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술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 ‘화술학회’의 창립에 붙여 –
나는 2006년에 ‘화술로 배우는 연기’라는 상하권의 책을 발간했다. 내년 2월이면 꼬박 10년이 되는 시점이 되어서야 연기교육에서 ‘화술’에 관심이 생긴다는 현실이 솔직히 반갑기도 하지만 너무나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내가 나름 이론을 전개한지가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공식적인 논의도 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한국에서 화술은, 화술교육은 저개발국(?)의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화술에 관한 개념이 부재하고 논리도 약하고 그동안 논의나 토론, 훈련조차 부실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화술교육이 각자 자국어로 이루어져서 국제적 교류가 힘들기 때문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기교육이 발전하지 못한 우리의 처지에서는 자연히 화술교육도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직도 왜, 어떻게 화술을 교육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개념미숙단계에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 우리는 왜 화술에 대한 개념 부족 상태에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끼’란 무엇인가?
연기와 화술교육을 논하려면 먼저 우리의 비전문용어인, ‘끼’와 ‘쪼’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왜 이런 말이 연기교육의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는가를 아는 게 우선 되어야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연기에 관한 용어 중에 일반적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말이 ‘끼’라는 말일 것이다. 그럼 ‘끼’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예술의 경우를 보자.
우리 주변에서 소설이나 시, 극작을 전공하겠다고 나서는 문학 지망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를 위해 새삼스럽게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려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이미 그들은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따로 배울 게 없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문학계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이나 자신의 ‘글 솜씨’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즉 자신이 그에 관한 ‘재주’가 있는지를 판단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기에게 문학적 ‘끼’가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것이다.
이는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 않은 장르에서는 그걸 ‘끼’가 대신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끼’란 선천성 재능인 감각이나 잠재력인 감수성을 말하는 것일 거다. 그러니까 후천적 기술습득보다는 타고난(잠재된) 재능이 요구될 때,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이 먼저 작용할 때 이를 ‘끼’라 이르는 것일 거다.
이를 쉽게 이해하려면 ‘발레’로 예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발레는 무대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춤을 추는데, 이건 분명 일상적인 동작이 아니다. 따라서 필히 기초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난 발레리나가 되려면 정신적인 것보다는 타고난 신체조건이 우선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를 꿈꾸는 사람은 이런 기본 표현문법인 기초훈련을 적당한 시기에 좋은 교육을 받는 게 필수다. 그건 성악이나 악기연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체로 보통 10세 전후에 교사로부터 (또는 경험자로부터) 기초교육을 배우기 시작해야 좋은 발레리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건 피아노나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장르에서는 ‘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 신체훈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끼’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기에서 ‘끼’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연기교육도 문학수업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기는 문학처럼 선천성, 정신작용이 우선하며 일부러 기초교육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연기는 누구나 자기가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말과 글, 액션을 통해서 이미 기초훈련을 마쳤다. 따라서 연기를 시작하려는 배우들은 표현력을 우선 ‘끼’를 통해서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끼’라는 말이 연기에서는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교육에서 연기지망생의 ‘끼’를 찾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끼’만으로는 문학도 연기도 완성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일상적인 언어구사만으로는 문학은 물론이고, 고도의 예술성을 요구하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연기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의 경우, 솔직히 교육이 부실해 현재 우리의 배우들이 ‘끼’에만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예술성에서 부족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의 연기교육의 수준은 현재 ‘끼’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수준에 있다고 하는 게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연기교육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정립하는 게 급선무다. 그 다음에 다가가야 하는 게 바로 ‘글 솜씨’를 높이듯 점점 연기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일 거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연기와 일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해야 한다. 특히 목소리를 다루는 화술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즉 연기의 특수성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정립해 나가는 게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 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적응력을 배우는 게 순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행히 우리 연극판은 이에 대한 기본적 개념이 없다. 그래서 ‘끼’와 ‘기술’에서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www.ttis.kr를 통해 (ttis26호 2012년 11월호) ‘<화술로 배우는 연기>에 대한 오해와 불만’ 이라는 글을 통해서, 또 (ttis27호 2013년 2월) ‘호흡과 발성의 오해와 진실’의 글을 통해서 연기의 특수성을 말하고 내가 왜 화술교재를 이렇게밖에 만들 수 없었는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처음 영어를 배우는 사람을 위한 회화책이나 피아노의 ‘체르니’와 같이 연주체득과정을 적시한 교재처럼 만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따라서 나의 졸저나 이런 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읽어보았으면 (내 생각에) 지금쯤 한국의 연기(화술)교육에서 최소한 ‘연기전공서적’이라도 뭔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소한 이에 대한 토론이라도 있었어야 하는 게 도리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건 학문의 세계가 아닐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 학위는 있어도 학문은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자연히 연기를 발레나 악기연주처럼 처음부터 기초를 가르치고 배우려고 하는 데서부터 교육에 착오와 오류가 발생하는 사람이 나다. 그래서 교육의 왜곡현상과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쪼’란 무엇인가?
