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연출가들의 축제
– 2015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출품작들을 중심으로
김 향 (연극평론가)
한국 연극계가 들썩이는 큰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2015 제36회 서울연극제가 개최되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관람을 멈출 수 없었고 올해 ‘미래야 솟아라’ 프로그램에 출품된 11개 작품을 관람했다. ‘미래야 솟아라’는 10년 미만의 활동 경력을 지닌 신진 연출가들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경연 프로그램으로, 올해에도 신진 연출가들의 축제가 벌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11편의 출품작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드러내었고 고유의 연극적인 언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배우들의 신체 언어를 중심으로 오브제, 무대 공간의 다채로운 사용,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 그리고 주변인들의 삶을 형상화하는 다채로움을 볼 수 있었다.
1. 절망과 상처의 ‘치유’
이은진 연출의 <연옥>(아리엘 도르프만 원작, 극단 바바서커스)과 김선권 연출의 <소금섬의 염부들>(백석현 원작, 극단 창세 GPT)에서는 각각 ‘메디아와 이아손’, ‘소금섬의 염부들’이라는 상징적이면서도 내적인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몸의 언어’를 통해 서로의 ‘고통과 절망’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옥>은 ‘사랑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복수’를 저질러 ‘연옥’에 갇혀 있는 두 남녀의 내면을 세 쌍의 남녀 배우들(최자연, 유시은, 최주현, 김지수, 윤일식, 김승기 분)의 신체 언어로 보여주면서 이들이 점차 서로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아손의 배신’과 ‘메디아의 존속살해’라는 신화를 현대의 남녀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랑과 배신 그리고 상처와 복수’라는 것으로 치환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치유 과정’은 남녀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마치 심문하며 고문하는 듯한 ‘불확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됨으로써 이 갈등이 정치적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도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남녀 간의 용서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인 가해자, 역사에 오명을 남기며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켰던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의 깊은 내적 상처에 집중할 수 있는 서사의 힘과 ‘불확정적이고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세 쌍의 연인들의 몸의 언어로 인해 ‘치유’와 ‘용서’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금섬의 염부들>은 평범한 회사원인 듯하지만 학자금 및 일상의 빚에 쪼들려 절망에 빠진 한 젊은이(한재용 분)가 자살하듯 바다에 투신하여 죽기 전 염부에 의해 구조되고 염부들(임형준, 신민재, 정다빈, 김유리, 정준혁, 김영현 분)의 제의적이고 원초적인 생활 속에서 결국은 치유 받아 현실로 돌아온다는 서사이다. 이 작품은 무용연출가의 첫 연극연출작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으나 극적 구조에서 허술한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2. 창의적인 오브제 사용
마두영 연출의 <나는 바람>(욘 포세 원작,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과 박연주 연출의 <벚꽃동산-진실너머>(안톤 체호프 원작, 극단 마고)는 신체적인 표현을 강화하여 각각 ‘삶의 절망감’과 ‘위선적이고 고독한 삶’을 형상화한 작품들이었다. 이 두 작품들에서는 창의적인 오브제 사용으로 신체 움직임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나는 바람>에서는 ‘한 사람’(백종승 분)과 ‘다른 사람’(강희제 분)이라 칭해지는 두 인물의 행위가 무대 위 오브제 ‘시소’를 탄 채 이루어지면서 섬세한 내적 갈등과 리듬이 시소의 균형감과 원심적 이동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다만 서사의 흐름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공감대 형성에서는 어려움이 생기는 작품이었다.
이에 비해 <벚꽃동산-진실 너머>는 미니멀한 오브제들과 유모차 그리고 구두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사실적인 <벚꽃동산> 서사를 세 여인들의 현실 도피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을 드러내는 ‘유머스러운 신체극’으로 이미지화한 작품이었다. 다만 원작의 인물들을 라넵스카야(임윤진 분), 아냐(유효진 분) 그리고 바랴(정진숙 분)로만 압축시키는 과정에서 작품의 중추를 이루는 시대적 의미까지 삭제되면서 극적 재미가 축소된 측면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흑·백의 앞치마 디자인으로만 변용되면서 장 주네의 <하녀>를 연상시키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바람>과 <벚꽃동산-진실 너머>는 연출가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콘셉트를 최선을 다해 발현하고 있었으나 관객과의 소통에서는 다소 미숙함을 드러낸 작품들로 여겨졌다.
3. 가상의 미래 공간 형상화
최서은 연출의 <선샤인 프로젝트>(미하일 불가코프 원작, 극단 지구연극)와 변영후 연출의 <그것만이 내 세상>(변영후 작, 창작집단 몽상공장)은 공통적으로 인류멸망 시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절망감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선샤인 프로젝트>는 남성에게서 정자가 멸종되어 인류 탄생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를 남성으로 진화시키는 이야기이다. SF 공상과학적인 시·공간과 인물 변신을 배우들(서철, 한동희, 김희선, 김동휘, 박선정, 박민정 분) 신체와 여러 무대 장치들 및 조명 등으로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으나 결말이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채 끝난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에서 인간이 된 ‘선샤인’(박찬홍 분)이 인간들의 예상과 달리 ‘사랑’과 ‘분노’ 특히 부성애를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되는 것에서 박찬홍 배우의 연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인류 멸망 어느 시점에서 괴물들(김혁종, 이정수, 고경환, 이채, 조연희 분)의 득세로 살아 있는 인간들이 도망을 다녀야 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연극 배우 야생마(박정근 분)가 홀로 식품점 지하 창고에 숨어 살며 연극 연습을 하며 사는 중에, 창고에 숨어든 사람들(현진호, 서숙희, 김지명 분)을 만나고 그들과 다시 이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른 생존자들이 떠나가는 와중에도 야생마가 그 창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채롭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지만, 삶을 위협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연극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홀로 관객 없는 연극연습만을 되풀이하는 것이 자기 연민의, 자기 만족적인 행위로 여겨졌으며 세상과 소통하며 자기 고통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식이 드러나지 않는 퇴행적인 행위로 보였다.
