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운하의 죽음/ 우상전

 

배우 김운하의 죽음

 

우 상전(연극배우)

 

연극배우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자, MBC방송의 PD수첩이 “가난은 배우의 숙명인가?”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다. 김동수선배가 교통사고로 망가진 얼굴로 병상에서 일어나 인터뷰하는 모습은 너무 처절해 울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프로를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곧잘 매스컴이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배우 강태기의 죽음에서도 우리가 경험했던 일이지만 방송이나 신문이 얼마나 우리를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게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우리 자신들도 모른 채 넘겨버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그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배우 김운하의 죽음만 해도 그렇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전혀 비전문가인 방송PD의 주장을 듣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연극인들은 관객도 없는 공연의 비평 등에는 열을 올리고 있을 뿐, 그런 작품들이 왜 관객이 들지 않는가, 또는 어떻게 해서 무대에 오를 수 있는가 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발언이 없다보니,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 의해서 연극계 현실이 심히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때는 (왜곡이 너무 심해) 연극계에 해를 끼치는 당사자가 일반인들에게 연극판의 영웅으로까지 둔갑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게 현실이어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먼저 왜 연극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배우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런 숙명이 배우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경제적 분배의 실패? 지원정책의 미비? 복지정책의 실패? 청년실업?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문제점인 것일까?

 

방송프로의 허구성

 

먼저 MBC방송의 ‘허구’부터 들춰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제는 이런 왜곡된 논리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순종(?)하는 자세를 더 이상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거대방송이나 신문이 우리를 향해 울도록 강요하면 그저 따라 울었고, 웃으라면 그저 웃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동안 ‘남의 시각’에 의해서 자신들의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프로에서 담당PD는 넌지시 우리 한국 땅에 예술에 관한 한 ‘복지’가 허약한 걸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그 예로 예술복지가 좋은 프랑스와 독일을 본보기로 들고 있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이도 우리는 프랑스나 독일의 처지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그럼 무엇이 다를까?

물론 이들 나라는 오래 전부터 사회전반의 보편적 복지가 발달한 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사회주의 국가’라고까지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어느 해인가, 우리는 프랑스 정부가 공연예술인들의 복지를 개선하려고 나섰다가, 공연예술가들의 반발로 인한 파업으로 그해 아비뇽여름축제가 취소되는 사태를 목격한 적이 있다.

이처럼 그들에게도 공연예술가의 복지에 고민이 많은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술가를 위한 복지를 분명히 선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선 이들 나라에는 우리처럼 TV드라마나 예능이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마디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게 TV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밤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예술을 공연하는 ‘극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들 나라에서 발달된 오락이라곤 오로지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에 이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영국만 해도 자료에 의하면 공연(극장)의 전체 입장수입이 영국 프리미엄 축구의 전체 매상보다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는 그들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밤에 연극(공연)을 보러 극장에 가지 않을까봐 엄청나게 ‘TV프로’를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TV가 밤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들도 우리처럼 TV프로를 재미있게 만들면 이런 수치는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고, 그들 역시도 연극배우들의 비참한 죽음을 심심치 않게 목도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을 참고하면

 

그들 나라가 공연과 공연예술가를 보호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사의 진화론을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

“최초의 포유류와 공룡이 등장하던 시대의 지구는 화산활동이 빈번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늘어나 지구온난화가 일어났고 대륙은 사막으로 변했다. 식물들은 말라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0%에 달했던 산소농도가 11%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오늘날 대기 산소 농도 21%에 비해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물들은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포유류와 공룡은 환경조건에 맞는 신체 구조였지만 그 이전부터 살고 있었던 거대 양서류와 파충류들은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이 땅(지구)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포유류와 공룡은 지배자가 되기 위한 경쟁을 시작한다.”