그럼 화술에서 ‘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실제로 우리 화술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용어가 즐겨 사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누구나 우리말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화술에서 어떤 이유로 이런 부정적인 용어가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기초교육이 없이도 접근이 가능해서 어느 누구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화술에는 ‘쪼’라는 나쁜 습관에 익숙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또 문학에서는 이런 용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왜 화술에만 ‘쪼’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배우가 목소리를 사용하는데 따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무슨 이유로 화술이 일상과 동일한 어휘를 사용해 말을 하는데도 이런 부정적인 용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하여튼 이런 현상을 막을 대책이 필요한 게 화술에 요구되는 게 사실이다.
우선 이게 무서운 것은 화술을 구사하는 당사자가 전혀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게 습관적으로 목소리의 ‘버릇’으로 고착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술을 구사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는 암초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과 화술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화술에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술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런 ‘쪼’를 판별해주는 ‘보이스코치’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일 거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자연히 교육이 부실해지고, 마치 멀쩡한 자기 얼굴을 좀 더 예쁘게 고쳐보려고 성형에 나섰다가 되레 자기 얼굴을 망치는 것과 같은 오류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화술에는 분명 얼굴을 망치는 ‘돌팔이’적 의료행위가 있음을 조심해야 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화술에서만 사용하는 특징적인 용어를 통해서 화술의 정체는 물론이고 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 것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이건 인위적으로 목소리를 낼 때에 생기는 현상이다. 암기된 말을 배우가 자기 목소리로 내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상처럼 ‘충동’으로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닌 배우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에 생긴다.
3) 즉 화술의 음성화가 일상어보다 복잡한 구조 – ‘문어체적’ 성격이 강한 대사를 음성화하려다가 빠져드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의사전달만을 위한 일상의 말하기가 아니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4) 일상처럼 상대에게만 말하지 않고 다중의 관객에게 말하려는 ‘무대발성’을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5) 배우가 화술을 구사하려면 긴장에 휩싸이기 쉬워 또 일부러 말을 잘 하려고 해서 생기기도 한다. 멋있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려다 생기기도 한다.
이제는 ‘끼’와 ‘쪼’를 통해서 화술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화술은 일상의 의사전달을 위한 말하기가 아닌 ‘예술적’ 말하기를 위한 기술을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술적’ 말하기에는 반드시 화술을 위한 교육이 필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화술에서 ‘끼’와 ‘쪼’는 서로 상반된(모순된)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상반된 용어를 통해서 화술교육에서의 개념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학의 실기전형이 주는 낭패감
여기서 우리는 연기교육에서의 ‘끼’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게 바로 ‘끼’다. 그리고 이를 알 수 있는 게 바로 대학입시에서 선행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실기전형이다. 우리는 이를 흡사 발레방식의 실기교육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오류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극대학의 연기 입시생들의 실기전형을 보면, 마치 학원교사와 함께 쓴 (또는 써준) 시나 단편소설, 콩트를 입시장에서 제출하고 테스트를 받는 문학의 실기전형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아직까지 자기를 교습해준 선생이 써준 글을 백일장에 내밀고 상을 탔다거나, 그런 걸로 대학에 입학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직껏 연극대학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건 입시장에서 ‘즉흥연기’라 해서 ‘즉석대사’를 주고 테스트를 해보면 그저 대사를 ‘낭독’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전혀 연기지망생의 ‘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들의 연기적 감각과 감수성을 판단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화술교육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학원 강사’의 실력을 평가해서 입시생을 선발하는 꼴이 되고 있는 이 현실에서 말이다. 연기란 먼저 ‘끼’를 살려 이에 서서히 ‘기술’을 입혀가는 과정을 통해서 연기예술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발레처럼 ‘기술’을 강요하니 우선 배우들이 ‘쪼’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화술교육에서의 ‘쪼’의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화술에서 교육이 필요한 것은 배우가 ‘쪼’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는 것인데 말이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의 연극대학의 연기교육이, 특히 화술교육에 개념이 부재하는데 따른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화술교육에 착오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학이 화술교육의 방법론과 접근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발레 교습처럼 되어버려 엉뚱하게 왜곡된 기초적인 표현문법을 익히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는 현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면허’가 없는 성형의사에게 자기의 얼굴을 맡겨 망치는 꼴이 되기 십상인 게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면허가 있어도 부작용으로 난리법석인데 말이다.
