하다.
이건 모든 유사장르에서 배우의 연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TV나 영화는 물론이고 발레, 오페라, 판소리 등의 모든 무대공연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연기’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게 ‘연극’이어야 한다.
즉 무대공연에 짐승이 아닌 ‘인간’이 나서야 하는 한, 가장 기초적인 게 바로 ‘연기’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이것마저도 ‘연극’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행에 직면에 해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이런 식으로 일관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전혀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정말 ‘타고난 재능’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또 끝없이 그런 사람들이 모여드는 환경을 탈피하지 못하는 한, 연극에 어떤 해결책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안녕하세요. 극단 드림시어터컴퍼니 대표 정형석입니다.
극작과 연출, 배우를 겸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학 연기 교육 무용론자입니다.
대학에서 연기를 배워야한다면 4년은 시간낭비고 2년정도면 적당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2년이란 시간동안 인문학에 대한 공부와 실기적으로 호흡이나 발성 등의 기초를 철저히
배워서 필드에 나올수 있다면 유용한 시간이 되겠죠.
제가 대학교육이 무용하다고 보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고만고만한 연기미숙자들끼리 모여 있는 집단에서 과연 서로 서로가
뭘 보고 배울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대부분의 예술분야에서 개인이 성장을 이루는 것은
도제방식에 의한 교육에서 많은 효과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음악. 무용. 미술 등… 스승으로부터 직접적인 사사에 의해
많은 성장들이 이루어지죠.
연극 또한 마찬가지로 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스승보다는 선배들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있겠죠.
저는 극단에서 연극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긴 시간 극단 생활을 통해 선생님들로부터도 배웠고 선배님들로부터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배웠다는 게 딱히 누가 붙잡고 가르쳐준 그런 건 아닙니다.
옆에서 보고 부딪히고 깨닫고 같은 무대에 서면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그 분들의 호흡을 흡수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배워지게 되더군요.
바로 이점이 대학 교육이 현장을 따라 갈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10년전 20년전과 비교했을때 극단들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대학의 연극학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주먹구구식의 교육에서 벗어나
좀 더 체계화된 교육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질수 있을거란 기대가 있었죠.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가 되 버린 거 같습니다.
제가 극단을 만든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교육에 관한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명문대에서 4년동안 공부하고 졸업했다는 젊은 배우가 기본 호흡도 할 줄 모르고
발성이 뭔지도 모르는 걸 보면서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아마도 사회에 나와서 재교육의 필요성이 가장 높은 학과가 연기분야일 거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기 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워크숍 프로그램을
기획해보기도 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대학 연기과와 MOU를 맺어서
현장 교육의 방법도 찾아보곤 하는데 역시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반 여타의 학과들이 기업에 가서 인턴쉽을 하거나 실습을 하듯,
연영과도 극단 들과 제휴를 맺어서 실습을 통해 현장의 선배들과 교류하고 배우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합니다.
선배들과 멘토제같은 걸로 미리 인연을 맺어두는 것도 좋을 듯하고.
어차피 졸업하고 현장에 나오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니.
그리고 학교에서는 그런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재정이 어려운 극단에 약간의 보조를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듯 하구요.
어쨌든 선생님의 글을 읽고 연기 교육에 대해 한번 더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혼탁한 연극계에 일갈을 멈추지 않는 우상전선생님의 글을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되어 있었던 건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현장에서 멈추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많고도 많습니다. 훌륭한 무대연기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좋은 배우란 누구인가..오직 무대, 연기, 이야기만 생각하면서 실천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한 분야에 오랫동안 꾸준히 종사하는데 인정받지 못할까.. 왜 좋은 연극에 캐스팅되지 못할까… 어떻게 해야 좋은 프로덕션에 합류하게 되는걸까… 연기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세분화된 연기분야의 전문성이 확보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겨나겠지요.
배우들이, 언제라도 검증되고 체계화된 교육기관에서 재교육 받고 훈련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관련된 역량있는 연출, 스탭들과 만나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