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 ‘연극대학’이 있었다면?/ 우상전

서울대에 ‘연극대학’이 있었다면?

 

우 상전 (연극배우)

 

이 글은 ‘우리 모두가 열등의식을 갖고 살자!’의 제2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연극인들에게는 대단한 자존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글은 이런 인식에 대한 자성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연극이 교육부에 의해 고교의 정규과정으로 선정된 경사를 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오세곤교수가 TTIS (9월호‘오채까담’)에 쓴 설명부터 들어보자.

“2015년 교육과정 개정안에 연극이 고등학교 일반선택 예술교과로 들어간다고 결정이 되었습니다. 작년 9월에 시작하여 올 9월이면 공시가 된다. (이미 됐다) 그러면 내년에 교과서가 개발 될 것이고, 17년에는 시범학교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18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예술교과로 선택될 것이다.”

일단 연극계로서는 커다란 경사이자, 변화임이 분명하다. 아마 신극 100년 역사에서 이런 경사는 없었을 것이다. 연극전공생들의 ‘청년실업’을 해소하는데도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의 대입시를 위한 잘못된 사교육이 크게 개선될 거라는 기대도 있다. 사실 연기는 그동안 조기교육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는 대학들이 어린나이에 데뷔한(성공한) 연예인의 입학을 학수고대한 것으로도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연극(예술)교육’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건 ‘교육’이 연극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동시에 변화로 인한 불안감의 토로이기도 할 것이다.

  1. 우선, 지금 대학교육에는 변변한 교과서나 교재도 없다. 그런데 고교과정에 얼마나 알찬 교과서를 만들어 공급할 것인가? 우리 연극대학이 과연 멋진 교과서를 선보일 수 있을지? 역사처럼 왜곡논쟁(?)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1. 지금 대학교육에도 호흡, 발성, 화술과 같은 기초교육이 부실하다. 따라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처지에서 대학을 졸업한 교사들이 어떻게 고교과정에서 이런 기초교육을 고교생에게 실시할 수 있을지?

 

  1. 지금 대학교육에 연극(예술)교육에 관한 방법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냥 수업을 ‘워크숍공연’으로 채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고교과정은 대학과 달리 수능고사 준비로 타 과목도 가르쳐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해 고교과정에서 제대로 기능할 것인지?
  2. 지금 대학교육은 부실해도 이에 시비를 걸 사람이 없다. 취업도 ‘청년실업’으로 크게 한숨을 돌리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고교과정에서는 음악, 미술, 무용교사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거기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의 기대가 존재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교수법에 체계를 세워 타 장르와 경쟁할 것인지?

 

연극계의 무관심

 

이런 중대사가 연극판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연극계는 전혀 관심이 없다. 혹 오세곤교수의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부의 ‘취업률평가’로 고통 받던 대학교수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인지?

이런 무관심은 10월호의 ‘한국연극’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여전히 지원과 복지에 관한 타령을 늘어놓다가 문예위의 전문위원으로부터 이런 말로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공연계 일각에서 지원제도가 단체들의 자생력을 잃게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삼년 정도 지원제도를 없애고 그 이후에 자생력을 담보할 수 있는 단체들이 남아있을 때 집중지원을 해서 건강한 단체들을 양산해내자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럼 ‘자생력’을 위해서도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연극을 먹여 살릴 좋은 연극예술가의 배출이 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외화에 밀려 힘도 못쓰던 국산영화가 할리우드를 넘어서게 된 것도 교육으로 좋은 영화인재들을 배출한 덕이다. 그런데도 연극계는 이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왜 ‘서울대타령’을 하고 있는가?

 

바로 그 ‘오채까담’에서 채승훈교수가 아주 관심이 갈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서울대타령’을 늘어놓던 사람이다. 서울대에 연극대학이 없어서 우리의 연극교육에 체계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옛날에 이해랑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서울대학교가 예능 쪽으로 학과를 만들 때, 먼저 음악전공과 미술전공을 만들고 다음에 연극전공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먼저 만들어진 음악과 미술교수들이 연극전공 설치를 반대했답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서울대에 연극과가 없으며 다른 국립대에서도, 일반 사립대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이해랑선생님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결국 우리나라 예술풍토에 굉장한 오류를 가져온 큰 사건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국연극계의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온 원로들의 만성무력증을 탓하기에는 이미 너무 때가 늦었고,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만일 그때 서울대에 ‘연극대학’(또는 연극과)이 만들어졌다면 연극계 전반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하는 것일 거다.