따라서 우선 우리의 화술교육에서 가장 서둘러야 하는 급선무가 바로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나마 촬영 현장이나 극단에서는 연수생을 뽑을 때 오디션을 통해 연기지망생의 ‘끼’를 확인하고 뽑으려 최대한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적합여부를 따져 배역을 준다는 점에서 현장이 대학교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망생의 잠재력의 판단에서 훨씬 앞서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작업현장이 대학의 연기교육을 신뢰하지 않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촬영현장은 연극계마저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자연히 연기교육의 무용론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시급한 게 바로 제대로 된 ‘보이스코치’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래야 ‘돌팔이’의 병폐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교육방법론의 개선점은?
무용이나 성악처럼 새롭게 표현문법을 익히는 게 아닌 게 화술이지만 그렇다고 기술을 업신여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때 ‘기술습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려 ‘쪼’를 습득해 점점 나빠질 수 있는 게 화술이기 때문이다.
우선 화술이 일상처럼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단조로운 생활언어가 아니라 예술성이 넘치는 드라마틱한 언어로 변환되어 있는 게 화술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화술은 극작가의 예술적 말하기에 배우의 목소리를 통한 테크닉을 결합해 예술적 표현력을 얻는 행위가 바로 화술이고, 이게 바로 화술교육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습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때 처음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인을 상대하듯 교재도 만들고, 발음, 발성기관의 구조를 주로 설명하는 가르침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배우의 화술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일단은 일상에서 멀쩡하게 말을 잘 하는 지망생이 일단 학원과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쪼’에 노출되는 위험성을 최대한 줄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전문가의 양성이 아주 시급하다.
연기교육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많은 배우들이 “너는 발성이 안 돼!” 이런 말을 하는 걸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배우들은 무대에서 목소리가 나오기만 하면 자신이 발성이 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배우 중에 ‘화술을 위한 발성’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건 대극장공연이 부실한 것으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상대방에게 “너는 사투리를 쓰는 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크게 말해” 이런 말은 들어봤어도 ‘너 쪼가 있구나!’ 또는 ‘넌 발성이 안 돼’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화술만의 특수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왜 화술을 논해야 하며, 어째서 화술교육을 필요한가를 알려야 한다.
자신이 배우라면 모두가 화술의 두려움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일상어를 기초로 하는 게 연기여서 무용이나 가창처럼 기초문법을 익히지 않아도 가능한 게 화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우가 자기의 일상처럼 내키는 대로 지껄인다고 해서 화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려 기초문법을 익히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더 골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쩌면 화술만큼 배우기도 힘들고 가르치기도 어려운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건 어쩌면 자기의 충동으로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닌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용이나 성악처럼 기초과정이 존재하지 않아서 외려 습득이 용이할 것 같지만 그 반대인 게 사실이다.