또 다른 대목도 소개해 보자. “100년까지 살던 공룡은 사라지고 수명이 2~3년에 불과하던 포유류는 살아남았다. 왜? 수명이 짧다는 것은 빠른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세대가 거듭될 때마다 돌연변이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수명이 짧을수록 진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건 결정적인 환경변화에서 용이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600만 년 전 공룡이 멸종할 때 포유류는 살아남아 진화를 계속했고 결국 이로 인해 인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끝없이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와 TV가 발명된 문명생태계의 변화에서 기존에 인간의 ‘밤 문화’로 생존을 유지하던 연극은 당연히 생태계의 변화에 의해서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어떤 나라는 연극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나라 같은 곳은 멸망하도록 그냥 방치를 했으니 당연히 한국에서 연극배우가 비참하게 죽는 참상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1. 연극은 하루에 1회 내지는 2회 공연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것도 밤으로만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일상에서 바쁘게 일하고 밤에 쉬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 영상매체처럼 필름 화 되어 하루에 5회 이상 상영하는 게 불가능해서, 매회 관객이 제한 될 수밖에 없어 흥행을 통한 생존을 도모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출연자에게 많은 개런티를 지불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는 구조다.

 

  1. 그것도 배우가 매회 직접 무대에 출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마저도 극장무대에 한정될 뿐이어서 관객들이 집이나 직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극장으로 직접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그러니 관객을 극장으로 모으기 너무 힘들다. 즉 영화관이 동네마다 있는 영화와는 경쟁이 불가능하다.

 

  1. 모든 극적표현이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져, 다른 매체와 비교해 이른바 콘텐츠를 개발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즉 영상매체만큼 자유롭게 콘텐츠를 개발해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히 ‘재미’를 주기 힘들게 되어 있다.

 

  1. 연극의 창작이 너무나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선생은 현대음악이 너무 어려워 미술(비디오예술)로 전향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처럼 예술은 장르에 따라서 난이도가 다른 게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연극의 텍스트가 되는 희곡의 창작이나 연극연출은 예술장르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장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연극이 쉽게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1. 거기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어려운 게, 연극대학의 교육수준이 타 장르를 따라가기 어려운 형편에 있는 게 사실이다. 연기술이 발레, 성악이나 악기연주와 달리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기 어려워 발전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점점 더 연극이 쇠퇴해 관객을 모으기 힘들다.

 

아마 프랑스도, 독일도, 영국도 점점 더 과학과 기술이 발달되어가는 시대에 연극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전혀 생존이 불가능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락보다는 인간의 가치 있는 생존을 위한 ‘예술’을 선택한 게 확실하다. 그래서 그들은 연극을 생존시켜 ‘밤 문화’의 중심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장르의 발전을 인위적으로 막고 있는 것일 거다.

그런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생태계를 그대로 방치하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연극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한국연극은 이 시대에 생존이 불가능한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렇게라도 연명을 하고 있는 게 기적이다.

가령 뮤지컬만 해도 미국이 원조지만, 이처럼 뮤지컬을 상업화시켜 활성화로 이끈 나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이다. 왜? 영국은 한때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던 적이 있다. 정부의 지원으로는 국립극단조차도 운영하기 어려웠던 게 현실이었다.

거기다 대처수상이 경제긴축과 예술복지를 축소하자 엄청난 생존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뮤지컬을 만들어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수출해 생존을 유지하려고 시도한 것이 뮤지컬의 활성화다. 그런데 이제는 이게 영국의 연극산업을 지탱하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연극은 (어느 나라에서든) 이 세상에서 사라진 공룡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게 현실이다.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을 위시한 많은 유럽 국가들은 연극을 마차 ‘천연기념물’처럼 보호하려고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전혀 보호할 여력도 없고 그 정도로 정신활동이 성숙되어 있지도 않아 그냥 방치해 버린 게 전부다. 그러니 연극에 종사하게 되면 자칫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런데 뚝하면 이를 그들 나라와 단순비교를 하는 것은 지독한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들 나라에서는 ‘영화’를 만들지 않으며, 영화가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한국영화가 베를린이나 깐느 영화제에 참가해 본선에 진출이라도 하면 난리를 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아예 영화를 만들지도 않는다. 이제는 영화를 만들 힘조차도 잃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로지 우리처럼 불쌍한(?) 나라,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어 자기들이 개최하는 영화제에 참가하도록 해서 관광수입만 올리는 못된(?) 짓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그들에게 매번 큰 상을 받아온 ‘김기덕 영화’가 한국영화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 되레 김기덕감독 화병(?)만 돋게 한 게 사실 아닌가!

