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희 선생님의 <<연극의 정석>>을 읽고/ 우상전

백성희 선생님의 <<연극의 정석>>을 읽고

 

우 상전(연극배우)

 

사실 백성희선생님의 회고록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선생님은 그 오랜 세월동안 무슨 생각을 하시며 사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컸다. 그래서 출판기념회에 가 보았다.

회고록을 열심히 읽고 있는 1월 9일 아침 9시 조금 넘어 폰이 울리더니 선생님의 영면을 알렸다. 애도의 마음으로 선생님의 회고록을 읽었다.

나는 백성희, 장민호선생님과 옛 국립극단에서 19년을 함께 생활하면서 누구보다도 두 원로들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 회고록에서 어르신의 숨겨진 연기술의 비밀 – 선생님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천재성’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집필자의 탓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너무 늦은 회고여서 그런지 크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우리 연극계가 두 원로를 그저 단순히 ‘우상(偶像)화’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드는 게 없었다. 사실 선배의 경험, 그분들의 예술에 대한 인식 등은 후학들을 위한 좋은 ‘교재’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더욱이 우리처럼 연기술이 미미한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차라리 내가 인터뷰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문성이 떨어지는 ‘환담 나누기’ 회고록을 꼭 만들어야 하는지? 이제는 우리 모두가 성숙한 지성인으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이런 작업은 현재에도 ‘한국연극’지의 ‘연기 메소드를 찾아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좌우간 우리에게 연기의 전문지식이 필요함을 크게 느낀다.

내가 보기에 이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에서 학술적(?) 가치는 배우 김금지선생의 회고담이 전부일 것 같다.

“나는 주연배우가 되고 싶어 (국립극단 연수생시절) 백성희선생의 모든 것을 관찰했던 사람이예요. 그리고 그분에 대한 칭송은 그분의 노력하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요. 백선생님은 배역을 맡으면 혼자서 연구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분 같았어요.”

“사실 ‘산불’에서 어머니 역은 썩 잘 맞는 배역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사실 백 선생님 연기에는 번역극 투도 있어요. 물론 저도 있고, 그것은 그 시대 배우들이 가진 일종의 공통점일 거예요. 그런데 백 선생님은 그런 약점을 극복하고 어머니 역을 완성해 갔어요.”

우리가 역사를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지 않던가.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의 지나간 연극세상, 연기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회고담’ 셋(3)

 

하나, 백선생님은 국립극단에서 왜 외부 예술감독의 영입을 반대하셨을까?

 

회고록에 의하면 “(외부에서) 국립극단이 체계화되기 위해서는 예술감독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의 국립극단은 무용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 논리가 제기되기도 했다. 바깥의 여론이 날카로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선생은 술회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나는 일찍부터 예술감독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한 다소 이른 시기의 단장이었다. 이 문제를 위해 회의까지 열게 되었다. 김문무 (공무원)극장장의 주재 하에 열린 회의에서 예술감독이 극단장을 겸한다는 조건으로 예술감독을 두는 방안이 합의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그러니까 국립극단의 미래를 위해서 외부에서 배우가 아닌 예술감독의 영입을 원했는데, 단체는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을 배우인 단장이 겸임하기로 했다는 말인가. 옛 국립극단은 결국 배우인 단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아니한가.

결국 영원히 배우들만이 살아남아 아예 정년도 없는 기득권을 천만년 누리기를 염원하다가, 결국에는 ‘국립단체의 구조조정’이라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국립의료원’과 함께 ‘내셔널의 재단(財團)화’라는 철퇴를 맞고 단원들만 해산당하고 만 게 아닌가.

 

둘, 선생님은 왜 국립극단에 ‘연기교육’을 위한 체계를 세우시지 않았을까?

 

“내가 어떻게 배우 수업을 받았는지가 최근에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시절의 수업의 골자를 남겨둔다. 나는 배우로 데뷔하기 전에 빅터무용연구소에서 17세의 나이에 이미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일단 연수생은 기본적으로 음악과 발성을 공부해야 했다.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코리붕겐 시간도 있었다. 발성을 배워야 했고, 발레, 신체적 움직임을 연마했으며, 화술도 전수받아야 했다.” 벌써 일제강점기시대에도 이런 연기교육들이 수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연은 이렇다.

“당시 연극계는 ‘신극과 신파극’의 거대한 구분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순수지향적 연극’과 ‘대중지향적 연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순수지향’ 쪽 –신극 쪽에서는 배우훈련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체계가 없었다.

반면 ‘대중지향’ 진영- 신파극에서는 배우에게 필요한 신체 및 연기훈련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는 곳이 적지 않았다. 그곳 중의 한 곳에서 나는 실기를 착실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빅터무용연구소를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빅터가극단에 입단했다.”

이런 체험을 가지신 분이 왜 국립극단에서 후배들을 위한 연기교육의 체계에는 무관심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럼 신극을 추종하던 사람들에게 물든 탓인가? 놀랍지 않은가! 당시에도 신극이랍시고 새롭게 순수를 내세우면서 교육체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연극을 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계신다.

 

셋, 왜 선생님은 영화배우를 하지 않으셨을까?

 

회고록을 읽으면서 든 의문이 있다. 왜 선생님은, 무슨 이유로 당시에 ‘영화계’로 진출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이다. 과연 연극이 좋아서, 이게 전부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60여 년에 가까운 연기 생활에서 두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처음은 1956년에 유현목감독의 작품인 ‘유전의 애수’였다. 두 번째 출연은 최근의 일로 허진호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전부다.”

