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나를 보라2>
라시내
공연장소: 미아리 예술극장
공연일시: 2015/07/25-26, 08/01-02
관극일시: 2015/08/02 오후 4시
나는 지금 어떤 연극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연극은 왜 연극인가? 연극이 더 이상 허구의 재현이 아니고 그래서 남은 것은 관객과 공연자의 마주함 뿐이라고 할 때, 그때 관객이 거기 있음 혹은 양자의 마주함은 어떤 의미인가? 연극이 ‘포럼’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포럼이면서 연극일 수 있는가 혹은 연극이면서 포럼일 수 있는가? 정치적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하는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 연극으로부터 떠오르는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 한 채, 우선은 어떤 연극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연극 <똑바로 나를 보라2>
연극은 ‘북토크쇼’의 상황을 가장하여 진행된다. 연극의 주인공 ‘나용자’가 자전적 소설 ‘똑바로 나를 보라’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무대는 밝게 밝혀져 있다. 북토크쇼 상황을 나타내는 현수막이 걸려있으며, 중앙에는 작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의자가 전면을 향해 놓여져 있다. 객석은 무대 위에까지 둥그렇게 놓여져 있다. 관객들이 우선 무대 위의 객석을 채우고 무대와 분리된 본래의 객석까지도 거의 꽉 채우고 난 후에야, 불이 꺼지고, 공연의 막이 올랐다.
공연장은 아직 어둡고, 스피커를 통해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제 일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스크린이 내려오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일터에서의 일화들이 두컷 만화 형식으로 보여진다. 서비스 시간 내내 같은 동물 모양을 터뜨리는 핸드폰 게임만 같이 하다가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하자~”하고 가버린 손님의 이야기. 제빵사 손님의 고환에서 신기하게도 빵맛이 났다는 이야기. 옆구리가 성감대인 어떤 손님은 서비스 시간 내내 옆구리만 간지러주다가 정작 섹스는 10분도 못 하고 사정해버렸다는 이야기. 자신의 소장품이라며 가학적-피학적 섹스를 위한 의상을 가져와서는 한 번만 입어달라고 부탁하길래 입어주었다는 이야기. 이어지는 목소리는 남성의 목소리이다. 게이 성노동자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건만남’으로 자신이 성판매를 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인터넷으로 구매자를 구하고, 약속을 잡고, 섹스의 방식을 정하고, 관장을 하고, 만나서 정해진 방식대로 섹스를 한다. 대구까지 오는 KTX 비용까지 내고도 15만원이나 더 얹어 주었다는 모 대학 교수라는 손님의 이야기…
‘성노동’에 대한 연극
그렇다. <똑바로 나를 보라2>는 성노동에 대한 연극, 제작부터 극작, 연출 및 연기까지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의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만든 연극이다. <똑바로 나를 보라2>는 작년 제 1회 인권연극제에 참가한 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극 <똑바로 나를 보라>의 ‘다른 버전’으로 만들어진 연극이라고 한다. 올해 제 17회 변방연극제에 공식초청작이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본격적으로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되면, 가상의 소설 ‘똑바로 나를 보라’의 작가 나용자와 북토크쇼의 진행자가 무대에 나오고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무대 위까지 놓여진 객석에 각자 앉아있던 세 명의 배우들이 ‘독자들’을 가장하여 대화를 시작한다. 여성인권 연구자, 노동권 연구자, 학부모로 분한 세 ‘독자들’은 성매매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한다. 성매매는 여성인권유린이다!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다! 사랑없는 섹스는 비도덕적인 것이다! 이들에 맞서서 나용자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성노동만 왜 노동이 아니냐! 성매매와 인신매매는 구분되어야 하며, 나는 그렇게 위험하거나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사랑없는 섹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작위적인 상황 설정에 주인공에 대립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도한 희화화까지 더해져서 사실상 의견의 ‘대립’은 전혀 일어나지 않지만, 논점들 만큼은 분명하게 제시된다.
성판매 행위는 ‘노동’인가? 성매매는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고 성별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가? 성매매는 윤리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가?