그들에게는 오로지 순수연극, 무대공연인 오페라, 발레공연이 전부다. 그러니 그들 나라에서 연극배우(연극인)나 무대공연자들에게 복지를 베풀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 공연예술가들이 그들의 삶, ‘밤 문화’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도 우리 연극이 우리의 ‘밤 문화’를 장악해 우리의 삶을 영위케 하면 우리 정부가 우리 연극인을 이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방기하겠는가!

 

정말 각성해야 할 곳은 방송국

 

따라서 MBC는 방송을 통해서 먼저 한국의 문화생태계의 저급한 ‘날라리’(?)풍토를 개탄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게 옳았다. 자신들의 죄(?)는 숨긴 채 자꾸만 국가의 복지정책만을 탓하며, 연극인들을 자극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것만 쳐다보며 비탄 속에서 TV화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현실감각도 없이 말이다.

따라서 방송PD는 먼저 TV방송이 우리의 ‘밤 문화’를 장악하므로 해서 얻는 이득을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공연예술과 나누어야 하는 ‘자기반성’부터 시작했어야 옳다.

어쨌든 연극배우들이 배를 곯아가며 성장해, 결과적으로 TV드라마의 조, 단역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게 개념 있는 방송인의 태도일 것이다. 그래야 연극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극인들도 매사에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를 수시로 들면서 그들 정부의 공연예술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과 그들 국민들의 ‘참을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그들 나라에서는 어째서 ‘아이돌’이 탄생할 수 없는가를 이제라도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매사에 정부의 복지정책만을 항상 들먹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국민들에게 우리를 ‘거지근성’으로만 보이게 할 뿐이라는 것을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댓글도 “지 좋아서 하다가 죽은 걸 어쩌라고?” 이런 투인 게 현실이다.

솔직히 우리 연극인들은 너무나 무지해 싸구려 정치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물론 복지정책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형국에 아무리 복지정책을 잘 편다 해도 연극은 살아나기 힘든 게 현실일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거지궁상’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거다.

서울시장이 한국연극을 돕는 게 ‘메르스병원과 의사’를 한밤중에 공개할 만큼 자신의 대선가도에 (연극이)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면 우리 서울협회를 이렇게 박대하겠는가!

연극이 우리 국민의 ‘밤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면 대통령이 공연을 관람하고 말로만 ‘문화융성’을 외치고 돌아가겠는가!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사회체제와 삶의 가치가 바뀌고 달라지지 않는 한, 보수든 진보든, 또 아무리 5년마다 정권이 바뀌어도 연극은 지금과 조금도 달라질 게 없을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솔직히 우리나라 방송들이 너무 뻔뻔하기조차 한 게 사실이다. 자신들이 ‘밤 문화’를 장악하므로 해서 얻어지는 많은 이익을, 대기업인 방송국이 겨우 ‘골목상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연예술을 위해, 그리고 자기들에게 중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집단에 고마운 생각을 조금만으로도 갖고 있다면 공생과 상생의 필요성을 역설했어야 백번 옳다.

우선 얄팍한 한국의 문화풍토를 질타한 다음에, 호의호식하는 대기업(방송국)이 윤리경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일침을 가했어야 옳다. 즉 순수예술을 위한 공생과 상생의 개념마저 없는 한국의 문화대기업의 인식과 이성에 대해 반성이 있었어야 옳았다. 재벌 등에는 악담을 서슴지 않는 진보인사들마저도 방송의 파급력이 무서워 그런지 그들의 횡포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연극배우에게 가난과 비참한 죽음이 숙명일 수밖에 없는 것은, 프랑스와 독일과 달리 우리 사회의 문화체제가 엉터리임을 힘주어 말했어야 옳았다. 이제라도 우리 자신부터라도 뼈저리게 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 더욱더 가난이 우리의 숙명으로 굳건히 자리 잡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무엇이 우리의 부족함인가?

 

당연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그럼 연극배우들이 어떻게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오래 전부터 ‘가난’이 숙명이었던 현실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현실에서) 어떻게 연극배우들은 그동안 연명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복지? 물론 아니다. 그럼?