4. 욕망과 폭력성 돌아보기
김수정 연출의 <인간동물원초>(손창섭 원작, 극단 신세계), 황선택 연출의 <휘파람을 부세요>(황선택 작, 극단 해적) 그리고 박진신 연출의 <손순, 아이를 묻다>(박진신 작, 극단 푸른달)는 각각 감옥에, 지하방에 그리고 삶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갇혀 있는 공간 안에서 죄수들, 마음의 불구자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욕망, 권력 그리고 폭력성이 드러나면서 그 극단적인 면모로 인해 관객들이 불쾌한 감정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감추어진 욕망, 다채로운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성에 무감각한 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그 현실을 돌아보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인간동물원초>의 경우는 관객들이 죄수들(김두진, 김정화, 김창규, 김형준, 나경호, 문지홍, 박경찬, 이창현, 조영우, 홍승안 분)과 간수(이형구 분)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동물’ 들여다보듯이 하도록 설정함으로써 역으로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동물들의 습성을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의 해설자(박준영 분) 설정과 연예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희극적인 장면의 삽입 및 대중적인 프로그램의 클리셰가 반복되는 것이 아쉬웠다.
<휘파람을 부세요>는 히키코모리이자 사이비 목사인 남편(김주완 분)과 시각장애인 아내(이지연 분)를 중심으로, 사실적인 무대 공간에서 거침없는 비현실적 서사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결말에서는 극단적으로 욕망을 드러낸 ‘아내’가 남편, 손님(김주헌 분) 그리고 형(차성만 분)에 의해 응징 당하는 것으로 처리됨으로써 세태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인식된다. 등장인물 형이 삼각팬티에 청테잎을 몸에 붙인 채 돌아다니는 등 기이하게 형상화되면서 배우 몸의 물질성이 강하게 부각되었고 무대 전면의 신문지 벽을 찢는 행위 등을 통해 시·공간의 자유로움이 표현되는 기발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변화되는 등장인물들의 성격 및 극적 행위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다소 무리하고 거친 설정이 단점으로 여겨졌다.
<손순, 아이를 묻다>는 동시대에 그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효’의 문제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무대 세트와 배우들의 몸 그리고 인형의 분절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었다. 과도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남편 손순(이재원 분)이 가족들의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몸이 아픈 자식 유하(인형, 임우영 분)를 땅에 묻어야만 하는 극단적인 현실이 그려진 작품인데, 유하를 땅에 묻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버지 손순의 폭력성으로 인해 오히려 ‘효’가 ‘가부장주의적 폭력’을 불러왔다는 것이 드러나는 듯했다. 치매 노모(조윤빈 분)를 둔 아들 내외(아내 오화연 분)의 고통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 안에서의 ‘효’는 역으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5. 삶의 한 단면의 형상화
윤성호 연출의 <외계인들>(애니 베이커 작, 극단 아어)과 주진현 연출의 <홍시 열리는 집>(김정숙 원작, 국민대학교 콘서바토리)은 각각 미국 사회의 낙오자라 할 수 있는 청년들의 현실과 1960~70년대 한국의 어려웠던 시절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사실적인 무대와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그대로 무대에 올려놓는 형태였다.
<외계인들>에는 소설을 쓰고 자작곡 노래를 즐기는 재스퍼(백석광 분)와 KJ(최순진 분)라는 두 청년이 늘 카페 뒤뜰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에 부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들에게서는 예민하고 섬세한, 상처받기 쉬운 그러나 우주적인 상상력이 가득한 정서를 볼 수 있었다. 이 청년들은 오히려 이러한 면모로 인해 사회에서 배제되고 무능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파티를 열고 동네 고등학생 에반(정새별 분)을 초대하는 등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만 결국은 약물남용으로 죽거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이 작품은 거대한 서사나 충격적인 사건을 전면화하기보다는 절제된 언어, 낮은 노래 그리고 침묵으로 폭력적인 (미국) 사회의 현실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홍시 열리는 집>은 정감어린 시골집 사람들(김수진, 김진주, 조중현, 양두환, 현예지, 정무린, 최해리, 오에바다, 양희종, 차지예, 정소희, 장석준, 이현종, 정봉수, 이창준 분)의 형상화로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시절을 그대로 복원하려 하는 과정에서 이 젊은 배우들의 특징이 부각되지 않은 듯하다. 젊은 배우들의 재기 발랄한 ‘재해석과 그 시대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구현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2015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에 출품된 작품들에서는 ‘신진 연출가들’의 다채로운 무대 언어 시도가 돋보이는 잔치였다고 할 수 있다. 작품 고유의 연극적 언어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는 연출가들도 있었으나, 일정 정도의 한계를 드러낸 연출가들도 있었다. 배우들 몸의 기술만큼 내적, 외적 표현의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작품도 있었던 것이다.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또는 성공한 기성극단의 공연 형태를 반복하는 구태의연한 면모가 엿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곧 극복될 거라는 기대감과 가능성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미숙하건 진부하건 간에 연출가들과 참여 극단들은 공통적으로 젊은이들의 삶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신들의 고민,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고유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