거기다 화술은 일상처럼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게 아닌 무대에서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경험이 많은 배우일수록, ‘유명배우’일수록, 점점 더 경력이 쌓여갈수록 ‘끼’는 사라지고 ‘쪼’가 더 심화되어가는 게 화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배우가 자신의 목소리의 성능을 높이려 들수록 위험에 빠질 우려가 많은 게 화술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화술서적을 보면 마치 화술이 기초교육이 필요한 장르를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게 사실이다. 너무나 기초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지할 것은
첫째,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국문학과, 연극과를 다니지 않아도 문학성만 좋으면 충분히 ‘글쟁이’ – 소설가나 시인, 극작가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연기도 마찬가지다. 구태여 전문교육기관인 예술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는 연극대학에서 연기수업을 받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배우로서 조금도 손색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극대학에 학생들이 연기를 배우러 모여드는 것은 어쩌면 연극이 여러 배역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장르여서 자기 ‘혼자서’ 연기를 연마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이런 논리로 연기지망생들은 새삼스럽게 새로 발음을 익히고, 발성을 배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외려 문학처럼 문학성이나 문학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테크닉 – ‘문장력’이나 ‘글 솜씨’와 같은 것을 익히는 훈련이 더 긴요한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외려 무대에서, 또는 카메라 앞에서 빨리 적응하는 연기테크닉을 익히는 게 더 유용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교육방법론이나 연기접근법 등이 타 장르와는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개념이 충분치 못해 많은 오류와 오해를 야기하고 있는 게 화술(연기)교육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즉 기초교육이 필요 없는 장르일수록 이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져야 하는 게 현실이다.
화술이란 무엇인가?
사실은 이에 관한 개념이 분명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는 나의 ‘화술로 배우는 연기’를 읽어보면 금방 화술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에 관한 것들을 다룰 생각은 없고, 왜 화술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중요시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게 좋을 듯하다. 특히 화술교육에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게 더 유용할 것이다.
‘보이스코치’의 중요성
화술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작용하지만
첫째는 배우가 자기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대사가 소리 말인 아닌 글말이어서 배우가 자기 목소리의 리듬감에 확신과 자신감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셋째는 화술은 예술적 말하기여서 일상처럼 말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일상과 달리 길게, 문장 식인 말을 해야 하는데 있다.
그래서 배우의 목소리를 듣고 도움을 줄 전문의인 ‘보이스코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 ‘보고 듣는’ 기능을 가진 화술전문교사의 양성이 시급하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화술은 좋은 보이스코치만 만나면 얼마든지 좋은 화술을 구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대체로 연출가가 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들의 능력에 따라 학생들의 화술구사가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경험이 없어도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어
화술은 무용이나 가창처럼 기초적인 표현문법을 익혀야 하는 장르가 아니다. 따라서 무용이나 가창과 달리 교사가 직접 무대에 선 경험이 없어도 – 화술을 구사해 본 경험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왜? 화술에서 중요한 게 ‘판단’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연기경험을 가진 배우의 경우는 외려 “너나 잘해!” 이런 모욕이나 부담을 감수해야 할지 몰라서, 또는 다른 배우와 경쟁관계에 있는 처지 등을 고려할 때 도리어 교사로서는 부적합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게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기초교육을 반드시 해야 하는 무용이나 성악에서는 교사가 춤이나 노래를 한 경험이 없으면 – 꼭 시범을 보여야 해서- 교육이 불가능하지만 연기는 누구나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좋은 감각이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이건 영국출신의 시실리 베리나 링크레이터 등이 배우출신이 아니면서도 언어학 등을 공부해 영어권의 화술교육자로서 또 보이스코치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소설을 쓰지 않는 독자나 평론가가 얼마든지 작가의 문학적 재능을 평가할 수 있는 이치와 비슷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술교육에서는 교사가 ‘보고 들을 줄’ 아는 전문교육을 받으면 얼마든지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교사들이 너무나 이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게 문제일 뿐이다. 수시로 토론도 하고 교사 워크숍 등을 통해서 전문성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화술(연기)교육과 음성학과 차이
이런 현실로 인해 교육은 물론이고 전공서적의 집필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다.
한 예로 ‘발음’을 보자. 발음을 그저 음성학적으로만 가르치면 안 되는 이유는 이렇다. 이미 어린나이에 발음을 익혀 누구나 다 언어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교정을 위한 ‘지적’에 의한 후천적 발음교정훈련은 지망생들의 연기습득을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외려 연기습득에 방해가 된다.
왜 그럴까? 그가 그렇게 발음하게 된 원인이, 첫째 그의 구강구조에 문제가 있어서 일거다. 따라서 먼저 그의 혀가 짧은지 또는 연구개나 사이언스 공명, 즉 코의 구조 등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 호흡이 짧아서 그럴 수도 있다.
