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극 수원극단 城과 인천시립극단
그리고 강북연극협회 극단 삼각산 공연총평
박정기
1, 수원소재 극단 城의 엄창석 원작, 김성열 연출, 정유진 작곡, 민병관 영상의 창작 뮤지컬 <빨간 염소들의 거리>
수원청소년문화센터 온누리아트홀에서 수원소재 극단 城의 엄창석 원작, 김성열 연출, 정유진 작곡, 민병관 영상의 창작 뮤지컬 <빨간 염소들의 거리>를 관람했다.
엄창석은 1961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영남대 독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주물공장의 노동자 문제를 다룬 중편소설 「화살과 구도」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소설집 『슬픈 열대』, 『황금색 발톱』, 장편소설 『태를 기른 형제들』, 『어린 연금술사』, 『유혹의 형식』 등이 있다.
금복문화상,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 겸 연출가 김성열은 1954년 강원도 속초출생으로 동국 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사다.
1983년 수원소재 극단 城 창단하고 1996년 수원 城 국제연극제를 창설했다. 1997년 충헌 박문수 예술대상 수상하고, 1998년 경기 예술대상 수상, 2001년 경기도 문화상 공연 예술부문 수상, 2002년 경기도 문학상 수상(희곡, 나는 王이로소이다), 2003년 보훈문화상 문화예술부문 을 수상한 현 극단 城대표이자 작가 겸 연출가다.연출작으로는 <햄릿>, <맥베드>, <안티고네>, <로미오와 줄리엣>, <카덴자>, <한씨연대기>, <무엇이 될고하니>, <태백산맥> <정조대왕> 외 다수 작품을 연출했다.
<빨간 염소들의 거리>의 ‘빨간’은 사춘기의 젊은 생기를 상징하고 ‘염소’는 가축이지만 제도권 속에 있는 아이들을 의미한다. 10대 중반의 기쁨과 희열, 고독과 절망을 그려냈다. 경상북도 대구신천 변을 중심으로, 학교라는 고삐에 묶인 채 각자의 방식으로 일탈을 꿈꾸는 소년들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주인공은 중학생 시절 대구 열차전복사고들 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헤맬 때, 학교 측의 배려로 병실에서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시험지를 찢고 입에 넣어버린다. 낙제를 시킬 테면 시키라는 일종의 포기 심리의 발동에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생사기로에서까지 시험을 치른 영웅으로 대접한다. 그러한 조처에 주인공은 오히려 환멸을 느낀다.
주인공은 미술부에 들어가 아그리파, 줄리앙, 세네카, 미켈란젤로 등 석고상 인물 하나하나의 내력을 들으며 그림에 심취하게 된다. 주인공은 밤이 늦도록 미술실에 남아 그림그리기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유도부 학생들과 다툼을 벌이게 되고 폭행을 당한다.
학생들 중 운동권에서 활동을 하다가 죽은 선배가 있어 추모행사에 주인공과 학우들이 참석하지만, 추모행사보다는 인근 바닷가에 수영을 즐기는 모습에 주인공은 착잡한 심정이 된다. 그러면서 더욱 그림그리기에 전념한다.
불량학생 패거리가 찾아와 주인공과 동료들에게 패싸움을 걸지만, 동료들은 맞서지 않고 잠자코 얻어맞는다. 주인공이 참다못해 복수를 해주겠다고 불량학생 패거리에게 대들다가 실컷 얻어맞는다.
그림그리기에 몰두하는 주인공, 계절이 한 겨울이기에 주인공은 의자를 난로에 넣고 불을 태워 온기를 유지한다. 이 광경을 교사가 보고, 학교기물손괴를 이유로 주인공은 퇴학을 당하게 된다.
바닷가에서 동료들과 만나는 주인공, 동료는 예쁜 여학생과 사귀며 즐거운 표정이다. 그중
학창생활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 또한 자신의 길을 선택해 주인공과 헤어져 떠나버린다. 주인공은 그들 모두를 떠나보내며 10대시절과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끝이 난다.