관객들의 토론으로 이루어진 연극
한참의 갑론을박(을 가장한 서로 부딪치지조차 않는 평행대립)이 이어진 후, 이제 연극은 본격적인 단계로 진입한다. ‘진짜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가상의 소설 ‘똑바로 나를 보라’에는 소설 속 주인공의 꿈 속에 나타나서 밤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진행자는 이 세 인물들을 지금 여기 무대 위로 소환해서 소설 속 장면을 재연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관객들이 의견을 내 줄 것을 제안한다.
세 명의 인물들은 각각 마르크스, 페미니스트, 플라톤으로 대변되며, 그들은 각각 성노동도 노동인가? 성매매는 여성인권을 유린하는가? 성매매는 비윤리적 혹은 비도덕적 행위인가? 라는 이미 제기된 논점들을 체현한다. (내가 참석한 공연에서는 페미니스트가 자꾸만 희화화되는 것에 대해서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낸 관객도 있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가 살아서 이 자리에 있다면 결코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텐데!’가 더 분통했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각의 인물들이 주인공 나용자와 짧게 말싸움을 벌이고 나면, 두 인물은 객석을 향해 묻는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은 제 말에 동의하시나요? 저 사람 말에 동의하시나요? 말하고 싶다고 손을 드는 관객에게 마이크가 전해진다. 세 가지 주제 각각에 대해서 약 두시간 여의 토론이 진행된다. 앞에서 말한 다른 관객의 말에 첨언하거나 반박하기도 하고, 새로운 시각을 지적하거나 앞서 제시된 시각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하면서, 관객들은 의견 개진을 이어나간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대학생, 섹슈얼리티 연구자, 집창촌에 가 본 경험이 있는 아저씨… ‘모두’가 토론에 참여를 하는 것은 아니고, 소수의 사람들이 자꾸만 마이크를 가져가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지만, 토론은 다문다문 이어진다.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흐린 듯 분명한 듯, 뜨거운 듯 미지근한 듯. 어쨌거나 모두가 듣고, 쳐다보고, 생각한다.
비범죄화라는 화두
세 가지 논점 모두에서 관객들의 의견이 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은 성매매의 ‘합법화’와 관련된 지점이다. 관객들은 산발적으로 계속해서 말한다. 성노동도 노동이라는 것, 알겠다. 여성만이 성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며, 성매매가 인신매매와 다르다는 것, 알겠다. 도덕적 판단, 각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매매를 합법화하는 것은 안 되는 것 아니냐?” 판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판단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유보하면서, 결국 판단해야만 하는 문제로서, 성매매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질문이 계속해서 돌아온다.
연극 초반에 나용자는 “사실 2004년에 언니들이 삭발하고 시위할 때만 해도…”라고 언급하면서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운을 띄운다.여러 층위의 문제들이 언급되고 또 “제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네요…”라고 회피되는 와중에, 나용자가 가장 소리 높여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성노동이 처벌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법의 현실이다. 폭력이나 부당한 행위를 당하면 당연히 경찰을 불러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는 그녀의 항변을 나는 이렇게 듣는다. 여기 지금 나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없어야 마땅한 것으로 규정된 것. 그러나 있는 것. 그래서 있어도 없는 듯 취급되고, 있어도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 그것이 있다. 잘 모르긴 해도 누군가의 주장처럼 그것은 없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없지 않으며, ‘있다’는 것이다. 수요 때문에 공급이 있는지, 역사적으로 있는지, 자발적으로 일하는지 비자발적으로 일하는지,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는지 명품을 사고 성형을 하려고 일하는지, 그 모든 배경들을 다 떠나서, 거기 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피와 살을 가진 그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이야기와 의미를 간직한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합법화냐 불법화냐의 논쟁을 우회하는 이 프레임의 이름은 ‘비범죄화’이다. 있어야 할 것,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 ‘합법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몸과 생존과 존재의 문제이며, 따라서 나의 존재 자체를 없어야 마땅한 것으로 비가시화하는 ‘불법’이라는 규정을 치워달라. 왜냐하면 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도둑도 살인자도 아니라, 단지 나의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사족이지만, 성노동 운동의 프레임에는 비범죄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합법화를 주장하는 프레임도, 또 어떤 프레임을 내세우기에 앞서서 민주적 공론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노선도 있다. 성매매특별법은 현재 헌법재판소 위헌법률심판에 회부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똑바로 ‘나’를 볼 수 있나요?
