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최하은

안온과의 결별: 산울림고전극장 <젊은 예술가의 초상>

최하은

 

원작: 제임스 조이스
각색: 조영
연출: 민새롬
단체: 청년단
공연일시: 2015. 1. 7. – 1. 18.
공연장소: 산울림소극장
관극일시: 1. 7.

 
이 공연을 봄에 앞서 영문학도들에게 <피네간의 경야>로 악명 높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원작을 읽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각색 작품을 보는 것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 혹은 획기적으로 해체 재구성했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원작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포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입견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리뷰를 쓰는 지금 시점에도 나는 아직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지 못한 상태다. 그러므로 리뷰는 철저하게 공연 자체에 대한 것으로 회귀할 것이다.

 

NISI20150102_0010489739_web

 

사실 청년단이라는 극단을 처음 만난 것은 2014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로,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미사여구없이>가 첫인사였다. 극장에 들어선 순간, ‘뭐야, 이 무대?’라고 생각했다. 넓은 소극장에 일부러 프로시니엄을 세워 공간을 좁히고, 뒷벽은 사선으로 그어 놓고, 불투명 유리를 세우고, 그 안에는 너무 평범해서 도리어 기이해 보이는 침대가 있었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 막 연극계에 한 발을 내딛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무대였다. 홍보물에서 받은 이미지는 평범한 로맨스코미디에 가까웠는데 극장에 들어서니 예기치 못한 근미래적 SF 세계가 펼쳐져 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무대를 어떻게 감당할 셈이지?’라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무대는 두 팔을 벌려 나를 격렬히 반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조명과 무대, 영상이 어우러지는 심플하면서도 효과적인, 창의성 넘치는 장치들에 연신 감탄을 했을지언정 무대의 존재감에 극이 집어삼켜지는 일은 없었다. 특히 불투명 유리로 비가 내리고 그 뒤의 실루엣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졌다. 그 뒤로 나에게 청년단의 이미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대를 감당해내는 사람들’로 남아 있다. 그것은 이들이 배우 위주로 구성된 극단이 아닌, 두 명의 연출가와 다섯 명의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스탭 프로덕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후 한 해 동안 청년단이 작업한 작품을 두세 개 정도 더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청년단은 극장에 들어선 나에게 ‘우와, 이 무대로 무슨 짓을 또 저지르실 셈이지…….’ 라는 즐거운 불안과, 그 불안을 완벽하게 압도해버리는 밀도 높은 공연으로 보답해 주었다.
사실 개성 강한 무대(조명을 포함하여)는 양날의 검이다. 아무리 기술과 돈과 노력을 들여 멋진 구조물을 설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무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즉 극의 언어와 배우의 신체에 잘 묻어드는 수준을 넘어 이러한 언어와 신체가 표현하는 이미지와 상상의 영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장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연극 무대가 아니라 그저 설치미술이며, 공연 전체의 만듦새는 아빠 양복을 걸친 초등학생처럼 멋없고 민망해진다. 대학로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연극들이 누구에 눈에도 익숙한 사실주의적 무대에 안착하거나 혹은 아예 관객의 상상력을 과신하는 텅 빈 무대를 택하는 것은 이렇듯 무대로 시도하는 모험이 다루기 어려운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대 구조물만 보면서도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 두근거림을 품고 객석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관객으로서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청년단의 작품을 얘기하면서 유독 무대, 무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래서다.

