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아리랑/ 정명문

멈춰진 역사, 풀어야 할 과제

– 뮤지컬 <아리랑>

 

정명문(뮤지컬평론가)

 

 

원작 : 조정래

극본 · 연출 : 고선웅

작곡 · 편곡 : 김대성

출연 : 서범석, 안재욱, 김우형, 카이, 윤공주, 임혜영, 김성녀, 이소연, 이창희, 김병희, 박시범, 함건수, 최명경, 류창우, 정찬우, 한동규 외

제작 : 신시 컴퍼니

공연일시 : 2015.7.16.~9.6.

공연장소 : LG 아트센터

관극일시 : 2015. 7. 26.

 

일제 강점기, 반복되는 복원 지점

 

일제 강점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덕혜옹주>, <영웅>, <아리랑>, <명성황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대화되고 있다. 이들은 당대를 불우하게 보낸 이에 대한 ‘기념’ 혹은 ‘애도’의 헌사로 채워져 있다. 뮤지컬이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음에도 이 소재만큼은 ‘애국심과 교훈’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20여 년 전 작품이나 근래 만들어진 작품이 등장인물만 다르고 비슷한 갈등과 해결을 보여준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다루는 배경이 제한적이라 하기엔 해당 시기는 멀어졌고, 향유층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암살>의 경우 같은 시대를 다뤘지만 독립 운동가와 친일파를 기존과는 다르게 호출하면서도 각 세대들의 상상력을 만족시켰다는 것을 본다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뮤지컬 <아리랑>은 개화기부터 1920년대까지의 민초들을 그린 작품이다. 올해 일제 강점기를 그린 작품 중 유일한 신작인 이 공연은 제작단계부터 기획, 노래, 무대, 연출 등의 차이를 강조했었다. 일단 이 작품은 각 요소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라이센스 뮤지컬 제작 노하우가 담긴 세련된 기획, 우리의 소리, 민요에 전통악기가 화려하게 활용된 곡에서는 오랜 담금질의 결실이 보인다. 또한 스크린을 활용한 빠른 씬 전환과 벽면까지 활용한 무대 그리고 연극적 연출 등 이전 대형 작품들 보다 분명 진일보 된 부분들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따로 떼어보면 훌륭한 방식들이건만 그 서사는 새롭지 않다. 힘없는 자의 한, 영웅, 애국심 등은 국립단체 공연에서 늘 보여주던 정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심서사는 질곡의 세월을 버텨내는 여인들의 수난사이다. 시각 표현이 세련되었음에도 유사한 키워드만을 반복하는 현상은 한국 대형 창작 뮤지컬이 해결해야할 숙제 중 하나이다. 뮤지컬 <아리랑>을 통해 대형 뮤지컬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해보려고 한다.

 

스펙터클과 감상의 이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쟁기질 하는 봄, 차득보와 방수국은 서로 좋아하고, 양치성은 수국을 바라본다. 송수익과 차옥비는 마음으로 서로 연모하고, 감골댁은 아들 방영근을 빚 때문에 하와이 농장에 보낸다. 개화사상을 지닌 양반 수익은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승려인 공허도 항쟁에 뛰어든다. 수익의 머슴이었던 치성의 아비는 동학군의 동태를 일본에게 알리다가 의병의 죽창에 찔려 죽는다. 아비의 복수를 위해 치성은 일본 밀정의 길을 걷는다.

한편 감골댁의 딸 수국은 정미소 관리관 백남일에게 겁탈당하고, 득보는 이를 복수하다가 감옥에 끌려간다. 치성은 수국을 빼냈으나 그의 마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옥비는 오빠 득보를 위해 감찰국장 고마다의 첩이 되며, 수익은 가슴 아파할 뿐이다. 결국 득보는 고마다를 죽여서 옥비를 구하고, 식구들과 함께 도망친다. 한일합병으로 절망에 빠진 의병들은 식솔을 데리고 만주로 떠나며 여기에 감골댁 가족도 합류한다. 수익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치성도 같은 기차에 오른다.

영근은 이국땅에서의 애환을 편지로 드러낸다. 그는 풍토병에 친구들이 죽어나가고, 노예 같은 삶을 살지만 한인회도 결성하고 독립군에 자금을 보내는 등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매번 표현한다. 꼭 돌아가고 싶었던 그는 결국 결혼을 하면서 정착한다.