먼저 내가 연극판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서울대타령’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 서울대에 연극과가 있었다면 최소한 입시전형에서 ‘수능시험성적’이 이토록 헌신짝처럼 버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둘, 지금처럼 어설픈 사교육에 의한 입시실기전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셋, 사립대학들처럼 연예인을 입학시키는 그런 파행은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서울대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넷, 지금처럼 대학생이 책도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섯, 교수들이 학생들 등쌀 때문에라도 최소한 교과서나 참고할 교재도 없이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서울대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냈을 거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다.

물론 이런 우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서울대로 인해 연극계가 극심한 이념의 투쟁장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말이다. 미술대학이야 ‘걸개그림’ 수준이지만 연극대학이 있었다면 엄청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보다도 ‘서울대타령’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결국 서울대가 갖는 한국적 권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대 학생들과 교수들이 갖는 한국적 ‘자부심’이 현재의 연극대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 한국적 권위에서 나오는 자부심이 왜 연극대학에 필요한 것일까? 그러니까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과대망상증’에 의한 자존심이 아닌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긍지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기초교육이 없는 연극계

 

이따금씩 나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낯선 사람들을 지하철이나 술집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저, 말씀 좀 드릴 게 있는데…”

“무슨 일로?”

“내 자식 놈이 갖고 다니는 연기책 표지에서 선생을 뵈었습니다.”

“그래서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 녀석이 000 연극과에 다니는데 별로 배울 게 없다고 투덜대는데 부모로서 너무 걱정이 돼서… 어떻게 하면 좋죠?”

내가 유학파인줄 알고 유학 상담을 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왜 학부모들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될까를 생각해 보자. 이는 단연코 수강생의 80%가 연기지망생인 현실에서 이에 대한 기초교육의 부실로 인해 대학이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진짜 코미디는) 이처럼 학부의 기초교육은 부실해도 대학원에 석사, 박사과정은 번듯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박사학위자도 없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두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입을 삐쭉거릴 정도다.

화교로 한국에서 최고의 ‘중국요리’ 명인으로 불리는 사람의 일대기를 읽게 되었다. 학력이라곤 겨우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를 중퇴가 전부인 그에게 “요리를 배울 때 무엇을 가장 중요시 했는가?”라고 기자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초를 잘 쌓는 것이다. 이건 무림(武林)에서 실력을 쌓는 것과 같다. 어떤 날은 수없이 칼질만 하고, 어떤 날은 수없이 반죽만 하면서 내공을 쌓았다.”

그 정도 학력의 소유자의 입에서도 자기 업에서 가장 중요한 게 ‘기초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최고의 학위소유자들로 구성된 연극교육자들이 ‘기초교육’의 중요성을 모른단 말인가? 어째서 기초교육이 부실하다는 말이 나오는가!

 

옛 국립극단의 경험

 

옛 국립극단에서 생활하면서, 난 국립극단이야말로 영원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라는 예감을 버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단원들이 진정한 권위나 자부심, 긍지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는 능력유무와 상관없이 나름대로 자부심, 긍지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이게 없으면 ‘과대망상증’에 의한 삐뚤어진 자만심이 생긴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러니까 연극인들 사이에 흔히 운위되는 자존감(자존심)이란 것도 바로 자기 생존이 위협받을 때 만들어지는 최후의 보루에 지나지 않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진정한 자부심은 스스로 ‘자가발전’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피드백’이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러니까 현재의 연극대학이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교수들에게 진정한 자부심이나 권위가 결핍된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옛 국립극단원들이 진정한 자부심을 갖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들이 대중(관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국립극단의 존재(위치)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국립단원들이 엄청난 긍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매사에 대응하는 행동들에는 전혀 긍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대표적인 게 항상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것일 거다. 그래서 늘 단원제도가 없어지면 어쩌나(극단해체), 또 연말 오디션에서 탈락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속에 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한국은 (유럽과 달리) 한류, 뮤지컬, TV드라마, 영화가 온통 판치는 대중예술과 예능의 천국이다. 이런 속에서 아무런 현장경험도 없이 이론뿐인 학위논문을 가지고, 그것도 하염없이 연예인을 지향하는 학생들과 생활을 지속해야 하니 연극대학교수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니 생긴지 60년이 다된 연극대학이 기초교육 하나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려니 자연히 심각한 괴리현상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내심 긍지를 잃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교수들이 자부심을 가지려면 예술대학교수로서 자기의 전공에서 대가(大家)라는 칭송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니 답답한 심정일 것이다. 이른바 콤플렉스에 시달릴 것이다. 내색은 안하지만.