2015년 산울림소극장의 포문을 연 <산울림고전극장: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반원형극장에 알맞은 원형 덧마루에 비좁고 비뚜름한 사각의 문이 세 겹으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무대에는 빈번하게 하얀 접사다리가 등장해 중앙에 세워진다. 이로서 삼각형, 사각형, 원. 가장 대표적인 기하학의 상징이 모두 무대 위에 존재하게 된다. 심지어 이 원형 덧마루는 인력으로 회전한다. 사각의 문 세 겹이 세 줄의 길이가 다른 직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점과 선과 면, 꼭짓점과 모서리와 호가 그리는 기하학적 그림은 색채 풍성한 조명과 다양한 영상의 활용과 맞물려 작품의 건조하고 간결한, 지적인 이미지를 확장시켰다.
사실 자전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무대화함에 있어서 관객의 감정이 아닌 지적 반응을 유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무대에 대한 감탄에서 빠져나와 배우의 연기와 연출의 방향성을 보아도 그렇다. 청년단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다섯 명의 배우가 성별과 외모에 무관하게 모두 스티븐 디덜러스와 주변 인물들을 돌아가며 연기했다. 소녀 같은 배우가 스티븐을, 건장한 남자 배우가 스티븐의 엄마를 연기하곤 하는 것이다. 스티븐이 창녀의 몸을 탐하는 장면에서는 창녀와 스티븐을 모두 여성 배우가 연기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몹시 기억에 남았다. 배우의 신체적 이미지와 배역의 불일치나 배우 간 배역의 교환 등은 서사극에서 소격 효과를 위해 흔히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최근 관람한 연극 <황금용>에서도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스티븐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손쉽게 이입해 동정하는 대신, 그가 아일랜드인으로 나고 자라며 이겨내야만 했던 역사, 종교, 민족, 가족, 성욕, 예술 등의 철학적 담론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저런 고민이 있었다니 안됐다’ 대신 ‘왜 저런 고민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극을 쫓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해어의 <은밀한 기쁨>을 십분 즐기기 위해서는 대처리즘에 대한 간략한 이해가 필요하듯, 이 작품도 아일랜드의 역사, 특히 영국과의 갈등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느냐 없느냐로 관객의 반응은 크게 갈렸다. 워낙에 다루기 난해한 텍스트를 극화하는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사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문어체를 고수하고 있어 젊은 배우들이 입에 붙이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심지어 배역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것은 한 인물의 정서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청년단에게는 이런 문제들을 훨씬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관객의 눈에 낯설지 않은 무대를 만들고, 역사적 배경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줄이거나 혹은 아예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남자 배우에게 스티븐 디덜러스를 시키고, 예쁜 여자 배우에게 창녀 역할을 시키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대사의 양을 줄이고 요즘 말투로 바꿔버리는 선택지도 있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고난도의 작품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청년단은 이러한 쉬운 길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무대 위로 데리고 왔다. 청년단의 색깔이 유감없이 발휘된 기하학적 무대 위에 다섯 배우로 나뉜 철학적 인물을 세웠으며, 배우 고유의 성별과 나이를 배역의 특징과 마구잡이로 뒤섞어 관객이 극과 극중 인물들에 친숙해질 수 있는 지점들을 고의적으로 뚝뚝 잘라냄으로써 극과 관객을 철저히 유리했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강의하지도 않았지만 건너뛰지도 않았다. 종교적 신념과 성욕의 충돌이라는 쓸리고 닳은 윤리적 갈등을 정면에서 다루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았다. 세련됨, 내가 청년단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 그것이다. 이들은 세련되었다. 씻어놓은 듯 노련하다. 한편으로는 과감하다. ‘이런 거 해도 될까’라는 망설임이 일절 없는 사람들 같다. 모더니즘의 세련됨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과감함을 겸비하고 있는 청년단에 의해 20세기 모더니즘 영문학의 정수라 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이 재탄생된 것에, 그리고 그것을 2015년 새해벽두부터 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수준이라고 하면 너무 ‘팬심’인 걸까.

스티븐은 극의 말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익숙함으로부터 뛰쳐나온다. 가족, 민족, 국가, 종교, 심지어 성욕으로부터도. 그는 날개를 달고 높이, 태양에 가까워지고자 했던 다이달로스처럼 퍼덕인다. 그 퍼덕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날개를 달았다는 것, 그리고 퍼덕인다는 것이다. 이륙의 순간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청년단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루는 방식이 꼭 그랬다. 모든 친숙함에 이별을 고했다. 안온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주하는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이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고뇌했는지, 스티븐만큼이나 뼛속 깊이 사유했는지가 극을 통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낯익음에 대해 얼마나 의심하고 있는가. 안온한 그곳이 사실 당신을 가둔 철창은 아닌가. 포근한 거실의 난롯가를 벗어나 불타는 태양의 곁으로 날갯짓할 열망은 없는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