연극은 묻는다. 당신은 ‘나’를 볼 수 있나요? 나는 라시내입니다. 나는 학생입니다. 나는 연극 공연과 무용 공연을 좋아합니다. 나는 정치적 예술 혹은 예술의 정치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누구의 딸이고, 누군가의 애인이며, 누군가들에게는 좋은 친구,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썅년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는… 이 모든 것들 이전에 나입니다. 나라는 몸이라는 공간과, 이제껏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그리고 죽을) 시간, 지금도 막 살아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이라는 나로서 살아있는 나입니다. 당신은 ‘나’를 볼 수 있나요? 보고 있나요?
연극의 거의 막바지에서 어떤 관객이 물었다. “그런데 성노동자들이 섹스를 하면서 정말로 괴롭지가 않나요?” 나용자가 되물었다. “정신적인 고통을 말인가요 육체적인 고통을 말인가요?” 관객이 다시 물었다. “둘이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객석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고, 자신을 7년차 성노동자로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저는 전혀 괴롭지 않아요. 이건 개인적인 것이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질문에, 그 대답에. 나는 성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도 사실은 속으로 그렇게 묻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정말로 그것은 괴롭지가 않나요?”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폭력적인 질문이다. 나는 질문자보다 예의가 발랐던 것도, 사태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라, 다만 그것이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라는 것에 더 강하게 속박되어 있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머리를, 정말로 정말로 어려운 그 어려움이 다가와서 시원하게 한 대 후려쳤다. ‘멍청아, 잘난척 하지마!’
나용자가 공연 내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관객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순간에,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없었다. 카타르시스같은 것은 없었다. 가면 뒤에 있는 얼굴이 마침내 드러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가 가면을 쓰고 있든, 벗고 있든, 아마도 나는 그녀를 공연 내내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똑바로 보려는 쉼없는 간절한 노력 속에서조차.
글을 마무리하며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몇가지 질문들을 제기했고, 그 질문들을 뒤로 치웠다. 왜냐하면 그 질문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이 무슨 소용인가? 이 ‘연극’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이 연극이 무슨 ‘소용’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똑바로 나를 보라2>가 왜 연극 공연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가, 거기 모인 관객들이 왜 그 연극을 보아야 하는가 즉,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떤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경험을 주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들로 인해서, 나는 그것들을 뒤로 치웠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여기에 쓰는 이 글 또한 어떤 ‘소용’에 답하는 글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형식상의 수많은 문제점들과 공연을 결정적으로 실패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들이 있었다. 예컨대 공연 막바지에 ‘성매매가 성풍속을 해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관객의 절대 다수가 들고 있던 부채의 빨간면을 보이며 ‘아니오’라고 대답한 순간이 있었다. 진행자는 “관객감정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라고 기쁘게 말했지만, 그러나 그 순간은 정말로 슬픈 순간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의견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모인 사람들 외에 이 세상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본심을 이야기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다수가 이미 성노동이나 성매매특별법이라는 이슈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우리는 공연 과정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 합의의 순간은 과연 우리가 어떤 ‘소용’을 얘기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는가, 아니면 연극의 근원적인 ‘무소용’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연을 비판하기 보다는 공연의 의미와 취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공감했고, 그래서 그 공감의 내용을 내 글을 읽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까려면 얼마든지 신랄하게 깔 수 있지만, 그런 ‘까대기’가 과연 이 공연을 만든 사람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나눈 수많은 관객들, 그리고 수많은 성노동자들을 위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저 지금으로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공감을 전하고 싶으며, 전할 수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