한례로 한국의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할 때 “제가 국립극단을 아시아, 또는 세계 최고의 극단으로 만들겠습니다!” 빈말이라도 이렇게 외칠 수 있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왜? 괜히 그런 소리를 했다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부심이 존재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경제적 생존을 위한 자존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단지 그걸 숨기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국립극단의 예술감독마저도 권위가 없는 ‘취업자리’로 전락해 임기 말이 되면 연극계에 소란이 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건 연극대학교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현실이니, 한국연극계는 긍지가 없는 스스로가 자가발전한 자존심으로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가 된 게 현실일 것이다.

 

아티스트 백남준의 사례

 

1984년, 조지 오웰이 오래 전에 감시도구로 인간을 감시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예언한 해였다. 그해 년 초에 백남준선생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들고 KBS- TV에 처음 출연해 그의 모습을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그때, 예술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세계적 대가가 어떻게 자기의 자부심을 들어내는지를 우리 모두가 목격할 수 있었다.

우선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차림새였다. 패널로 나온 한국의 미술대학 교수들은 넥타이에 정장차림이었는데, 그는 멜빵바지에 저고리도 입지 않은 채 나와서는 계속해 두 손으로 멜빵을 튕기면서 어눌한 말투로 대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차림새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한국교수들의 그를 향한 ‘예술론’의 집요한 추궁에(?) 그는 그저 “밥을 먹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비디오아트를 했을 뿐이다.”라고 역시 집요하게 우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론을 이렇게 설명할 뿐이었다. “당시 독일은 TV수상기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시기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 앞에 흑백 수상기를 마구 버리던 시절이었다. 서구에서는 예술가가 독창적이어야 먹고 살 수 있기에, 내가 흑백 수상기를 주워 다가 자석으로 이리저리 돌리다 착안하게 된 것뿐이다. 특별한 예술론은 없다.”

겨우 연극에 입문하지 10여년 아직 애송이인 나에게 당시 TV에 비친 세계적 대가의 태도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쇼킹했다.

동시에 그때 나는 서구에서 ‘전업예술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은 저런 정도의 자부심은 있어야 제자들이 스승에게 영감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예술정신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교수들은 국제적 명성도 없고, 겨우 국내외에서 학위논문 하나 써서 학교에 ‘취업’을 하러 다니니 임용 때마다 온갖 구설과 루머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거기다 졸업을 앞둔 자기의 제자들이 “4학년이 되면 미간이 좁아지는 ‘표정장애’와 가슴이 오그라드는 ‘신체장애’를 겪는다.” (대학 강사인 배우 김소희의 말) 이런 현실과 직면하게 되니 어떻게 교수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나마 서울대교수라는 극히 한국적 권위마저도 없는 터에 말이다.

이게 연극대학이 파행을 지속하고 있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대학을 가기 위해 예술을 전공하는 나라?

