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혹은 무엇이 당신의 등을 떠밀었는가?
<잉여인간 이바노프>
장윤정
작: 안톤체홉
번역/연출: 전훈
제작/기획: 애플씨어터
주관: 안똔체홉학회
공연일시: 2015/01/29~2015/04/12 평일 pm8:00, 토‧일 공휴일 pm4:00
공연장소: 아트씨어터 문
관극일시: 2015/03/05/목요일/pm8:00
라캉은 데카르트를 넘어서서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나를 내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나를 떠난 곳에 내가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아이가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엄마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소유하고 싶어 하듯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기에 결국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욕망은 기의의 자리에 존재하므로 결코 구체적일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기표로 상정하여 획득하려하지만 결코 그 결핍은 채워질 수가 없다. 기의와 기표는 일치할 수가 없으며 서로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므로 스스로 자신의 욕망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욕망이 대체 무엇인지 결국 모두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타인들의 욕망을 우리는 결코 다 충족할 수가 없다. 결국 주체는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른 기표들을 쫓아다니게 되는데 그 결핍을 ‘승화’만이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승화는 예술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약 예술로 승화하지 못한다면?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함을 깨달은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욕망을 잃고 무기력한 한 사람이 존재한다. 이바노프다. 이바노프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저 지독한 무기력함에 몸부림칠 뿐이다. 그래서 체홉은 그를 ‘잉여인간’ 이바노프라 하였다.
·「이바노프」의 세계
체홉은 일찍이 27살에 「이바노프」를 작성하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생성되던 시기였다. 알렉산드르 2세에서 알렉산드르 3세로 넘어가던 시기는 이제 막 시작될 것 같았던 자유주의가 전제군주제 강화로 급격히 몰락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는 계급을 막론하고 그 누구도 심리적으로 안정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지식인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지주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을 것이며 다양한 태도의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특히 불안한 현실은 인간을 더욱 속물적으로 혹은 더욱 관념적으로 변화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이바노프」에서는 그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드러난다.
이바노프는 관공서 농민업무 분야의 상임회원이다. 그럴듯한 직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빚을 지며 산다. 게다가 결핵을 앓고 있는 아내가 있지만 그녀를 동정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20대인 사샤와 바람을 피우고 새롭게 결혼을 하려하지만 여전히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자살을 하고 만다. 이것이 「이바노프」에서 나타나는 이바노프의 삶이다. <잉여인간 이바노프> 또한 마찬가지다. 원작의 이바노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잉여인간’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이바노프에 대한 역설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바노프는 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잉여인간인 것일까? 100년 전의 이바노프는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욕망을 쫓는 부류도 그것을 관망하며 휩쓸리던 부류도 되지 못했으며 홀로 스스로에게 침잠하였기에 잉여인간이 되었다. 극 중 대부분의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지주계층인 지나이다는 금전적인 면에 욕망이 강하여 매사를 계산하며 마르파는 돈이 많은 대신 명예를 얻기 위하여 훨씬 나이든 샤벨스키 백작과 결혼을 하려한다. 이바노프의 친척 보르킨은 끊임없이 경제적 수완을 올릴 궁리를 하는데 그의 사고는 대부분 터무니가 없다. 사샤는 유부남인 이바노프를 욕망하며 샤벨스키 백작은 마르파의 자금을 욕망한다. 레베데프는 이들을 관망하며 체념적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인물들은 대부분 속물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부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인간의 다양한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이바노프에 대한 험담과 과장된 소문을 나누지만 그것은 그들에겐 당연한 논리다. 이바노프는 마치 고인 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다가 빚만 지면서 아픈 아내를 외면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논리로는 아무도 이바노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바노프만을 바라보는 아내마저도 이바노프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바노프는 철저히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사실 당연한 결과다. 정작 이바노프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타자에 위치한 욕망에 휩쓸리는 인물들과 철저히 자아와 주체에 빠져들어 버린 인물, 그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 누가 그를 죽였는가?
솔직히 단언하자면 어느 누구도 그를 죽인 자는 없다. 그는 스스로 죽었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을 뿐이다. 그것이 이바노프가 겪은 삶의 현실이다. 그는 일찍이 치열한 삶을 살았고 열정을 모두 소진했다. 한때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고 도전의식이 있었지만 30대가 되면서 그것들은 순식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의지도 신념도, 삶의 방향도 잃은 채 자신의 무기력증에 무력함을 느끼고 만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저 우울의 극치로써 이런 자살행위를 한 것은 아니리라는 점이다. 체홉은 항시 시대적 상황과 정서를 전제하여 작품을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이바노프」의 경우는 체홉이 작가로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쓰기 시작한 첫 작품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과연 체홉은 마냥 우울증에 빠져 비관적인 인간상만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이다. 체홉이 의도했던 「이바노프」에서는 급변하고 혼란스러운 당시 러시아의 시대정서에 따른 인물군상들을 분명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결혼지참금 같은 문화적 차원이 아니며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적 차원에까지 닿아있다. 그렇기에 체홉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정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인물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당위는 그 시대환경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잉여인간 이바노프>는 아쉬움을 전한다. <잉여인간 이바노프>에서는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 정서에 대하여 필요한 만큼 가지를 쳐낸 느낌이 든다. 물론 오늘날 한국인 관객들이 굳이 100년 전의 러시아 시대상황까지 알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100년 전의 러시아 시대 정서를 전하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게다가 체홉은 누구보다 인간에 대하여 밀도 있게 그려냈던 작가이기에 인물 자체에 몰두하여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홉의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인물이 처한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정서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칫 작품은 관념 속을 표류하거나 피상적 혹은 단편적으로 이해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잉여인간 이바노프>가 그러한 경계에 놓인 듯하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정서를 배제할 경우라면 차라리 현대의 시대적 상황과 더욱 맞닿게 구성하는 것이 관객들을 설득하기에 이롭다. 그런데 <잉여인간 이바노프>의 경우 그 둘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채 이바노프는 대체 왜 죽었는가에 대한 논의를 행한다.
