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천자평)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 <즐거운 복희>
관람일: 2014년 9월 3일 오후 8시
관람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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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寓話)란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이강백의 작품을 ‘우화’라고 하지만 실은 ‘우화적(寓話的)’이라 하는 것이 옳다.
왜 인간을 통해 말하지 않고 동식물이나 사물을 이용할까? 그 거리 내지 차이는 문학적으로 중요하다. 문학은 바로 힘을 의미한다. 즉 그냥 사람을 내세우는 것보다 사람과 차이가 있는 동식물이나 사물을 내세워야 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장 주네는 “쇠칼보다는 나무칼이, 나무칼보다는 종이칼이 위험하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실제와 차이가 클수록 문학적(또는 시적) 힘이 커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이오네스코의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을 살해하는 언어칼(실물 없이 말로 반복하여 결국 상상의 칼을 형상화시킴)’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칼이 아닐까 싶다.
이강백은 사람을 내세운다. 그러니 거리는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이 우화적이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초기 <파수꾼>부터 그랬고, <알>, <다섯>, <영자와 진택>, <영월행 일기>, <마르고 닳도록>까지 모두 그렇다. 설령 우화라 하기 어려워도 예의 풍자는 예외가 없다.
<즐거운 복희>도 우화적이다. 작품을 보면서 이강백은 ‘우화의 달인’이 되었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달인(達人)’이란 말이 과연 좋은 것일까? 만약 기술과 예술을 구분한다면 달인은 기술에 해당하지 않을까? 물론 그 둘을 같이 보기도 하지만 기술이 효율성을 따진다면 예술은 효율성에 오히려 반하는 성격이다. “예술은 미친 짓”이란 건 바로 그 비효율을 무릅쓰고 덤벼들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운 복희>는 현실의 여러 가지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때로 그 환기가 감탄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가깝다. 마치 북극성이 그렇듯 멀어서 흔들리지 않는 그런 우화가 되지 못 한다. 90%를 숨기고 10%만 내보인다는 빙산이나, 압축되고 또 압축되어 점 하나로 능히 우주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나, 비록 앙상한 뼈대 같지만 안 보이는 나머지가 엄청난 아우라를 형성하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이성열은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연출가이다. 최근에는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래서일까? 긴장감이 약하다. 특히 최고의 내공을 자랑하는 작가와 자기표현에 대해 최고의 확신을 지닌 연출가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 안 보인다. 얼핏 둘이 잘 타협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정도의 예술가들이라면 연습 기간 중에는 아예 만나 대화조차 안 나눴으면 좋겠다. 작가는 작품을 보내놓고 침묵한다. 연출가는 그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리고 판단한다. 그 의도대로 갈지, 바꾸거나 자기 의도를 가미할지. 물론 작가는 자기 의도를 확신할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바꿨다간 심각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의도에 대한 오해가 있었거나 바꾼 근거가 약하거나 했다간 정말 망신이다. 그러니 긴장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 긴장감이야말로 작품의 예술성을 보증하는 최고의 양분이 아닐까?
최고의 작가와 최고의 연출가가 만났는데 최고의 명작이 나오지 못 했다. 무척 아쉽다. 예술에서 타협은 때로 독약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행복해 하며 무대 뒤로 지나가는 복희를 보면서는 연출 역시 에너지가 달려 쉽게 타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깎이 교수가 되어 경험하는 대학 생활이 너무 고되서일까? 잔뜩 찌푸린 채 세상을 쏘아보는 강렬한 눈빛의 이성열을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