 

‘서울대타령’을 하고 있던 터에, 얼마 전 ‘서울예고’가 서울대에 대원외고 다음으로 많은 학생을 입학시켰다는 보도를 보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도에 의하면 올해 서울대에 대원외고가 257명을 입학시켰고, 다음으로 서울예고가 242명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이런 보도는 서울대 예술교수들의 권위에 먹칠을 한 꼴이나 다름이 없다. 왜?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예술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대학에 가기 위해’ 예술을 전공하는 나라가 확실하구나 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특수목적고’라 해도 국립대의 음대와 미대, 체육의 무용전공을 한 학교가 거의 다 독차지한다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현실이니 예술교육이 제대로 될 턱이 없고 한국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인 예술가가 탄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가진 얘들은 일찍 해외로 유학을 하거나, 한예종으로 가서 영재반에 입학하고, 나머지만 남아서 학교성적순으로 예술대학의 입학을 경쟁하는 나라가 된 마당에 어떻게 창조적 예술가가 대학을 통해 탄생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진즉 서울대에 연극대학이 생겼어도 결국 지금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사실이다.

연극만 해도 고단위 예술가의 배출이 시급하다. 이게 바로 연극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활성화시켜주는 최선의 정책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좋은 연기자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작가와 연출가의 배출 없이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존재가 영국의 배우술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극작가 체호프의 존재가 러시아를 최고의 연극인재(연출가)를 배출하는 나라로 만든 것으로도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상위급의 예술가의 배출이 한국연극의 활성화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예술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의 연극대학의 설립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연극에서 인재발굴을 위한 ‘교육방법론’의 새로운 개념정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그렇지 못하는 한 세계적 예술가의 탄생은 우리에게 너무나 요원할 일일 뿐이다.

 

작가 ‘황석영’선생의 일갈

 

지난여름 작가 황석영선생이 문단에 ‘벼락 치는 소리’를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한국문학이 이 꼴이 된 것은 문창과 (문예창작과) 때문이다. 문창과가 글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인지 요즘 작가들은 서사와 세계관이 모자라고 작품에 철학이 빠져있다. 문학상에 올라오는 작품이 무난하고 문장과 구성이 좋지만 다 똑같다.”

이렇게 말을 했으니 문창과 교수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일어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한국의 예술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황석영선생이 거의 유일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한국은 대학교수가 전 부분에 걸쳐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는 나라인데다, 특히 ‘전업예술가’가 부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어서 ‘대학교수’가 유일한 예술가의 생존 수단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감히 누가 나서서 대학의 예술교육에 대해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연극계를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말 예술은 가르칠 수 없는 장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저 스승과 제자가 ‘영감’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오래 전에 일이다. 신춘문예공연을 마치고, 그해에 당선되어 무대에 올랐던 ‘신춘문예작가’들을 주축으로 한국연극협회주최로 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김석만교수가 사회를 본 것으로 기억한다.

신춘문예로 극작가입문을 크게 고무, 장려하고픈 연극계의 문창과 교수가 중심이 되어 마련된 자리였다.

그때 내가 ‘손을 들고’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몇 년에 걸쳐 신춘문예공연을 보고, 또 직접 출연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내가 보기에 신춘문예는 작가 지망생들이 미리 신문사가 선정한 심사위원들의 입맛을 알고 그에 맞게 작품을 쓰고 있는 듯하다. 내말이 맞나?

즉 해당 신문사의 취향에 맞춰 글을 쓰고 응모해 극작가로 입문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당시엔 희곡의 경우 신문사마다 연극인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해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심사를 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에 당연히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작가가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이다. 인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교육과 예술가의 입문의 어려움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늦었지만) 황석영선생의 그런 질타가 절대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닌가?

 

‘한국연극’지 10월호에 실린 연극원 교수이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인 김광림교수의 인터뷰가 예술교육 현장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여기에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이 글을 읽고 정말 예술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닌 것인가 하는 회의가 이는 게 사실이다.

“연극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며 강의하시는지요?” 라는 평론가 이은경교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작품지도를 하면서 테크닉에 대해서는 지적하지만 그 안의 철학이나 소재는 절대 안 건드려요. 지금은 미숙하지만 나중에 더 잘할 수 있는 싹이기 때문에 선생이 그것을 끊어버리면 안 되죠. 미숙함이 지나쳐서 화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참죠.” 그러면서 항상 “나보다 더 훌륭한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죠.”

일전에 모 대학출신들이 모여서 올린 공연을 보고 뒤풀이에서 칭찬을 했더니 그들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저희들은 재학 시에 교수들로부터 칭찬한번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칭찬받던 친구들은 사회에 나와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너희 교수들이 학벌이 세서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그래!” 이렇게 대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꾸는 선배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에 관해 자세히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해 그냥 넘겨버렸다.

