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호 편집인의 글)
문화예술 법과 제도의 정비를 촉구하며!
문화예술 관련 법과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70년대 제정된 믄화예술진흥법은 여러 차례의 개정과 재개정을 거치면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그중에는 국어나 지역 등 세부적인 법이 제정되면서 불가피하게 삭제된 부분들도 있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선임처럼 인사 관련 법에 의해 원래의 정신이 손상된 경우도 있다.
문화예술 관련 법은 그 범위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많아질 수 있다. 그러나 금방 눈에 띄는 것들만 봐도 이미 거론한 문화예술진흥법 외에 문화기본법, 지역문화예술진흥법,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예술인복지법, 문화산업진흥기본법 등 꽤 여러 개로 나타난다. 이중 특히 문화예술진흥법, 예술인복지법,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은 현장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그 부실 여부의 체감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 하겠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예술의 범위를 정의하고 그 창작 지원에 대해 천명하며 그 실행 기구인 문화예술위원회의 근거가 된다. 애초 70년대 제정될 때는 독임제의 문예진흥원이었던 것을 10년 전 민간 주도의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하자며 법을 개정했는데 이후 위원과 위원장 선임 방법이 바뀌었고 그래서 개정의 의도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예술 검열 사태에서 보듯 위원들의 역할은 전혀 없고 정부와 예술위 직원들이 직접 지시를 받고 수행하는 모습이다.
법은 가만히 있어도 계속 개정의 이유가 생긴다. 왜냐 하면 상위법의 자격을 갖는 법들이 계속 제정되거나 개정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수동적으로 수용만 하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했다가 법의 원래 취지가 손상되는 경우도 있다. 문예진흥법 민간 주도 정신이 손상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게다가 현실적 상황 변화도 법 개정의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문예진흥기금은 과거 영화나 공연에서 기금을 강제로 납부 받던 시절도 아니고, 은행 이자만으로 예술 창작 지원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산 확보에 있어 달라진 환경을 고려하여 필요하다면 특례 조항이라도 신설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노력을 한 적은 없다. 안정된 예산 확보와 명실상부한 민간 주도 위원회가 가능하도록 법이 정비되어야 한다. 또한 예술의 국가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예술 표현의 자유와 창작 지원을 보장하기 위한 튼튼한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다음은 예술인복지법의 보완이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이 법에 근거해서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법도 있고 실행기관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술인들은 복지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난 번 극빈의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독사한 김운하 배우의 경우에서 보듯 무슨 일만 벌어지면 어김없이 법과 제도의 사각(死角)이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복지에서 중요한 건 적극행정과 그에 필요한 유연한 예산 집행 가능성이다. 그게 안 되는 건 법의 사각이기보다는 복지의 기본 조건 결여 때문이다. 담당 직원에게는 적극행정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에 있어 적극행정을 펼쳐야 할 때 소극적이었으면 처벌해야 한다. 반대로 적극행정을 펼쳤는데 결과적으로 과잉행정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확보돼 있어야 한다.
예술인은 창작에 몰두한다. 그 성공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도 덤벼드는 것이 예술인이다. 그런 존재들은 자신을 돌봐야 할 에너지까지 몽땅 창작에 쏟아 붓기도 한다. 그래서 일반인에 비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술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법을 제정한 이유이다. 적극행정은 물론 일반 복지에도 적용되지만 예술인에게 특별히 더 필요하다.
예술인복지법은 제정 당시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통과되었다. 특히 근로자의제가 빠지고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이 거의 삭제된 건 치명적이다. 이에 대한 보완이 시급하다. 아울러 공제회나 금고, 기금 등도 아예 거론도 안 되고 있는데, 안정된 예산 확보와 함께 역시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은 국가적으로는 문화융성을 위하여, 예술인들에게는 저변 확대와 고용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 현재 이 법에 의거 설립된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사회문화예술교육을 펼치고 있지만 그 규모와 내용은 참으로 소박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세우려면 전국민 1인 1예술 시대는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법과 제도, 예산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애초 이 법은 문화예술교육진흥법으로 준비하다 교육의 진흥은 교육부의 일이고 문화부는 지원하는 게 맞다는 주장에 밀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이 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나라는 하나인데 왜 부서 업무 분장에 따라 법의 이름이 달라져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그렇다면 교육부가 문화예술교육 진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런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교육부가 얼마나 소극적인지 알려주는 게 있는데 바로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상 학교는 문화예술교육시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법적으로 국공립 문화예술교육시설은 문화예술교육사를 고용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학교가 포함될 경우 전국 11,000개의 초중고와 8,000개의 유치원, 42,000개의 어린이집 중 국공립은 의무적으로 문화예술교육사를 고용해야 하고 사립은 고용이 권장된다. 물론 엄청난 예산 편성이 필요한 일이고 따라서 현실론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0년이고 20년이고 계획을 세워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려는 시도조차 안 한다면 그 현실론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예회관이나 문화원은 문화예술교육시설로서 학교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하도록 해놓고 정작 학교는 빠져 있는 이 논리적 모순을 일단 해결하고 그 실행 계획에 있어 합리적 현실론을 적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예술 검열로 온통 시끄럽다. 예술에 대한 국가적 인식이 약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관련 법에서 분명하게 예술의 자유를 선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헌법적 가치, 아니 그 이상의 인류 보편적 가치임을 천명하자는 것이다. 예술인은 찾아서 맞춰서 지원해 줘야 한다. 창작 지원이건 복지 지원이건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예술 지원제도와 복지제도에 대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문화융성은 전국민이 문화예술교육의 혜택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럴 때 예술인은 전국민에게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로서 존중받고 존경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 또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부디 예술이 국가 운영과 유지에, 나아가 모든 인간의 행복한 삶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깨닫고 제대로 된 예술진흥책을 마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2015년 12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전국민 1인 1예술시대!
꿈꾸어 보기로 해요.
오세곤선생님!
공감! 만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