물론 비염이나 축농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앞니를 교정한 것은 아닌가 등에 점검해야 한다. 또는 사투리의 영향이 아닌가도 살펴야 한다. 따라서 화술교육에서 음성학의 일반적인 개념(교육방법론)을 적용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교사가 무조건 발음을 교정하려 들어서는 안 되고, 화술의 특수성을 고려한 개념을 먼저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이런 개념에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마냥 음성학적으로만 접근하고 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혀를 편다고 볼펜으로 늘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혀가 짧은 원로배우가 요즘 최고의 연기력을 보이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치 외국인에게 한국어 발음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발성훈련은 말해 무엇 하랴!
화술에 왜 테크닉이 필요한가?
문학 지망생에게 문장력이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화술에도 표현의 기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바로 무대발성일 것이다. 이건 오로지 무대배우, 연극배우에게만 해당되는 기술이기도 하다.
그럼 무대발성이란 무엇인가? 일상의 말하기는 가까이에 있는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 게 주를 이룬다. 간혹 다중에게 말을 하는 강의나 연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대에 서는 배우에게는 많은 관객이 이를 관람하므로 해서 ‘다중’을 의식한 특수한 발성이 요구된다.
그러니까 일상처럼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를 내면 객석의 저 끝에 앉아있는 관객에게는 당연히 들리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배우의 목소리는 들려야 한다. 그러니까 배우의 무대발성이란 ‘상대에게 하는 말’이 객석의 관객에게도 들리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려면 당연히 목소리가 커야 한다. 그런데 이때 배우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면 배우의 대화체 –상대에게 건네는 말의 리듬- 이 뭉개져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향해 강의나 연설을 하듯 말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무대발성의 테크닉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화술에 왜 신체훈련이 요구되는가?
화술이 문학수업과 다른 점은 바로 배우가 신체훈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에서는 신체훈련은 필요 없다. 컴퓨터를 두드리게 고작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화술에서는 표현의 주체자가 반드시 신체훈련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이는 화술이 배우의 음성화여서 당연히 표현도구(목소리)의 성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술에서는 음성화를 위한 발음, 호흡, 발성, 공명과 같은 신체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극작가 요구하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악기연주의 경우는 장인(匠人)들에 의해서 악기가 만들어져 완성도가 높지만 화술과 같은 인체를 표현도구로 사용하는 장르는 악기가 미완성일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즉 악기는 돈으로 완성품을 구입할 수 있지만 연기의 표현 도구인 배우의 목소리나 완제품을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장인에게 부탁을 해서 새롭게 만들 수도 없다. 따라서 당사자의 기능향상을 위한 훈련이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가령 배우의 ‘리듬 만들기’는 장인(보이스코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표현도구인 목소리의 성능은 배우 자신이 훈련을 해서 악기의 성능을 높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특히 화술에서 예술적 음성화를 위해서는 신체의 많은 기관이 이에 공헌을 해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악기가 완성품이 아닌 결함을 갖고 있으면 소정의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훈련이 필수적이다.
그래도 신체의 움직임이 주를 이루는 무용이나 가창에 비해 신체의 타고난 기능이나 성능이 미치는 영향이 적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발레의 경우는 타고난 신체가 뒷받침이 없으면 수석(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또 성악에서 세계적 성악가인 파발로티의 음악성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그의 타고난 신체적 기량이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그렇다, 그래도 연기는 그런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외려 배우의 내면적 감각이 더 중요성을 갖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른다.
화술에 ‘보는 기능’이 더 중요한 이유
배우의 화술에서 결함은 대체로 다음의 3가지에서 유래하고 있다.
- 배우의 신체적 결함 – 구강구조, 공명구조, 가슴 미발달 등
- 배우의 정신적 결함 – 긴장, 집중력부족, 대사분석부족
- 잘못된 습관화 – 호흡과 발성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선행학습 등의 후유증
흔히 사람들은 화술하면 ‘듣는 기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화술에서의 ‘보는 기능’이다. 왜 그럴까? 교사에게 ‘듣는 기능’만 있으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게 ‘지적에 의한 교육’밖에 없다. “그렇게 해면 안 돼, 이렇게 해봐!” 이게 전부다. 즉 원인치료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에 ‘보는 기능’이 있으면, 앞에 언급한 세 가지의 결함이나 약점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원인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만큼 ‘보는 기능’이 중요하다.
즉 배우가 축농증이나 비염을 앓아도 안 되고, 앞니를 교정한 적이 있는가, 얼굴 생김새를 보고 목소리에 공명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보는 기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이런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배우의 결함을 제대로 교정해 줄 수 있다.