왜? 이거야말로 바로 예술에서의 교육의 핵심사항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예전에 국립극단에서는 연출자가 출연 단원들에게 “알아서 움직여 보세요.”하면 출연자들의 입에서 곧바로 튀어나오는 말 “그저 먹으려고 하네!”하는 속삭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인식을 갖게 된 것도 실은 교육의 방법론에 기인한 오류일 것이다. 우리식 교육에 물든 한국배우들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불만이자 인식일 것이다. 왜? 항상 선생이 하라는 대로 했던 게 습관이 돼서 말이다. 그런데 연출가가 알아서 하리니!

아! 이런 인식이 전부인 나라에서 어떻게 교수가 학생들의 작업을 가만히 지켜 볼 수만 있겠는가. 교수가 학생들이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기를 마냥 기다릴 수만 있겠는가! ‘기다려 주면’ ‘그저 먹으려고 하네!’ 할 텐데.

그러니 선생은 부지런히 간섭할 것이고, 그러니 시키는 대로 안하는 학생들은 미워할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칭찬받던 학생들은 졸업 후에 선생의 가르침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건 당연할 것이고 말이다.

더구나 학생들에 의한 교수평가가 있는 나라에서 평판 좋은 교수일수록 나서서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은 과연 교육으로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예술가를 양성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서 양성이 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두가 나서서 새롭게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황석영선생의 입에서 왜 그런 질타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울한 한국의 가을

 

사실 한국은 가을만 되면 (화창한 날씨와 무관하게) 한국의 지성인들 모두가 우울증에 시달린다. 노벨상 때문이다. 올해는 더욱 심했다. 중국마저 생리의학상을 타서다. 그러니 우리 한의학계는 멘붕을 경험했을 것이다.

일본과 달리 과학 분야에서 중국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한 국가여서 더욱 그렇다. 이런 결과에 대해 일본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은 학교교육이 성적위주로 되어 상호경쟁이 너무 심하다. 오로지 성적이 최선일 뿐이다. 부모들까지 나서서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니 모든 과목에서 우수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또 일본은 도쿄대학 출신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 실제로 지방대학 출신들이 노벨상을 받고 있지 않는가!

거기다 한국은 이른바 ‘괴짜’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또 한국은 개인적 신념을 버리고 공통체적 이념으로 뭉쳐 서로 싸우기를 즐긴다. 그러니 한국사회에서 개인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장인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기도 힘들고 존중받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게 어디 노벨과학상뿐인가! 동양3국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그 뿐인가 세계적인 예술가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작해야 유럽에서 이미 3D업종으로 알려진 성악가, 발레리나, 악기연주자 정도를 배출하고 있는 게 전부다.

요사이 조성진이라는 젊은이가 쇼팽콩쿠르에서 1위를 입상해 격찬을 받고 있다. ‘신드롬’까지 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바로 한국예술의 한계이자, 한국예술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언제까지 신인의 국제콩쿠르로 흥분을 해야 하는 것인가? 대가로 입문하는 정명훈은 온갖 스캔들로 멍들어가면서 말이다. 언제 이런 후진적 관행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고단위의 예술가 – 세계적 극작가, 연출가, 안무가를 배출하는 시대의 막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런데 왜 고단위 예술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일단 대학에 가기 위해 예술을 지망하는 나라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일 듯하다.

 

그럼 ‘연극(연기)교육’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연극대학의 교수들도 학창시절 ‘공부’라면 상당히 잘 한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연극교육, 특히 연기교육이 왜 부실한 것일까?

예술교육은 오랫동안 (대학교육이 없던 시절) ‘도제(徒弟)교육’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예능인을 꿈꾸던 사람들은 (학위와 무관한) 뛰어난 예능을 가진 스승을 찾아가 배우는 게 전부였다.

