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 재판에 회부되다: <카프카의 소송>
최하은
원작: 프란츠 카프카
각색: 공동창작
연출: 임도완, 이수연
단체: 사다리움직임연구소
공연일시: 2015. 5. 15. – 5. 31.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5. 28.
1998년에 창단되어 올해로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달려온 중견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철저한 트레이닝과 워크샵을 통한 움직임 연기 메소드로 신체극에 있어 타 집단과는 한 획을 긋는 공연예술집단이다. 때로는 무용 같기도 하고 때로는 마임 같기도 한, 실로 언어보다 웅변하는 신체 표현을 기반으로 무대 위에 고도로 정제된 회화적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러나 단순히 쇼잉(showing)으로서의 화려하고 참신한 움직임 에너지를 쌓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특수한 연기 메소드를 통해 어떤 정서와 의도를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다는 사실을 이들의 공연에서는 느낄 수 있다. 말 언어와 신체 언어가 무대 위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관객은 눈으로 보이는 감각 자극을 향유하면서 동시에 작품이 던지는 이성적,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이번 <카프카의 소송>은 이러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강점 중 특히 이성적, 철학적 기능이 극대화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전작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도 분절적인 여러 장면들의 몽타주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요제프 K라는 한 명의 주인공이 존재하며, 이 인물이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테크닉적인 장면의 해체와 반복을 제외하면) 거의 시간 순에 가깝게 배치하였으므로 관객이 전통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따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다.
평범한 은행 직원이었던 요제프 K는 어느 날 집안에 들이닥친 요원들에 의해 무작정 연행되고, 자신이 소송을 당해 재판에 회부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송을 건 사람도, 그 이유도 K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K를 연행하고 구타한 요원들은 자신들은 그저 말단 직원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이와 같은 부조리한 상황은 법원에서도 똑같이 이어진다. K는 법원의 판결을 거부하고 삼촌의 도움을 받아 변호사나 디자이너와 같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아 나서지만, 이들은 K의 무고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판결을 무한정 미룰 수 있는 방법만을 제시한다. K는 이러한 황당무계한 소송에 말려든 이들이 자신뿐이 아니며, 그들은 몇 년째 유죄 판결을 피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굽실댐으로써 차츰 인간성을 잃어가게 됨을 목격한다. 결국 K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으로 돌려보내지고, 얼마 후 또 다시 어떠한 예고도 없이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
이렇듯 줄거리를 설명해 놓고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해진다. K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기어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소송’과 그에 수반된 ‘재판’에는 그 어떠한 논리적인 까닭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K 당사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이유 없이 소송당했으며, 설명 없이 재판에 회부당했다.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내졌다가, 질문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죽임을 당한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배우며, 육하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서술하도록 훈련받는다.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에는 ‘왜?’를 먼저 물어야 하고, 근거가 없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것을 합리성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 인류의 본성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긴 역사를 보았을 때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오랜 세월 ‘이유 없이’ 닥쳐오는 천재지변에 대한 공포나 생로병사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유 없이’ 어떠한 절대자를 믿기로 했다. 처음에는 하늘이나 땅, 나무나 동물을 믿다가 곧 특정 인격적 개체와 이 개체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종교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중세 서구인들의 가치관을 구축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순종과 기다림, 더 나아가서는 낙관적 포기의 미덕을 배웠다. 현재의 삶이 불행하고 불합리할지언정 오직 그들의 절대자와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면 죽음 후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악인들은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세구복(來世求福)적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근원된 힘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어 소위 르네상스 운동이 태동하면서 인류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맞게 된다. 무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교회 권력은 몰락한 대신 강력한 군사력과 든든한 신흥 상인 계층을 얻은 개별 국가들이 부상하고, 여기에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건축, 회화, 조각 등의 예술이 앞 다투어 꽃을 피웠다. 철학은 신학의 충직한 하인 노릇으로부터 벗어나 신이 아닌 인간을 사유와 탐구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류는 더 이상 ‘이유 없이’는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을 수 없는 회의의 시대로 빠르게 이행한다. 더 이상 신이나 종교가 인류에게 일방적으로 무오류한 답을 내려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인류가 따뜻한 교의의 집을 벗어나 스스로를 막막한 황야로 내몰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키웠다는 뜻에서 분명히 ‘진화’였다. 인류의 벗은 이제 신앙이 아니라 합리성이었다. 혹은, 합리성에 대한 신앙이었다. 위대한 인간은 신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해 최대의 공공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 말이다.
