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녀는 왜 불행했나? <이영녀>
김태희
작 : 김우진
연출 : 박정희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5/5/12 ~ 31
공연장소 : 백성희 장민호 극장
관극일시 : 2015/5/13
우리 연극계는 꽤 오랜 시간 우리의 고전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최근에 국립극단이 가장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사업이 삼국유사 프로젝트였음을 상기해보자. 왜 하필 국립극단은 그토록 삼국유사의 재창조에 사활을 걸었던 것일까. 신화가 이야기의 보고(寶庫)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갑작스레 국립극단이 삼국유사를 호출해낸 것은 여러 가지 층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만의 고전,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고전을 갖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근현대 연극 작품을 무대 위로 다시금 호출하는 작업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지 않을까. 우리도 무대화가 가능한 근대 작품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욕망, 안 그래도 빈약한 희곡사를 조금이나마 보충하고 싶은 욕망과 사명감. 그 결정체가 <이영녀>가 아닐까 싶다.
국립극단의 프로젝트 이전에도 근현대 작품들을 다시금 공연하는 일은 간간히 진행되어 왔었다. 몇 년 전에는 혜화동 1번지 동인들이 해방기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었고, 예술의 전당에서는 김영수의 <혈맥>을 공연하기도 했었다. 또 종종 한국 연극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 아래 특집 공연들이 기획되곤 했었다. 국립극단이라면, 이들 공연과는 뭔가 차별되는 지점을 보여줘야 할터다. 그런 부담감과 일종의 사명감을 안고 탄생한 작품이 <이영녀>였다.
<이영녀>를 무대화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서두에 놓여있는 긴 해설이 무대화되기 어렵다는 점과 이로 인해 막 간의 연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3막짜리 희곡은 시간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어딘지 이야기가 뚝뚝 끊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장문의 해설들은 무대 위에서 설명되어야 할 전사들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어서 무대화의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전사들이 누락되면 인물들을 둘러싼 겹이 미약해지고, 그렇다고 장문의 해설을 무대 위에 구현할 방법도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 연출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원전의 이야기에 박물관이라는 겹을 씌우고, 여기에 박물관 관장이라는 인물을 덧붙인다. 박물관 관장은 서술자처럼 관객들에게 해설의 내용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막간의 넓은 사이를 메우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극은 전체적으로 박물관에 박제된 인간을 보는 것처럼, 역사 속에 묻혀있던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설정을 갖게 된다. 이런 설정으로 인해, 이 극은 그에 어울리는 장치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가장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의 느낌을 주기 위해 무대 위에는 오래 된 물건, 요컨대 장롱이나 문갑들을 배치하고 배우들도 마네킹처럼 등장해서 마치 관절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무대 위를 누빈다. 여기에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하는 분장과 조명이 어우러지면서, 이영녀의 삶에는 깊은 비애감이 드리워진다. 이런 연극적 장치 덕분에, 문학성이 두드러졌던 <이영녀>는 무대화에 적합한 형식의 텍스트로 변모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영녀의 삶이 그저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비극의 연쇄들은 파편화 되어 있어서 쉽사리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이는 희곡에서부터 비롯된 문제 혹은 이 텍스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영녀이지만, 사실상 그녀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무대 위에 영녀가 등장하는 시간과 주변 인물들이 논쟁을 벌이는 시간이 비슷하게 분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영녀를 둘러싼 환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가령 1막에서 이영녀가 처한 현실의 비극은 관구와 명순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성매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끝내 경관에게 잡혀갔다는 사실 이전에, 두 아이의 대화를 통해 당대 여성들의 지위와 현실이 포착된다. 2막에서도 영녀가 등장하기 집안 사람들이 이전에 강영원의 육욕과 이를 받아들일지 않는 영녀의 선택을 놓고 한바탕 언쟁을 벌인다. 3막에서도 영녀가 죽고 난 뒤 기일네와 명순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여성상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영녀의 행위들은 전부 후경화 되어 있고, 그마저도 적극적인 저항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저항에 그치고 만다. 1막에서는 그나마 안순네와 드잡이라도 벌이던 영녀는 2막에서는 공장에서 투쟁을 했다고는 하나, 무대에 드러나지 않으며 3막에서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희곡에서는 차츰차츰 희미해져가는 영녀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비정한 현실은 더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영녀를 전면에 배치하지 않은 극작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영녀>의 무대 위에서 영녀는 지나치게 강한 투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마지막 죽음 뒤에 따르는 환상 장면과 극 초반부터 전면에 비치는 영녀의 모습은, 전반적인 극의 흐름과 다르게 영녀를 부각시키는 경향 있다. 영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대목에 이르면, 영녀는 마치 열렬한 투쟁 끝에 목숨을 잃은 영웅적인 존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희곡이 가지고 있는 애초의 의도를 잘 살리려면 영녀를 부각시키기 위해 공을 기울이기보다는, 주변화 된 대화들, 파편화된 대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법들이 고안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이 작품의 키는 명순이에게 있다. 이영녀의 삶을 돌아보자. 이영녀의 무능한 남편은 그녀로 하여금 삯바느질도 모자라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를 꼭 닮은 아들 관구는, 그런 희생이 무색하게 아비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해도 아들만은 교육을 시키겠다는 욕망이 이영녀의 삶을 계속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마지막으로 영녀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유서방은 딸 명순을 탐하는 패륜을 보여준다. 세대를 가로질러 가난과 비극이 유산처럼 물려지고 있으며 이 연쇄의 고리 끝에는 이영녀의 죽음이 자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녀의 죽음과 함께 명순이의 변화가 함께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명순은 가난과 남성에게 짓밟히는 여성의 삶을 그대로 물려받기 보다는 이혼을 선택하겠다는 말로 의지를 표명한다. 비록 영녀의 삶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지만, 명순은 영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확고하게 지니는 인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영녀>에서는, 이런 명순의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모든 포인트가 영녀에게 쏟아지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