대개 이런 교육은 연희자 – 광대, 악기연주가, 소리꾼, 춤꾼, 환쟁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도제교육마저도 점점 학교라는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건 우리 사회가 학벌을 중시하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다. 따라서 학교교육이 예술발전과 예술가의 양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게 현실이다. 일본만 해도 아직까지 연기는 ‘도제교육’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도제기능’으로 교육을 했던 예술장르를 ‘학교교육’으로 대체하게 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체계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연극의 경우, 대학이 이런 교육을 떠맡고도 전혀 이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아예 준비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건 한국의 대학교육제도가 일정한 자격을 갖춘 학위취득자들에게만 부여하면서 이를 예술교육에도 그대로 적용하게 된데 따른 것일 거다. 그러니까 연극(연기)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은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학이 연기교육을 실시하려면 현장(실기)경험과 학위를 동시에 갖추도록 해서 가르치도록 해야 했는데, 그저 학위자만을 우대해서 생기게 된데 따른 ‘재난’이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연극대학만의 특성일 수 있고, 이는 국립대학인 서울대에 연극대학이 생기지 않은데 따른 부작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없는데도 대학이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학과를 만든데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 특히 연기의 경우는 많은 경험자들이 해방이후 이념으로 남북으로 갈리면서 월북해버린 결과일지도 모른다.

좌우간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까지 한국의 연기교육은 기초교육 하나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상태에서 연기교육이 지속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외려 교육으로 인해 왜곡될 우려가 큰 연극의 고단위 예술장르인 극작이나 연출, 철저히 도제로 이루어져야 할 기술교육까지도 대학교육으로 편입되어 가르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술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자기반성일 것이다. 최소한 가르칠 수 있는 것과 가르칠 수 없는 것만이라도 이제는 구별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연극교육이 고교과정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계는 물론이고 대학교수들까지도 이에 아무런 관심도 걱정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제 연극교수들에게는 ‘무념(無念)’이 일상화 된 듯하다.

 

현재 연극교육의 문제점들

 

  1. 우선 ‘젊은 연극제’를 되돌아보자

 

현재 연극교육의 문제점은 우리의 ‘젊은 연극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제1회 젊은 연극제는 당시 전국에 ‘연극과’가 고작 다섯 곳뿐이어서 국립극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국립단원으로 모든 공연을 다 관람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때 보고 느낀 점은 젊은 학생들의 연극제가 아니라 ‘교수연극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구한(?)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왜 ‘교수연극제’가 되면 안 되는가? 예술, 특히 연극의 경우 ‘눈높이’가 학생에게 있지 않고 교수에게 있으면 크나큰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입문에서부터 교수의 눈높이에 의해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수자신들마저도 ‘보는 눈’밖에 없는 현실에서, 애송이들이 턱없이 ‘눈높이’만 높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학생의 예술적 발전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지금 우리의 연극교육이 교수들에 의해서 ‘눈높이’만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한국예술에 독창성도 없고 창의성도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러면서 부질없는 ‘엘리트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것’은 없고 교수를 통해 ‘눈만 높이는’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자기의 주체성을 잃고 성공한 예술가들의 흉내만 내려고 드는 것이다.

교수들에게 (백남준처럼) 예술적 영감을 얻고, 보고 배울 거라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눈만 높이게’ 되면 이는 예술가의 인생에 커다란 불상사(?)가 아닐 수 없다. 왜? 예술가의 생명인 자기만의 독창성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해 연출가협회가 주최한 신춘공연에서 세계적인 유명 극작가들의 단막극을 모아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단막극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그들의 극작법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명작이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독창적인 극작문법을 초기단계부터 서서히 발전시켜 완성시켜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단막극은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초보 때부터 세계적 명작을 상대하니 연마되는 게 허황된 ‘자만심’이나 ‘자존심’ 뿐이 더 있겠는가! 그래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은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 거다.

