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과 예술매체와 검열
이재진(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 서론
2차 대전이 끝난 후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돌아온다. 동독과 서독 중 어느 곳으로 가야 좋을 지 갈림길에 서서 망설였다. 서독에 가면 자유롭지만 많은 경쟁을 벌려야 한다, 그것보다도 서독은 미군정 하에 있었기에 피하고 싶었다. 동독으로 가면 경쟁도 거의 없고 동독당국은 브레히트에게 자유로운 연극 활동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극단과 극장설립(Berliner Ensemble)을 약속해 주었다. 서독과는 반대로 하지만 무대의 자유는 자신할 수 없었다. 스탈린상을 받고 동독국가훈장을 받은 브레히트는 걱정한대로 연극무대에서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동독 정권은 끈임 없이 브레히트의 연극에 개입해서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감탄하며 한탄하며 탄식했다.
아, 이 세상 어느 나라에 이렇게 연극에 깊은 열정과 관심을 가진
높은 공무원이 있단 말인가?
예술작품이나 공연활동에 대한 검열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검열과 같은 법적 통제는 종교적 이해관계는 물론 정치적 선전목적 즉 프로파간다, 청소년 윤리보호차원 등 여러 측면에서 시행되었다. 검열은 이와 같이 정치적, 종교적, 도덕적 영역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국가행사였다. 연극무대는 온 나라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장이었고 헬레니즘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었다. 연극무대는 대중을 하나로 움직이고 화합시킬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연극은 점차 혹은 늘 주위여건 즉 정치적 환경변화에 영향을 심하게 받으며 때로는 저항하지만 때로는 예속되며 때로는 타협했다. 결국 언제나 연극예술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중세 교회가 학문과 예술에 대해 행한 간섭과 검열은 가혹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종교재판소 문제로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교황청의 눈치를 보느라고 지동설을 골자로 한 원고를 출간하지 못하고 20여년이나 망설였다. 천문학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천체궤도의 회전에 대하여]란 자신의 책을 코페르니쿠스는 임종의 순간에야 비로소 힘없이 잡아보았다. 갈릴레이는 사정이 달랐다. 종교재판소에 시달린 역사적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택감금 속에서 온갖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갈릴레이는 현대천문학의 기조가 되는 ‘디스코르시’를 완성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이나 연극은 인간을 교육하고 교화시키고 의식수준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실러는 연극무대를 “도덕적 산실”이라 부르며 연극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그리스 연극이 그리했듯이 18세기 19세기 유럽연극의 위상과 영향력은 대단했다. 1782년 실러의 [군도]가 만하임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4시간의 뜨거운 무대가 끝나고 막이 내리자 감동에 휩싸인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비틀거리며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작품이 던져주는 자유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너무나 강렬했다. 1889년 베를린에서 하우프트만의 자연주의 극 [해뜨기 전]이 무대에 올랐다,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구세대, 신세대로 갈리어 서로 야지를 놓고 심지어 난투극까지 벌렸다. 연극은 느끼고 즐기는 한낮 예술행위에 머물지 않고 한 세대를 대변하고 한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힘을 키우고 있었다. 연극은 명실상부 정치적 사회적 매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연극매체의 기능과 역할은 점점 더 섬세해 지고 논리적이고 의식화 되었고 더욱 세력화되었다. 이에 비례하며 정치권이며 종교계는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됨은 물론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무서운 감시의 눈길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
검열제도가 없어진 나라도 많이 있다. 독일의 경우 기본법에 검열통제는 없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 형태만 바뀔 뿐 서실은 여전히 검열제도는 이어지고 있다. 물론 모두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공정하고 지혜롭게 이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악용해서는 곤란하다. 예술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상황을 보면 그 나라의 정치수준, 시민의 의식수준 등이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 독재정권이나 정당성이 결여된 정권일수록, 그에 비례해 대중매체를 감독하고 손아귀에 넣어 자기들 입맛에 맞추려는 의지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에 와 있을까? 서울연극제가 위기에 처했다. 부산영화제가 사전검열로 위기에 빠졌다. 그간 우리의 독재자, 위정자들은 영화나 연극이란 예술매체를 활용하거니 이용하려는 생각보다는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려들었다. 우리는 80년대까지 연극공연을 하려면 공연대본 다섯 부를 각 담당부서(문교부, 경찰서, 정보부, 연극협회, 공연장 등)에 제출하고 허가와 감시를 받았다. 대본을 받아보면 공연 시 대사를 고치라고 밑줄을 긋거나 삭제하라고 빨간 줄을 그었다. 관리들은 충성을 바치듯 시키지 않아도 솔선수범하며 더욱 열을 올렸지만 세계연극의 흐름에 무지했던 일부 전문가(주로 교수들)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빨간 펜을 휘둘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거나 그곳에서 죽었다고(예를 들면 브레히트) 그분들의 작품이 모두 사회주의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아니(었)다. 우방의 작가(예를 들면 뒤렌마트)라고 해서 그분들의 작품이 모두 일부 교수들이나 관리들이 생각하듯 우리 정치체제에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술매체와 검열이란 큰 제목아래 몇 몇 작은 주제를 찾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그리스연극과 검열,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 등 검열의 역사/ 동서양의 분서갱유 / 중세기 종교(기독교)와 검열 / 러시아 혁명과 연극 / 나치와 연극/ 브레히트와 동독당국/ 베데킨트와 룰루-괴기비극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과 검열(성과 도덕) 등 등. 몇 번에 나누어 실을 예정이다. 이들 주제들을 시대적인 순서에 따라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다음 “나치와 연극”부터 시작할 것이다.
정말 기대됩니다. 우리에게 좋은 양식이 될겁니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자리가 되게 해 주십시요. 저는 저의 경험을 글로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