만주에서는 토벌대의 살육이 자행되며, 치성은 수국을 빼돌린 후 감골댁을 죽인다. 치성의 아이를 가진 수국은 한참 뒤에야 그가 원수임을 알고 복수를 꾀하나 실패하고 떠돌다가 결국 사산아를 낳는다. 독립군의 관동군 사령부 폭파계획이 실패하면서 수익이 잡히게 되고 그를 치성이 고문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수익의 공개 처형 날 독립군과 일본군이 대치하면서 치성, 수국, 득보, 일본군들이 죽고 마지막은 모든이가 아리랑을 부르며 용서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와이로 노역을 떠난 큰아들 영근(박시범)과 감골댁(김성녀)

 

<아리랑>은 12권짜리 소설이 원작이다 보니 각색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어떤 서사를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에 따라 그 색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감골댁 가족의 수난을 선택하였고, 대립의 끝에 치성을 설정한다. 치성과 엇갈리는 수국과 수익의 시선은 당대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나름의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동학군과 수익, 민초의 서사는 집약되지 못하면서 1막은 배경, 사건, 인물 등을 보여주는데 치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스토리 전달이 많아지면 장면들은 설명위주가 되어버린다. <아리랑>은 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무대를 빠르게 전환하고 아날로그 식 무대 장치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문명화된 일본은 총칼을, 우리 민족은 목검과 쟁기를 들게 하여 차가움과 부드러움이라는 시각적 대비도 보여준다. 일본인의 모습은 극도로 과장되어 있는데 종종걸음의 게이샤, 원숭이 같은 군인들, 미와시(일본식 삿바)만 걸친 사내 등 인공적이지만 야만적인 일본인은 확연히 무대화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쇼 스타퍼를 성취하지 못했다. 너무 과장된 표현들로 극과 유리되었으며, 그 거리감으로 인해 관객들은 웃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리랑>에는 대부분 평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감정상태가 예측 가능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치성이다. 그는 종이었던 과거를 지우고 대접받으려 애쓰지만 결국 이용만 당하며, 상처를 덮으려고 노력하지만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어디서든 인정받으려 애썼던 치성은 현대인에게는 악인이기 보다는 납득될 수 있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다. 그에 비해 수익은 동학운동, 독립군 운동, 옥비를 잃은 아픔 등이 상류층의 평면적인 고뇌가 되어 민중과 함께 있기 보다는 교훈자의 역할에 머무른다. 결국 치성과 수익의 대립은 강력하게 형상화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한 재미도 부족해졌다. 이로보아 사건 위주의 큰 그림 제시도 필요하지만, 인물의 심리적 이유를 잘 풀어내야만 감정의 울림도 커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에서 민중의 삶이 가장 자연스레 드러난 인물은 영근이다. 그는 극의 외부에서 제 3자의 시선으로 당대를 그려낸다. 영근이 있었기에 이 땅에서 살지 못하던 이들의 한이 아리랑의 기본임을 극 중간 중간에 환기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는 힘든 일상을 버텨나가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영근이 가족들에게 부치는 편지가 전부 대사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영근의 테마곡으로 형상화 하거나 혹은 그에게 파이널 곡 일부를 담당하게 했다면 이 작품의 최종 목적인 “애이불비”는 확실히 살아났을 것이다. 그에 비해 감골댁은 늘 보아온 우리네 어미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이 강하다. 어떻게든 내 자식을 지켜보려고 하고 주어진 현실에서 바른 목소리를 내던 그녀는 결국은 죽게 된다. 뒤돌아 앉은 모습으로 형상화 된 그녀의 죽음은 크게 부르짖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힘을 주는 캐릭터를 잘 살려내었다. 이렇게 <아리랑>의 인물 구현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송수익(서범석)과 의병들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