대학수업을 하던 시절, 겨우 대학 2년생들이 공연을 한다고 교정에 연극포스터를 붙였는데,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 의한’ 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얄밉게 그들을 향해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나도 사실은 그의 시스템을 모르는데 너희들은 러시아에서 예술고등학교를 다녔니?” 그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물론 교수의 입장에서는 (‘젊은 연극제’만 해도) 학생들의 작업이 불안하기도 하고, 자칫 학교의 명예를 더럽힐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을 제키고 그들의 공연에 교수들이 나서는 것일 거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부담이 클지라도 학생들에게 그냥 맡겨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도교수’라는 역할과 기능이 학생의 예술적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게 두려워 얘들을 부추겨서 ‘세계명작시리즈’를 시도하니 학생들의 자존심만 커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아야 발전을 도모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로로 진출하니 ‘자기 것’이 없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예술교육에로의 방법론이 가르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니까 로버트 윌슨의 공연을 아무리 많이 보여주어도, 보기만 해서는 기획자 자신들처럼 ‘눈만 높아진다는’ 것을 서울이나 광주의 축제기획자들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1. 왜 예술가에게 논문을 강요하면 안 되는가?

 

지금 우리대학의 연극교육은 학위논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이 나다. 단언컨대 예술대학은 논문을 쓰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 한국은 대학교육을 통해서 예술가가 양성될 수 없다고 단연코 주장할 수 있다.

이건 (현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악순환일 뿐이다. 현장경험이 없는 교수가 권위를 찾으려면 당연히 학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학교 매상(?)도 올려주어야 하고) 그러니 점점 더 학생들은 현장예술을 무시하게 되고 학위에 의존해 대학교수를 꿈꾸게 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을 강요하지 마라!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논문을 쓰는 거라는 인식이 절실한 실정이다.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는 내가 이렇게 글만 쓰듯이 말이다.

그런데 요새 반가운 소식도 있다. 어느 대학에서는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한학기만 더 등록을 하면 (돈으로 5학기를 때우면) 학위를 준다고 한다. 차라리 이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학생들 말에 의하면 여전히 논문을 쓰지 않으면 학생이 콤플렉스에 빠지도록 은근히 압박을 가한다고 한다. 하지만 논문이 예술가를 망치는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1. 과거의 스타니슬랍스키의 이론만 뒤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젊은 세대가 새로운 방법론이나 발전된 방법론을 개발해 현장에 새롭게 적응시켜야지. 그런데도 논문쓰기로 연극지망생의 사고의 퇴보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논문은 자료의 확신만을 논하는 게 주여서 자연히 상상력을 배제하게 된다. 예술에서의 생명은 바로 상상력에 의한 창조성에 있는데 말이다. 물론 알아야 상상력도 생긴다고 항의를 하겠기만, 하지만 남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 예술가다. 그런데 예술가가 잘 만들어진 ‘올레길’만 걸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지금 한국의 연극교육은 불필요한 논문을 써서 교수가 되고 그런 불필요한 짓을 학생에게 대물림하는 악순환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두뇌도 훈련에 의해 신장한다. 근육이 훈련에 의해 강화되듯이 말이다. 따라서 확인된 논문만 뒤지니 (상상력과 창의성을 배제하고 실패를 망신으로 여기게 되니) 일반 학문도 아닌 예술교육에서 자연히 ‘바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상상력에 의한 공연계획서를 논문으로 대신하도록 하면 점점 좋은 쪽으로 젊은이들의 머리가 깨어가게 될 것이다.

  1. 이로 인해 현장예술가로의 진입이 막히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대학의 ‘수입’을 올려주려고 한국연극을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한국의 연극대학은 논문에 의존해 교수를 채용한다. 그러니 가득이나 부진한 현장중심교육이 발전을 못하고, 좋은 현장인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예컨대 대학교수가 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현장경력과 함께 철저한 공연성과를 요구하면 얼마나 많은 변화가 대학과 연극계에 불어 닥치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부 잘하는 학생은 뽑지도 않으면서 되레 대학원에 진학시켜 그동안 안 쓰던 머리를 쓰도록 강요하니 당연히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공부를 위한 머리도 어려서부터 타고나는 법이다.

  1. 논문이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학이나 과학기술도 아닌 예술에서 논리의 전개는 아무래도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지 않으면 논문작성이 불가능한 포화상태에 있어 보인다. 이로 인해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를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학위논문이 비일비재하다.

대학이 학위를 따도록 적극 권장하면서, 바닥난 논리를 개발하려니 엉터리 논문만 늘어나고 학생들은 공연히 ‘엘리트의식’에만 빠지게 마련이다.