<빨간 염소들의 거리>는 어른이 된 소설가 엄창석이 소년소녀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의 손길이자 소설가 엄창석이 세상에 내보내는, 소년에서 성년으로 가던 상처투성이 길에 대한 오래된 성찰에서의 소산이다.
무대는 Y자 형의 긴 마루를 가로 쓰러뜨려놓아, 일종의 선착장 같은 풍경으로 조성되었다. 배경에 영상으로 대구열차참사, 바닷가 풍경, 파도 속을 운항하는 선박, 커다란 화폭 등의 영상을 투사하고, 수많은 이젤과 석고상을 배치해 학교 미술실 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여배우들이 소년시절의 학생 역으로 출연해 호연과 열연, 그리고 열창을 해 갈채를 받고, 무대구성과 장면변화 동선처리 등에서 탁월한 연출력이 감지되는 공연이다.
김지수, 고아라, 김설빈, 김예림, 이 훈, 박혜선, 임민아, 정혜은, 이빛나, 정단비, 최선은, 김준승, 안주현, 박지원, 이은지 등 출연자 전원의 열정과 기량이 제대로 무대 위에 구현되어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정유진 작곡, 민병관 영상감독, 전스연 안무, 김봉령 조명, 이선주 무대 등 스태프 모두의 기량이 제대로 드러나, 극단 城의 엄창석 작, 김상열 연출의 창작 뮤지컬 <빨간 염소들의 거리>를 우수 걸작 창작 뮤지컬로 탄생시켰다.
2, 인천시립극단의 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배삼식 번안·각색, 주요철 연출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인천시립극단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원작, 배삼식 번안·각색, 주요철 연출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을 관람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1898년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뮌헨대학 의학부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반전적이며 비사회적 경향을 보이면서, 제대군인의 혁명 체험의 좌절을 묘사한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로 클라이스트상(賞)을 수상하였다. 희곡 <바알 신 Baal>(1919)과 <도시의 정글>(1923) 등이나, 풍부한 환상과 냉정한 객관성,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도발을 곁들인 서정시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6)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서적이며 환상적인 연극과 오페라의 부정을 목적으로 한 스캔들에 찬 오페라 <마하고니시(市)의 흥망>(1929)과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를 시도하는 한편, 서사적 연극의 발상을 발전시켜, 사회 기구를 비판하는 희곡에 많이 반영시켰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여,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교육극과 고리키의 작품을 각색한 <어머니 Die Mutter>(1930)와 <도살장의 성(聖) 요한나 Die heilige Johonna der Schlachth>(1932)를 썼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그는 덴마크로 망명하여, 반(反)파시즘 활동을 계속하면서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1938)과 <카라르 부인의 소총 Die Gewehre der Frau Carrar>(1939) 등의 희곡을 집필하였고 동시에 많은 정치시(政治詩)를 썼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종전의 사실주의 수법으로의 접근이 다소 보이며, 다음 완성기의 여러 작품으로 계승되어 갔다. 1940년에는 핀란드로 옮겼고, 1년 뒤 다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는데, 대표작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 <푼틸라씨와 그의 하인 마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1)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 Das Leben des Galileo Galilei>(1943), 그리고 <코카서스 백묵원 Der Kaukasische Kreidekreis>(1945) 등은 극장과의 관계가 모두 단절되었던 망명 중에 완성하였다. 또한 <루쿨루스의 심문 Das Verhr des Lukullus>(1941)<시몬 마샤르의 환각 Die Gesichte der Simone Machard>(1943),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 Schweyk in zweiten Weltkrieg>(1943) 등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비미(非美)활동위원회의 ‘빨갱이잡기’가 시작된 1948년, 그는 일단 스위스로 갔다가 그 곳에서 <안티고네 Antigone>(1948)와 <파리 코뮌의 나날 Die Tage der Commune>(1948)을 썼으며, 당시까지의 그의 연극론을 <소사고 원리(小思考原理)>라는 책으로 간추렸는데, 이때 동독으로부터의 초청을 받고 동베를린으로 옮겼다. 1949년에는 아내인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을 중심으로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결성하여, 그의 망명 중의 여러 작품과 고전을 개작한 <가정교사><북과 나팔> 등을 연출하면서 실천 활동에 정력을 쏟았다. 만년에는 더욱 자기의 연극 체계를 발전시켜 ‘변증법의 연극’을 창도(唱導)하면서 연극인을 양성하던 중 1956년에 사망했다.