이는 너무나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을 가진 ‘가족’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연명이 불가능한 게 연극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니까 부모형제 또는 배우자 등의 도움만 있어서도 배우 김운하는 남부럽지 않게 연극인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인들에게 ‘가족’은 너무나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연극인들에게는 이마저도 쉽게 행운(?)이 따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왜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대학입시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용(발레)이나 성악(악기연주) 등을 살펴보면, 우선 부모의 경제력이 빈약하면 이런 장르를 전공하기로 마음먹기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왜? 이런 장르는 레슨비에서부터 연극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들은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해야 하는데다 레슨비마저도 엄청나게 많이 든다. 따라서 부모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하면 당연히 지망생이 이런 장르에 진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마저도 부유하다.

국립극장시절 나이든 어느 무용단원이 나에게 이런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무용을 하지만 너무 돈이 많이 들어 내 딸에게는 무용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며 씁쓸해 한 적이 있다.

그에 반하여 연극은 ‘가족’의 경제력이 그게 걱정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국립극장시절을 회상해보면 외제차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용단원들이었고, 국립극장을 ‘뚜벅뚜벅’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대개 극단단원들이었다.

그러니까 후원자이자 스폰서(?)인 ‘가족’에서도 장르에 따라 분명한 빈부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연극배우들에게 당연히 ‘가난’이 숙명일 수 있는 공산이 큰 게 현실이다. 문화체제상 자생할 능력이 없는데다 가족마저도 가난해서 자칫하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공산이 큰 게 부정할 수 없는 연극인들의 현실이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고 연극인의 ‘가난’이 마치 별스런 것처럼 다루는 방송PD가 답답할 뿐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현실만이 아닌 연극인, 연극배우의 기본적이고 구조적인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다. 왜? 방송에서라도 제대로 말해 주어야 연극인들 자신들마저도 현실을 손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연극배우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어른들은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막지 못한다!” 즉 가난은 극히 개인적인 사안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논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즉 정치적으로 해결이 충분한 것처럼 인식된 게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는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복지가 정치의 최대이슈가 되고 있다.

이런 사고의 전환을 유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일 것이다. 그는 새마을노래를 지어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를 외치고 이게 ‘산업화’의 결실을 가져 와, 이제는 경제발전을 이루어 마음 놓고 복지를 외치게 된 게 사실이다.

오바마대통령마저도 자기 고향인 케냐에 가서 “한국을 보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다. 일본 오사카로 ‘우루왕’을 갖고 공연을 갔을 때 내가 목격한 현실이다. 체류기간에 구경삼아 오사카성(城)에 올라간 적이 있다. 그때 놀라웠던 것은 (오사카성이 아니라) 성 주변의 숲 속에 널려있는 노숙자들의 천막이었다. 숲에 파란색으로 일관되게 쳐져 있는 노숙자들의 잠자리를 보고 너무나 놀랐다.

우선 그 많은 천막의 수에 놀랐고, 당시 경제2대국이던 일본의 숨겨진 사회현실의 이면을 보고 너무나 놀랐던 게 사실이다. 나처럼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그저 충격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잘 사는 일본에 널려있는 노숙자 천막! 어찌 이런 나라에 이토록 많은 노숙자들이 숨어있단 말인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서울 남산’이 송두리째 노숙자의 천막으로 뒤덮여 있는 꼴이었다.

여기서 나는 자본주의의 실체를 보든 듯 했다. 아마 노숙자가 없는 나라는 공산주의를 고수하는 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다 같이 잘 살지 못한다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자본주의의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복지정책’에 많은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정부의 복지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말 가난은 ‘개인’의 문제인가? 정말로 복지정책으로 이를 개선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연극인들의 가난도 영원히 숙명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연극인에게 가난이 숙명이라면?

 