배우는 미모를 갖고 있어도 화술에 취약할 수 있다. 몸에 유연성이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를 ‘신의 농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이런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배우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다른 장르에 비해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우의 신체적 조건이 예술성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술교사는 배우의 신체적 조건을 살필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배우의 신체의 생김새가 화술의 예술성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대사를 쓴 작가의 ‘말버릇’- 말투나 화법도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작가가 구어체를 제대로 구사하고 있는가, 또 화법이나 말투가 인물의 성격과 일치 하는가 등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이런 재능이 없으면 당연히 좋은 음성화를 성공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교사는 배우가 목소리를 내면서 무슨 말인지 알고 말을 하고 있는가를 그의 표정이나 시선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실제로 배우들이 가장 어려움에 처하기 쉬운 과제여서 더욱 그렇다. 왜? 화술이 암기한 말이어서 자칫 이를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자칫 배우가 말의 의미를 모른 채 목소리를 내면 우선 화술에서 억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화술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다. 실제로 이건 배우의 발음상태보다 전달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장애자의 말을 듣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를 감지하는 것은 발음상태가 아니라 그의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배우가 자기의 가슴을 울리며 발성하는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의 코 공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화술교사에게는 ‘귀’ 못지않게 ‘눈’이 중요하다. 이것으로 배우의 근본적인 결함을 더 많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술교육의 핵심은 발성
화술에서 ‘발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상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갖고 말을 하기 때문에 중추신경이 저절로 작동해 발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기 말을 자기의 의지로 말할 때는 ‘발성’이란 용어는 무용하다.
하지만 대사를 암기해 이를 음성화하려면, 발성이 문제가 된다. 아니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자신의 중추신경이 저절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의 훈련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화술을 위한’ 발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의 중추신경이 저절로 작동하게 되면 배우가 일부러 ‘발성’을 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게 바로 중추신경이 작동하기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왜? 대사가 긴 문장의 문어체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번역극이나 사극처럼 지독한 문어체로 되어 있을 때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발성에서 중요시해야 할 것은 실제로 발성이 배우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다. 즉 배우나 성악가는 모두가 자신의 표현악기(인체)를 사용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발성능력이 표현력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 된다.
왜? 자신의 악기를 사용할 경우, 연주자인 배우가 자기 악기(목소리)의 성능으로 인해 강력한 자신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연주자가 자기의 내면에서 악기성능을 성능을 직접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현력을 가진 악기가 연주자인 자기 자신과 동일할 때만이 느끼는 감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초보자의 화술구사력은 대개의 경우 그의 발성기능이 좌우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게 정신적으로 배우의 이완이나 집중력을 뒷받침하고 있어서 그렇다.
극작가는 ‘작곡가’이다!
배우가 목소리에 리듬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가가 써놓은 대사의 리듬을 ‘판독’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배우들의 경우에는 작품의 내용분석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배우에게 대사는 ‘악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작가가 쓴 글말의 ‘내재적 리듬’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인물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그가 어떤 리듬을 구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즉 내용을 보고 말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리듬연구가 필수다. 즐겨 쓰는 어휘에서부터 화법, 말투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가령 어느 작가의 경우에는 리듬이 딱딱해 배우가 화술구사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는 것 등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 않다. 왜냐면 음악은 작곡가가 온갖 기호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가수에게 전달하는데 반하여 연극의 대사는 ‘연극적 기호’를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자기가 음성화할 대사에 스스로 기호를 제공해야 한다.
이로 인해 일면 표현의 영역이 넓어지는 이점도 있지만, 반면에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음성화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작가가 이에 관한 개념이 없이 글말을 구사하면 배우만 고생을 한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자연히 표현력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술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대사의 용도와 강조, 끊어 말하기 등의 휴지와 극작가의 대사의 구조, 화법, 말투 등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이게 ‘음성화’를 위한 가장 초보적인 작업이다.
즉 글말과 소리 말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 말을 일상에서는 어떻게 소리 내어 말하는가를 아는 것도 필수다. 왜? 언어행위는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말하기의 리듬형성을 알아야 한다. 즉 리듬의 3대 요소 – 억양, 강조, 휴지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이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언어행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목소리를 내야 해서 ‘발성’을 연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어째서 화술에 필요한 발성이 존재하는가를 공부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는 연기교육을 위한 용어를 통일해야 한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용어의 통일이다. 그래야 교사와 학생을 포함한 모두가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술교육에는 ‘골든타임이 있다
화술교육에는 ‘골든타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제때’에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스타니슬랍스키 할아버지의 어록에 보면 “연기는 학교에서 잘 배워라. 나중에는 (졸업한 후에는) 배우려고 하면 자존심이 세져서 배우기 어려워진다.”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정말 100여 년 전에 하신 말씀이 아직도 진리로 통하는 현실에 놀랄 따름이다.