<하얀 동그라미 재판>의 원제는 <코카서스의 백묵원 白墨圓 Der Kaukasische Kreidekreis)>이다. 이 작품은 원나라의 <석필(石筆) 이야기>를 1944년 브레히트가 번안해 발표한 작품이다.
기독경전(基督經典) 솔로몬 왕 편에도 흡사한 내용이 있다. 1948년 미국에서 첫 공연이 이루어졌고, 1954년에 베를린에서 브레히트 자신이 연출해 공연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이상우, 채윤일, 유중렬 채승훈, 정진수 등 연출가가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각기 특성을 발휘해 연출했고, 1999년 학전소극장에서 이재진 교수의 번역, 김석만 연출의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이 성공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Der Kaukasische Kreidekreis>의 시대적 배경이 된 그루지아는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위치한 흑해주변 국이다. 10여개의 소수민족이 끊임없이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분쟁이 이어졌고, 한 때 소비에트 연방국이 되기도 했다가 러시아로 바뀐 후 독립하여 조지아라는 나라로 되었으나, 그 분쟁은 21세기까지 이어져 내전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분쟁 중 영주가 사망하자 영주부인은 황망히 피란을 하면서 유아를 버리고 떠난다. 그 집 하녀가 그 아이를 발견해 자신이 데려다 키운다. 하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청년이 있지만, 청년은 전쟁터로 끌려간다. 하녀가 온갖 고생을 하며 자식을 기르는 것을 본 오라비가 누이를, 병들어 남자구실도 못하고 누워 지내는 부농 청년에게 시집을 보낸다. 10년 만에 내전이 종결되고 영주부인이 돌아온다. 그런데 사망한 영주의 재산상속을 하려니, 상속권이 버리고 간 아이에게 있는 것을 알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하녀가 데려다 기른 것을 알게 된다. 영주부인이 아이를 강제로 빼앗아 오면서 소송이 벌어진다. 판사는 이 지역 서기노릇을 한 인물로, 이권 차리기는 물론 뇌물 받기를 좋아하는 부패공무원의 표상이다. 거기에 전쟁터로 간 하녀와 결혼 약속을 한 청년이 돌아오고, 전쟁이 끝난 것을 안 하녀의 불구남편이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멀쩡한 몸으로 벌떡 일어난다. 농부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불치병환자행세를 한 것이라는 게 드러난다.
드디어 재판이 열리고, 판사는 법정에 커다란 백묵원(白墨圓)을 그려놓고, 그 안에 아이를 세우고, 그 양쪽에 친모와 양모를 세워 각기 어린아이의 팔을 끌어당겨 이기는 쪽에게 친권을 부여하겠노라는 이야기를 한다. 끌어당기기에서 양모인 하녀가 아이의 비명소리에 참지 못하고 그만 아이의 손을 놔 줌으로써 친모에게 아이를 빼앗기지만, 판사와 참관인 모두가 양모인 하녀의 모성애를 긍정적으로 평하고, 아이의 친권을 양모에게 부여하는 감동적인 귀결로 연극은 끝이 난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각 극단에서 변형된 제목이나 축소시켜 공연을 해 왔는데, 인천시립극단에서 <하얀 동그라미 재판>으로 제목을 바꾸고 창과 노래가 곁들여 진 사극(史劇)으로 만들었다. 관세음보살을 연상시키는 의상과 모습의 여성 해설자가 등장해 무대를 누비며 창과 노래로 극을 이끌어 한편의 서사극(敍事劇)을 펼쳐보인다. 출연자들의 합창이 이어지고, 극의 진전과 전개는 원작에 충실할 뿐 아니라, 원작을 뛰어넘는 부분도 눈에 띈다. 그리고 인천시립극단 단원과 인천 학생극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고교생들을 출연시켜 청장년(靑壯年)이 함께 출연하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대축제로 연출된다.