<아리랑>에는 아름다운 곡들이 많다. 이육사의 ‘절정’과 김수영의 ‘풀’ 등 잘 알려진 시들이 ‘찬바람’, ‘풀이 눕는다’, ‘절정’ 등의 넘버로 만들어졌는데 시의 상징성이 어렵지 않은 멜로디 라인으로 절묘하게 넘버화 되는 동시에 작품의 주제의식도 구현하였다. 특히 ‘풀이 눕는다’의 경우 각기 다른 세 소리(옥비의 창, 민초의 합창, 수익의 고함)가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아픔의 면모를 극대화시키기도 하였다. 억장이 무너지는 모습을 ‘아’로만 제시한 ‘아의 아리아’는 우리 식의 감정표현을 잘 녹여낸 것이기도 하다. 각 막의 파이널 곡(‘어떻게든’, ‘진도아리랑’)은 앙상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민중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작품을 기억나게 하는데 기여한다. 전반적으로 국악 선율을 살린 넘버들이 작품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며, 여기에는 정확한 가사 전달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아리랑>은 아직 뮤지컬과 음악극 사이에 위치한다. 뮤지컬은 음악으로 다양한 감정들을 전달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슬픔, 한’에 대한 감정만 강하게 제시한다. 앙상블의 합창은 감정의 폭발을 보여주는데 적합하지만 직전의 과정 대부분이 생략된 데다가 대화로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송스루가 아닌 음악을 많이 활용한 극이 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과다한 보여주기로 인한 부작용이다. 이야기를 단계적으로 전개하되 감정의 선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노래가 활용되었어야 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각 장면에 빠져들기 보다는 따라가기 바쁘다. 2막의 경우 장면과 노래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연스레 감정을 울리는 부분들이 많아지는 데, 이는 완급 조절을 어느 정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진달래와 사랑’, ‘꽃이여’, ‘어미와 딸’처럼 감성과 장면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곡들이 더 많아져야 이 작품은 뮤지컬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산 이와 죽은 이가 모두 일어나 ‘진도 아리랑’을 부른다. 죽은 일본군인들은 득보와 수국이를 위해 상여를 메고, 옥비는 자결하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눈을 편안히 감겨주면서 경계와 구분, 갈등을 무화시킨다. 소리꾼은 상여가를 부르면서 죽은 배우를 다독이고, 어울렁 더울렁 춤을 춘다. 이쯤 되면 과거와 화해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주제임을 누구나 알게 된다. 이때 관객들은 손수건을 쥐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바쁘다. 이러한 방식은 예전 악극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있다. MD상품으로 손수건이 팔리는 것도 악극과 흡사하다. 하지만 눈물과 감동은 동일한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한판 울어버린 것으로 과거를 다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펙터클과 감정 몰아붙이기에 치우친 이 작품에서 호흡의 이완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2막 엔딩 - 진도아리랑

 

 

매력적인 변화를 꿈꾸며

 

<아이다>가 뮤지컬로 사랑받은 이유는 질곡의 세월을 매력적인 컨텐츠(노래, 의상, 무대효과)로 지금의 관객에게 어필되는 감성을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아리랑>의 주제는 ‘살아내기’ 혹은 ‘버티기’이다. 여인들은 겁탈을 당하고, 부모가 죽임을 당하고, 사산아를 낳아도 삶을 살아낸다. 이민 노동자로 핍박받으면서도 돌아가려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커튼콜 직전 일본군인들은 “쓰미마셍”이라고 용서를 구한다. 결국 이 작품의 화두는 ‘용서, 화해, 상생’ 이다. 직접 듣지 못한 사과라도 받으면 풀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또한 조금만 참으라는 버팀의 방식으로 구현된 현재가 과거와 달라진 바가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첫 곡에서 등장인물들은 ‘호시절’을 다 같이 꿈꾼다. 이는 현재가 아닌 과거 혹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척박한 현실은 호시절을 꿈꾸며 버텨야 한다. 도전하는 삶이 아름답다지만, 현재는 부정하고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야 말로 경계해야할 자세일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여전히 녹록치 않지만 그저 살아내야 함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란 지침에 수몰되고, 많은 것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의 현실에서 이 작품의 주제는 답답할 수 있다. 정말 버티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관람객의 평균 연령은 상당히 높다. 뮤지컬도 세대 간에 소통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과거의 기준만 고집하기 보다는 다르게 생각해보고 상생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야 할 것이다.

<아리랑>은 프리뷰를 거치며 매 공연마다 변화되었다. 수정을 통한 완성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이 다른 결과물이 된다면 관객들은 최소 2번은 보러가야만 한다. 결국 호흡을 정리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좀 더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아리랑>은 여러 부분에서 이전보다 성취한 지점들이 많다. 그러기에 좀 더 기대가 된다. 대형 창작 뮤지컬의 틀과 기준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많은 세대들이 끊임없이 찾게 되는 공연으로 남아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 제공: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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