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우화/ 양근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연극적 기록

– <백석 우화>

 

양근애(연극평론가)

 

시 : 백석

대본구성, 연출 : 이윤택

작곡, 음악 : 권선욱

단체 : 연희단거리패, 대전예술의전당

공연일시 : 2015/10/12~11/01

공연장소 : 대학로 게릴라극장

관극일시 : 2015/10/23 pm. 8:00

 

 

<백석우화-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북에서는 쓰기를, 남에서는 읽기를 거부당한’ 시인 백석(1912~1996)의 행적을 다큐멘터리 기록 형식으로 만든 연극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의 아름다운 시와 자야와의 낭만적인 사랑, 그리고 ‘모던 보이’ 칭호에 걸맞은 수려한 외모 등으로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시인 백석. 그러나 그는 ‘월북 시인’의 오명을 쓰고 한동안 금지 되었던 비운의 시인이었다. ‘재북’ 시인이었던 백석이 남한에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이며 그것도 해방 이후의 시는 「남신의주유동방시봉방」 정도만 알려진 채, 그의 후기 행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연극은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1936년 발간한 시집 <<사슴>>으로 유명해진 시인, 수려한 외모의 ‘모던 보이’, 기생 진향과의 동거와 ‘나타샤’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나들었던 풍문은 백석의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총 11장으로 이루어진 연극 <백석우화>는 백석의 시와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하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기록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백석우화>의 첫 장은 「여우난곬족」을 읊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절날 친척들이 모인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 시를 두고 시창자는 ‘판소리 양식’에 닿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배우들은 판소리 창자가 되어 행을 나누어 시를 읊는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옿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하는 소리가 소극장 무대에 울려 퍼지고 관객들이 서서히 백석이 보고 듣고 느끼고 살았던 시대로 진입한다. 2장에서는 시집 <<사슴>> 발간 전후에 동료 문인들이 백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백석이 기생 진향을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도 이 때이다. 오장환, 김기림, 임화, 정현웅,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 등 문인들로부터 주목받던 백석, 그러나 시종일관 자야만 바라보고 살던 시절의 백석의 모습은 여기까지이다. 3장부터 바로 우리에게 잊힌 한 시인의 여생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우난곬족」을 통해 백석의 유년시절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통해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던 시인 백석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3장부터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피해 만주로 떠났던 일과 해방 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삶이 조명된다. 사랑하던 자야와도 헤어지고 북한 땅에서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결혼하고 3년만에 이혼한 일, 후배 문인 허준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남한에 알려와 <<학풍>>에 발표한 일, 그리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요한 돈」을 번역했던 일 등이 역사와 함께 흘러간다.

 

최근에 나온 백석에 관한 평전을 읽었거나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동화시와 산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3장 이후의 이야기가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던 보이’ 백석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북한에서 체제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어 번민했던 백석의 모습과 삼수갑산으로 쫓겨나 가족들과 함께 최후를 살았던 백석은 다소 놀라울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백석의 모습만 간직해 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 시인의 문학 세계가 마감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백석우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한 시인의 삶 전체이며 사라지지 않은 시정신이다.

 

북한 문학의 작가로 종사하며 동화시를 쓰고 번역을 하고 산문을 써내려간 백석의 삶을, 이 연극은 ‘광대’의 우화로 그려낸다. 1956년 이후 동화시를 쓰면서 아동문학으로 창작의 영역을 확대해간 백석은 ‘학령전 아동문학 논쟁’에 가담하면서 협소한 사회주의 사상 앞에 서서히 기운을 잃어 간다. 고향땅이 있는 북한에 남기로 한 것은 백석에게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남한이냐 북한이냐의 선택이 곧 체제와 사상의 선택인 것으로 몰아간 역사의 격랑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수갑산으로 쫓겨 가 양치기와 감자 심는 일을 배우며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체제 선전용 글을 쓴 일과, 백두산 기행을 혁명정신을 북돋우기 위한 글로 써낸 일, 그리고 대남 선전방송용으로 남한의 신현중에게 편지 형식의 「붓을 총ㆍ창으로!」를 쓴 일은 백석이 가면을 쓴 광대처럼 북한 체제의 꼭두각시로 살았던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석이 스스로 얼굴에 분칠을 하며 슬프게 웃는 장면은 이 연극이 말해주고 싶은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은 역설적으로 시인은, 예술가는, 창작자는 그 어떠한 사상에도 체제에도 종속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가 북에서 발표한 마지막 에세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물건”인 “혀”를 가져다주는 이솝우화라는 것은 그래서 더 울림이 크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그렇게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다가 죽은 시인, 백석. 그는 삼수갑산에서 매일 글을 써 불쏘시개로 썼다고 한다. 매일의 시를 하늘로 날려 보내며 외롭고 높고 쓸쓸해진 그의 얼굴을 응시해본다. 살아서 내내 고고한 마음에 대해 탐색하며 세상 모든 사물들을 마치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했던 시인, 죽어서 갈매나무를 그려보게 한 정한 사람, 백석. <백석우화>는 절제되고 담담하며 고졸하게 백석의 삶을 그려내었다. 우리는 그처럼, 아니 그와 그를 할퀴고 간 역사를 잊지 않고 지금의 모든 소란 앞에서 다시 펜을 들어 매일의 시를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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