지금 한국의 ‘청년실업’의 주된 원인은 독일이나 네덜란드와 달리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교수와 학위자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어서 이의 원인규명에는 그저 외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선거를 앞둔 정치판과 짜고 경제계만 닦달해 ‘청년희망펀드’를 모금하는 꼼수만 쓰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외국노동자의 영입이 17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실업자의 수가 170만 명이라고 한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이걸 모르는 지식인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연극대학’과 복잡한 사회현실

 

나는 배우지망생들에게 ‘연극대학에 다니는 요령’에 대해서 곧잘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나의 독특한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한국의 현실에서 대학의 연기교육을 통해서 ‘배우 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왜? 일단 대학교수들이 현장에서 직접생활을 해도 급속히 변화하는 우리의 예능현실 – 대중예술의 현실을 감지하기 쉽지 않은데, 골방에서 논문심사만 하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랴!

교육부의 구닥다리 커리큘럼을 준수해야 하는 대학으로서는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연예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한류가 한국문화를 대표하고 있고, 이를 경제로 연결해서 부국을 꿈꾸는 현실, 천만을 동원하는 한국영화, 엄청난 시청률의 TV드라마와 예능, 뮤지컬제작 세계 1위국이며, IT최강국인 한국에서 연기교육은 그 중심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교육부에 의한 연극(예술)교육으로 연명하고 있는 게 대학교육의 현실이다.

거기다 아이돌이 대세인 나라에서 연기교육을 시행할(?)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대학에서 연기교육을 시작해서는 사회의 흐름을 절대로 쫓아 갈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배우지망생들이 대학에서 연기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학벌’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다. 그래서 그나마 연극대학의 교육이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어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배우지망생들은 어쩔 수 없이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대학은 온갖 불합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갖가지 괴리현상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연극대학이다. 그러니까 연극이 영화나 연예계와 맞닿아 있는 현실이 연극교육의 불행을 잉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예종 연극원은 이런 현실을 감안해 빨리 영재반을 만들어 ‘조기교육’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마 석, 박사학위 따가지고 꼬맹이들의 교사가 되는 게 싫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고교과정에 연극이 정규과목이 된 것을 연극계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변화를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연기만큼 영재교육이 손쉬운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학은 다 성장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3분 테스트로 입시를 치러 입문시키고 있다. 로켓으로 우주를 다니는 시대에 아직도 우마차로 짐을 나르고 있는 형국인 게 한국의 연극대학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꼭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결과적으로 모든 부조리가 연극대학에 몰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연극대학 이렇게 다녀라!

 

실제로 연기(연극)교육은 현실적으로 대학보다는 변화에 빨리 적응이 가능한 아카데미 식의 교육이 우리에게 더 적합한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4년을 다 다닐 필요도 없다. 특히 연기는 2년제면 충분하다. 아니 이토록 예능이 발달한 나라에서 교육은 무용지물인 게 사실이다.

그래도 대학을 다녀야 하니 결론적으로 이 둘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연극대학을 졸업하느냐가 연기 지망생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입학하자마자 먼저 현장에 나가서 자신의 재능을 테스트 받을 필요가 있다. 왜? 일단 대학과 현장의 편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일단 입시의 3분 테스트로 자신의 잠재적 재능을 확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조기교육이 정착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먼저 자기의 선천적 재능을 우선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잠재력을 인정받으면 선배들이 있는 현장에서 활동하며 연기를 익혀라. 그러나 현장에서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받거나 스스로 느끼게 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해 졸업장을 받아라!

그럼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학교를 졸업할 것인가? 적당한 시기를 지혜롭게 택해 대학으로 복귀하면 된다. 아마 무척 환영받을 것이다. 대학입장에서는 현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학생으로부터 학교의 명예를 얻을 수 있어서 그렇다.

테스트 없이 마냥 대학에 눌러 앉아 연기를 연마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외국에 나가서 배우면 훨씬 배우기 용이한 한마디로 한국은 다른 나라와 엄청 다르다.

서울예대가 입시철이면 광고로 내보내는 연예인 동문들의 사진을 보고도 학생들은 한국의 독특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겠는가! 아무런 대책 없이 졸업 후에 진로를 결정하겠다고 머물러 있는 배우지망생은 자기의 재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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