무대는 배경 가까이 세자(三尺) 높이와 아홉 자 폭의 단을 가로 놓고 그 좌우에 계단을 달아놓았다. 단 위에는 여섯 개의 비석을 세우고, 단 아래 중앙에 통로와 양쪽에 방이 있어 극의 진전에 따라 사용된다. 사극의상과 창 칼 등의 설정이 어울리고, 배경음악과 노래도 극적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분장에 공을 들인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대단원의 재판장면에서는 원작의 백묵(白墨)으로 원을 그리는 대신 포대에 담긴 백색분말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고, 극의 말미(末尾)에 조명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강조하듯 비추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다.
서국현, 강주희, 김현준, 강성숙, 최진영, 김문정, 김태훈, 송예은, 군순정, 이신애, 이규호 등 시립극단 연기진과 김미란, 배준상, 백수민, 안상호, 엄채영, 윤세민, 이선영, 이소영, 이종현, 장새영, 한길웅, 문혜림, 박태인, 백종훈, 손자영, 오정율, 이종석, 탁수경 등 학생들 출연진의 호연과 열연, 그리고 열창은 한국연극의 발전적 장래를 예측하기에 충분해 관객의 갈채를 받는다.
협력연출 손경희, 음악 안현진, 무대미술 송용일, 의상 손진숙, 조명 박석광, 움직임 김원범, 분장 이정희, 소품 기태인, 노래지도 이신애, 사진 유재형, 동영상 MSEGTV, 홍보디자인 김미연, 기획 김화산·이옥희·이돈형, 홍보 김새롬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 인천시립극단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원작, 배삼식 번안·각색, 주요철 연출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을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어 냈다
3, 강북연극협회 극단 삼각산의 오영진 작, 송정바우 연출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강북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강북연극협회 극단 삼각산의 오영진 작, 송정바우 연출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관람했다.
오영진(1916~1974)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에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고, 1938년에 <영남여성의 내방가사>라는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작가가 되기 위해서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를 연구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 근무하고, 1945년 조선민주당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사무국차장에 피임되었다. 1952년 중앙문화사 사장 및 월간 ‘문학예술’ 주간을 역임하였고, 그 뒤로도 예술원 회원·국제펜클럽회원, 국제연극인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ITI) 한국본부부위원장, 시나리오작가협회 고문, 국제대학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에 처녀시나리오 <배뱅이굿>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맹진사댁 경>’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
오영진은 안창호(安昌浩).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검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만식의 측근으로 우익민족주의 정치운동을 벌이다가 월남하여 공산테러리스트에게 총격을 받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을 만큼 철저한 항일반공투사였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로는 희곡과 시나리오, 영화평론 등을 썼으며, 오리온영화사를 설립, 운영하였다. 6.25동란 중에는 월남문인들과 함께 문총북한지부(文總北韓支部)도 만들었고, 월간 ‘문학예술’지도 운영하였다. 전쟁 직후 미국을 시찰하였고, ITI한국본부부위원장으로 유럽도 여행하였다. 대표적 시나리오로 꼽히는 <시집가는 날>로 아시아영화제의 최우수 희극 상을 받았고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 등 3부작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소재의 원천으로 한 작품이며, <나의 당신>이나 <허생전> 같은 작품은 고전소설의 현대적 재창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영진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1947년 11월 초, 그가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할 때 지니고 온 것으로, 1949년 6월, 극예술 협회에 의해 이진순 연출로 공연되었다.
무대는 쩍 벌어진 대청을 가운데로 사랑방과 안방이 보이는 주택이다. 하수 쪽에 대문이 있는 것으로 설정되고, 상수 쪽은 내실과 부엌으로 통한다. 울타리는 대나무로 조성되어 있다. 대청 오른쪽 낮은 탁자에 전화기가 놓이고, 방안에는 병풍이 보인다. 술상 바구니 등이 소품으로 사용된다.