합리성에 대한 신앙은 20세기 초엽에 무참히 깨어졌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시대이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출생한 유대계 체코인으로, 자신의 남매들을 포함한 가족들과 프라하 유대인 공동체의 사람들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절멸정책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것을 목격했다. 그 자신도 평생 차별과 병마, 대중의 몰이해와 싸워야 했으며, 끝끝내 승리하지 못한 채 요절했다.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시대가 그를 빠르게 휩쓸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치 독일은 그들만의 분명한 이유, 즉 인종과 종교, 사상, 성적 지향, 장애와 생활양식에 근거하여 살아야 하는 사람과 살아도 되는 사람, 그리고 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을 분류했으며, 그 분류 기준에 의거하여 살 자격이 없다고 판명된 사람들을 명쾌하고 신속하게 솎아냈다. 역사가 가리키는바 지구상에 나치 독일만큼 합리적으로 절멸 작업을 수행한 집단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합리성을 맹신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성의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신을 버리고 인간 자신을 택한 인류는 황야에서 길을 잃었다. 근대의 실질적인 끝이었다. 카프카는 2차 대전 종전 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부조리성이 하나의 사조로 조명받기보다 수십 년 앞서 이를 내다보고 작품에 반영한 선구자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리성의 신앙이 종말을 고한 카프카의 시대를 이렇게 공들여 설명한 것은, <카프카의 소송>에서 그려지는 K의 수난이 이 시대적 배경과 몹시 흡사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소송과 재판의 과정이 합리성을 철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K에 대한 압박은 외면과 침묵, 그리고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K에게 제공되는 운신의 폭은 무척 좁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법원의 높은 인사들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병든 변호사에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소송을 맡기면서 굴종하거나, 유죄 판결을 피할 편법을 종용하는 패션디자이너를 통해 눈앞에 닥친 위기만을 가까스로 모면하거나, 혹은 법원의 청소부로 등장하는 여자 레니가 주는 쾌락에 빠져 순간의 위로를 얻는 것뿐이다. 맞서 싸우고자 결심하는 K에게 레니는 의자를 밀며 달려온다. 당신은 벽에 부딪힐 거라는 외침과 함께. 이는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선택지인 듯하다. 복종하거나, 회피하거나, 외면하거나, 혹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거나. <카프카의 소송>이 오늘 이곳에서 공연되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K는 혹독한 고문 끝에 헐벗은 채 길로 내몰려진다. 테이블과 의자였던 대도구들은 업스테이지 중앙에 세로 방향으로 조립되어 ‘법의 문’을 축조한다. 푸른 조명이 내리깔린다. 배우들은 법의 문 뒤에서 문지기 역할을 맡고 있다. K는 울부짖듯 묻는다. 도대체 나의 죄는 무엇인가. 그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지기들은 대답한다. 너의 죄를 모르는 것이 너의 죄다. 이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는 너 외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만을 위해 만들어진 문이기 때문이다.
‘법의 문’과 K가 나누는 이 응수는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눈앞에 놓인 문을 깨닫게 한다. 이 문은 해석에 따라 수많은 함의를 갖겠으나, 작게는 부패한 권력이되 크게는 삶 전체이다. 극은 질문한다. 복종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혹은 K와 같이 죽음을 택할 것인가. 신도, 인간도 믿을 수 없게 된 우리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황야에 버려졌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합리성이 파괴된 사회에서 어떤 선택도 우리의 근원적 불안과 공포를 해소할 수 없다. 그 어떠한 결백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카프카의 소송>은 개인 요제프 K가 아닌, 우리가 그간 의심 없이 믿어왔던 합리성의 신화를 새로이 재판에 회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