지금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12위권에 (혹자는 11위라고 하기도) 있는 나라라고 한다. 그리고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국가 중에서는 경제 순위가 7위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이런 평균적인 통계수치만으로 연극의 가난이 해결되기는 힘든 게 사실일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가 개입하게 마련이어서 그럴 것이다. 거기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연극인들이 예술가를 위한 복지를 거론할 처지에 있지도 못하다. 왜? 연극이 이들 나라처럼 ‘밤 문화’를 장악하지도 못해서 당연히 국민의 관심을 끌기도 힘든데다, 도움을 받을 부류가 넘쳐날 정도로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올봄 미국의 성공한 영화배우인 로버트 드니로가 뉴욕대학의 졸업식에서 연기를 전공한 후학들에게 명연설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졸업생에게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부터가 ‘생존’의 시작이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하는 선배가 있어야 한다. 정치 또는 진보적인 경제정책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서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처럼 곧잘 얼버무리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선배들은 연극인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나라의 ‘복지정책’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청년실업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연극은 근본적으로 ‘일자리’ 자체가 없어, 청년실업이 해소되어도 당연히 연극배우들은 이에서 예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선의 방법은 우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사용되고 있는 ‘지원정책’을 우리가 가장 합리적으로 운영하는데 머리를 쓰는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원정책’을 잘 활용해야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바로 지원정책의 효율성이다. 지금 우리는 지원정책을 마치 연극인들을 위한 ‘복지정책’으로 혼동하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적으로 지원정책이 복지정책과 다른 점은, 지원정책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지원은 복지와 다른 ‘선택과 집중’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지원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지금처럼 연극을 위한 지원을 복지정책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보편적인 복지정책으로 이해해서는 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연극을 절대로 되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지원은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예술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밥 먹기’ 어려운 사람에게 생존을 위해 베푸는 복지를 지원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원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지원정책’의 실패를 따지면 이런 대답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왜 지원을 받는 사람만 받습니까? 골고루 공평하게 나누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듣지 않으라고 지원에 공평성을 이루다보니 지원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되레 연극인들을 탓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건 지원정책이 아니다. 물론 이런 말을 듣는 게 두려워 어떤 명확한 룰도 없이 일관되게 정책을 펴지 못하는 그들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지만, 무조건 지원책을 일관되게 나누어주는 ‘보편적인’ 복지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연극인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단적으로 지원은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미래에 성공할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예술가를 지원하는 게 옳다. 그리고 연극인들은 이런 가능성과 성과를 내보이고 지원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지원기관과 기관원은 문책을 당해야 한다.

“왜 쟤는 주면서 나는 안 줍니까!” 또는 “지원금을 받으려면 로비가 필수야” 지원기관도 “이게 우리 돈이냐, 아니잖아, 좌우간 말썽나지 않게 잘 나눠줘!”

솔직히 말하면 그나마 몇 푼 되지도 않는 돈마저도 이런 개념과 사고방식으로 지원정책을 폈으니 연극이 그동안 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연극의 미래도 연극의 발전도 불투명한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지원정책과 집행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전화해서 “내일 심사가 있는데 가능하십니까?” 이렇게 해서 심사가 이루어져서는 희망이 없다. 지난번 서울연극제 대관심사처럼 끊임없이 분란만 날 뿐이다.

어느 기업인의 충고

 

어느 성공한 중소기업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돈의 쓰임새에 민감한 사업가의 말이어서 우리도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가 2002년 이후 중소기업 지원을 늘리고 대기업은 옥죄면서 되레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의지를 꺾고 있다.” 그는 “‘도와주면 잘할 수 있다’는 식의 정치논리는 결국 기업을 ‘지원’에 기대게 해서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을 다 망하게 하는 꼴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은 표도 좋지만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 솔직히 지원이 성공보다는 외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연극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하던 시절에 비하면 정말 많은 면에서 지원이 좋아진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연극은 조금도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말 지원은 무용한 것인가?

이는 단적으로 연극의 지원정책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지원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연극의 현실에서 지원정책이 실패하면 아무 것도 건질 게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현재 연극의 자화상이다.

지금과 같은 지원방식으로는 연극은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왜? 연극이 현실에 적응할 ‘진화’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공룡처럼 지구상에서 멸종하지 않으면 다행일 처지에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연극인들의 ‘고령화’마저 심화되어 생존주기가 길어져 진화를 통한 ‘돌연변이’를 기대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사회변화가 빠른 시절에 연극의 대학교수의 정년이 어떻게 65세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모두가 노후를 걱정해 연극작업은 하지 않고 대학교수만 될 궁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점점 더 연극인들의 생존이 길어져 ‘돌연변이’의 탄생에 의한 진화도 멀어져가고 있는데, 지원정책마저도 복지정책이 되어가고 있으면 이 시대에 연극의 생존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배우의 죽음을 앞에 두고 보다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