주인공인 이중생은 전형적인 모리배로, 일제강점기 때에는 자신의 외아들까지 징용 보내는 등 친일행각으로 사리사욕을 꾀하고, 일본이 패망한 뒤에는 광복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기회로 온갖 비리를 일삼는다. 게다가 달러 융자를 받을 목적으로 자신의 둘째 딸 하연을 원조기관의 미국인 직원에게 정부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장차 장관까지 될 것을 꿈꾸고 있었으나, 그의 온갖 비리가 하나하나 밝혀지며 경찰에 잡혀가게 되고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다. 업 친 데 덮친 격으로 딸 하연을 정부로 들여보낸 미국인 직원이 실은 사기꾼이라는 게 알려지는 장면에서 암전된다.
조명이 들어오면, 보석으로 나온 이 중생은 고문 변호사 최 씨와 짜고 재산을 지킬 방법을 찾다가 궁여지책으로 전 재산을 사위인 송달지의 명의로 돌리고 자살한 것으로 꾸민다. 그 이유는 의사인 송달지가 의술이 우수하고 사람됨이 성실하나, 다른 능력은 부족하기에 이중생의 충직한 재산 관리인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판단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사망 진단서에 도장을 찍어달라니까 사위 송달지가 이를 거부하니, 이중생은 다른 도장으로 위조해 사망 진단서를 작성한다.
다음 장면은 자살로 위장한 이중생의 거짓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조문객이 올 때마다 죽은 체하며 누워있기를 수차례 하다가 국회특별조사위원회의 김 의원이 이중생의 집에 찾아온다. 김 의원의 등장으로, 재산을 지키고자 했던 이중생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난다. 김 의원은 이중생의 사위 송달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으로 무료 병원 건립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부추기고, 평소 ‘의사는 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지 장사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송달지는 이에 동조해, 김 의원의 무료 병원 건립 제안을 받아들인다. 김 의원이 퇴장하자, 병풍 뒤에서 나온 이중생은 길길이 뛰며 송달지와 최 변호사에게 화를 내며 따지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을 어쩌랴?. 게다가 이 과정에서 최 변호사까지 화를 내며 퇴장한다. 이중생은 송달지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송달지는 묵묵히 욕설을 듣고 있다가 나라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하니, 이중생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때 징용 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아들 하식이 집안의 정황을 듣고는 매부 송달지의 의견에 동조하며 아버지를 비판한다. 결국 거짓 자살극까지 꾸며가면서 재산을 지키고자 했으나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아들에게까지 외면을 당한 이중생은 자살의 길을 택하는 것에서 연극은 끝이 난다.
장미자, 정혜승, 하덕성, 최승일, 유준원, 김미준, 현대철, 류지애, 박귀임, 이미애, 김 필, 안성헌, 김시영, 송영숙, 권용범, 김용운, 송민석, 신지현 등 강북연극협회 극단 삼각산 소속 연기자들의 탁월하고 출중한 기량과 경륜은, 이 작품에서의 성격창출이나 연기면 에서 국공립극단 공연에서보다 오히려 뛰어남을 드러낸다.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은 두 시간의 공연에 관객을 극에 완전히 몰입시키도록 만들고 우레와 같은 갈채를 이끌어 낸다.
무대디자인 이윤수, 조명디자인 김용주, 음각작곡 신사빈, 의상디자인 홍정희, 어시스트 이원영, 분장 최 란·현상미·차소영·오하영, 조명감독 박진희·임일환, 조명크루 김종인·이지은, 조명오퍼 현진호, 음향오퍼 이규태, 기획협력 김대환, 조연출 진혜정·채동훈, 영상 김균열, 외쇄디자인 강동성, 무대제작 에스테이지, 진행 김경숙·박삼녕·홍하영·나하람·이지영, 인쇄 반석문화인쇄사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이 하나가 되어, 강북연극협회 극단 삼각산의 창단 10주년 기념공연 오영진 작, 송정바우 연출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어 냈다.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