100년 전의 이바노프라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어느새 탈진해버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환멸, 시대변화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 그리고 그런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채 세속적인 삶으로 번거롭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탈진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바노프는 왜 죽고 말았을까? <잉여인간 이바노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중심에는 결혼 지참금이 존재한다. 결혼이라는 의식보다는 지참금에 주의를 기울이는 인물들의 태도에서 세태풍자 의도가 나타나며 지참금에 관심 없는 이바노프와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덕분에 관객은 속물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통하여 풍자의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아쉬운 것은 이바노프를 구석까지 제대로 몰아넣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바노프는 사람들에게 더욱 시달려야하는 인물이다. 사랑을 강요하는 사샤에게,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안나에게, 자신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는 백작 샤벨스키에게, 자신의 삶을 재단하는 을보프에게. 시대환경을 떠나 오로지 인간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했다면 이바노프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상황을 더욱 조밀하게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잉여인간 이바노프>는 인물들이 옥죄는 것 보다 이바노프의 자기변명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인물들은 관객들마저 소스라치게 질릴 정도로 이바노프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행동으로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의지를 표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면면이 모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더 명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잉여인간 이바노프>에서 이바노프는 자칫 속된 말로 표현하여 ‘중2병’의 형상으로 느껴질 위험이 있다. 진심어린 고뇌와 자기 성찰 없이 계속해서 자아 비관을 지속하는 것은 관객에게 진중하게 와 닿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이바노프역을 맡은 배우의 문제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모든 인물들이 그를 제대로 강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인물들을 피상적으로 연기하거나 표현하고 있다. 비록 희극작품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표현은 체홉의 장점인 캐릭터의 입체성을 단편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캐릭터의 입체성은 이후 작품인 「갈매기」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바노프」에 그 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 인물들은 각자의 인생과 욕망이 명백히 존재하며 그러한 심리를 잠재한 채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여인간 이바노프>에 등장하는 인물들 몇몇은 어색한 억양과 목소리 톤으로 외화를 흉내 내는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당시 시대적 문화양상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것을 보고 듣는 재미는 있으나 실질적으로 작품성에 그것이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또, 작품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악기 연주는 아직 설익은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태다. 아무 배경 음악 없이 연주되는 안나의 첼로 실력은 위태롭게 들리며 보르낀의 바이올린 연주는 배경음악에 묻힌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음감이 드러나 관객마저 어색하게 만든다.
· 오늘날 잉여인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여인간 이바노프>만의 미덕은 존재한다. 그것은 무대 연출과 의상의 색감에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무대는 하얀 배경으로 구성되며 배우들의 의상 또한 하얀색이다. 마치 정신병원을 연상하게 하는 이 배경과 의상은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침잠된 이바노프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결혼식 때는 마치 상복을 입은 듯한 연출로써 모두 검은 의상을 택하였는데 역설적인 표현력이 돋보였다. 연출의 연출력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이 작품에 어울린다. 이 작품의 미덕은 관객과의 호흡이며 체홉의 작품도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음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연출이었다. 공연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잠시도 놓치지 않게 만든다. 의상과 소품, 조명 등을 활용하여 풍부하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잉여인간 이바노프>는 체홉의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낸 공연이며 생각할 거리와 동시에 볼거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오늘날의 이바노프는 왜 자살을 택하게 될까? 아마도 오늘날의 이바노프는 선택의 여지없이 잉여가 되고 만 젊은이들일 것이다. 이들은 급변하는 자본사회의 소산물이나 다름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잉여의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택의 여지없이 생산 활동의 기회가 박탈된 채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은 자연히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100년 전의 이바노프가 열정을 모두 소진하여 무기력해진 인간이라면 현재의 이바노프들은 사용조차 해보지 못한 채 녹이 슬어 무기력해져버린 격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모두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눠야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비합리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100년 전의 이바노프도 현재의 이바노프도 결코 잉여인간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잉여의 기준은 사회가 되고 사회에 아무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잉여인간이 되는 이 현실에서 현재 <잉여인간 이바노프>를 통하여 과연 오늘날 우리는 잉여인간이란 무엇이며 오늘날의 잉여인간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심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바노프의 등은 사실 아무도 떠밀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모두가 떠민 것과 같다. 단순한 개인의 무기력함을 넘어서는 문제로써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회적 문제이며 우리 모두 겪고 있는 인간 본질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인간 이바노프>는 이 시대에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며 사회적 메시지와 연극적 재미를 가진 만큼 시대적 맥락과 현실에 따라 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