왜 그럴까? 연기(화술)교육이 교육생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연기는 학생이 직접 해보여야 (실연을 해야)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에 ‘쑥스러움’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럼 왜 연기(교육)에서 ‘쑥스러움’이 문제가 되는가? 그건 바로 만인이 보는데서 연기를 해야 하고 ‘지적’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데 따른 ‘보호본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일반교육에서는 막말로 교사가 학생이 알아듣는 것에 상관없이 교육이 이루어져도 무방하다. 그러니 당연히 ‘쑥스러움’이 존재할 수 없다. 교사가 학생들이 학습 성과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눈으로 확연히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는 다르다. 모든 게 노출되고 확인된다.
이래서 나이를 먹은 프로배우를 교육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왜? 자꾸만 자존심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가 어릴수록, 즉 자아가 성숙하기 전인 조기교육이 필요한 게 연기교육이다. 이게 더 많은 효과를 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벌써 대학 2학년을 넘기면 후배들에게 평가받기 싫어져서 ‘자존심’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게 연기교육임을 알아야 한다.
이건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교수들이 자기 자신들을 돌아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들이 무대에 나서기 주저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노출시키는 게 부담스러워서다.
따라서 애초부터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교수들의 경우, 이런 이유로 연기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마저도 꺼리는 게 사실일 것이다. 이게 연기교육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연기교육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연기교육의 ‘방법론’이다. 즉 어떻게 하면 ‘자존심’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면서, 일상과 달라지는 연기의 특성을 찾아 교육할 것인가가 연기교육의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가르쳐야 ‘효과’를 극대화하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가를 심사숙고해야 하는 게 연기교육의 특수성이다. 동시에 교수들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연기교육의 방법론을 익힐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작금의 한국연기교육의 현실이다.
일본은 도제교육으로, 중국은 소련(러시아)의 영향으로 오래 전부터 연기교육이 정착한 나라다. 그런데 한국은 이도저도 아니어서 연기교육의 방법론에 관한 한 최악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세상에 연기교육이 당사자들의 자존심과 싸우느라고 발전하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는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왜 우리 모두는 연기술을 자신들의 자존심과 싸우느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화술교육의 경우에는 교사들이 자기의 ‘보고 듣는’ 능력 = ‘판단력’을 높이기 위한 조그마한 노력만 해도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연기교육은 되도록 ‘은밀하게 이루어져라!’ 하는 것이다.
- 되도록 조기교육을 실시한다.
-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방법론으로 ‘교수연수’를 실시할 수 있을 것인가?
- 가르치는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절실함을 먼저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
화술교육의 미래
화술교육의 미래의 목표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긴요한 것은 연극의 화술이 TV와 영화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를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처럼 ‘한류’로 요동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른바 연극연기와 매체연기의 통합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연극연기, 또는 무대연기라는 용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우선 대학교육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고, 한국의 연기가 제대로 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이 ‘졸업장’이라고 하는 ‘자격증’을 얻는 곳으로의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어서 연기교육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구체적으로 연극이 자연스러움을 얻고, 영상연기는 발성을 얻어야 한다. 연극연기는 대화체에 약하고 영상연기는 무대발성에 약한 연기를 연극대학의 연기교육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게 바로 대학의 연기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미 관객들마저도 TV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연기에 익숙해 있어, 이제는 연기가 발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단조롭고, 에너지가 없는 연기가 어떻게 연기예술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하면 연극은 영원히 ‘뮤지컬’에 밀려 낙후한 공연 장르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개선하지 못하면 연극대학의 연기교육은 조만간 멸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현실일 것이다.
- 오는 6월 20일 한국연극교육학회의 주관으로 화술학회창립을 위한 ‘화술교육과 역사와 미래’ ‘현장 화술코칭’ 등에 관한 세미나가 있을 예정이니 많이 참석하셔서 좋은 의견을 개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