“첫 영화인 유감독의 작품에 출연 당시, 나의 처지는 일종의 위기 상황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고 공연 연습은 지지부진이었다. 하루 종일 상대역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가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영화배우는 인기, 명예와 돈을 얻을 수 있는 배우로서는 최고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배우가 영화계로 진출한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연극연습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좌우간 ‘인생은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던가. 백선생님은 연극무대를 고수하므로 해서 연극계의 ‘신화창조’의 영광을 누리고 평생을 사셨던 것도 사실이다.

 

백성희선생님이 주신 교훈

 

  1. 배우의 연기력은 ‘시대의 산물’일 뿐

 

요사이 이론가들이 선배배우들의 연기론이나 배우론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예전엔 배우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면 특정배우에 대해 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연기론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힘들어 유명배우의 배우론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배우론이나 연기론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게 나의 견해다. 솔직히 말해 선배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연애담’을 듣는 것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왜 그럴까? 배우의 연기란 그저 ‘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시대의 유행(트렌드)이 지나면 배우의 ‘명연기’도 시효가 만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의 연기론에는 정답도 없고, 또 정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개인의 구술방식의 배우열전은 ‘그저 그런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연기’가 뭔지를 모르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난센스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저 패션에서 유행이 지나버린 의상스타일을 더듬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긴 의상은 ‘형체’라도 남아 스타일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연기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의 패션트렌드는 무엇인가? 스티브 잡스가 유행시킨 것인데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를 입는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멋을 내는’ 놈코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평범하다는 노멀과 핵심을 뜻하는 코어(core)의 합성어라고 한다. 연기의 트렌드를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예컨대 ‘번역극 투’ 연기(화술)를 더듬어 보아도 그렇다. 당시의 (연기의)유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흐름? – 솔직히 정확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 좌우간 왜 배우들이 한국말을 하면서 서양말 억양을 흉내 냈을까?

짐작 하건데, 당시에 우리에게 미국(서양)사람을 닮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을지 모른다. 당시 여자들의 최고의 선망대학이 ‘이화여대 영문과’인 게 이를 상징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가까이 하고 싶다는 내심이 한국 사람들에게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번역극을 해야 한다면 서양인으로 좀 더 가까이 접근하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TV에서 외화더빙을 보면 알 수 있다. 관객에 대한 ‘서비스정신’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연기론은 시대에 맞춰 ‘이제는 그렇게 연기하면 안 된다’고 설명하는 게 전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기에서 시대감각을 빼버리면, 배우론은 자칫 배우개인의 ‘우상화’로 끝나버릴 위험이 크다.

이건 배우란 원초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관객의 취향에 맞춰가며 인기를 얻는 존재여서 그렇다. 따라서 지금도 끊임없이 시대감각이 작동하고 있는 게 연기다. 그래서 학술적이 아닌 배우개인의 연기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1. ‘배우 목소리’의 변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북한의 최신영화 ‘김동무 하늘을 날다’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똑같이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북한배우들은 왜 그런 어조(억양)로 말하는 것일까? 신기하지 않은가.

확실히 ‘사투리의 사용’과는 또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 게 배우의 연기(화술)이다.

아직도 북한은 (60년대의) 남한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와 같은 연기를 고수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김일성수령이 자기취향에 맞추려 배우의 억양을 바꾸지 못하게 한 게 그대로 고착한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70을 넘긴 북한의 여자 아나운서 ‘리춘희’가 갑자기 나타나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선동적이고 격앙된 어조’로 멘트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감정과잉’적 멘트에 우리 모두가 쓴 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북한의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신기하고(?) 부자연스러운 어조와 리듬이 유튜브를 타고 세계인들의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남한 내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선후배들의 연기(화술)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우리 관객들이 배우 ‘윤석화의 연기’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 역시도 ‘격정적’이고 툭하면 관객에게 눈물을 보이며 선동적’(?)어조를 구사했는데 ‘리춘희’ 이상으로 크게 먹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매스컴에 의해) 한국의 대표적 연극배우로 칭송되어 관객들은 그를 한국의 ‘연극배우의 상징’으로 여겼던 게 사실이다. 이러니 (우리의 현실에서) 배우의 연기론만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허망한 것은 없을 것이다.

또 ‘사극연기’는 어떠한가? 그거야말로 후세들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사극의 어조’도 역시 엄청나게 변천을 거듭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사례는 우리의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다. 서른도 안 돼 ‘동아연극상’에서 연기상을 받은 배우가 요즘에 와서는 ‘해서는 안 되는 연기’의 샘플로 후배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 그의 연기가 그 시대에는 왜 연극계 심사위원들에게 먹혔을까?

 

  1. ‘라디오 드라마’가 미친 영향

여기서 배우의 목소리에 ‘라디오드라마’가 미친 영향을 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우’의 목소리가 배우들의 목소리에 끼친 전반적인 영향을 말이다. ‘성우’라는 직업이 서양에는 없고 일본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인 듯하다.

좌우간 라디오가 미친 영향은 아나운서의 ‘축구경기중계’가 TV로 바뀌면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려니, 자연히 일상처럼 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성우들이 목소리를 꾸며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과 다른 어조로 목소리를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영화마저도 성우에게 ‘더빙’을 맡기는 후시녹음이어서, 전반적으로 성우의 목소리가 모든 장르의 배우들의 목소리에 미친 영향이 큰 게 사실일 것이다. 요즘은 TV목소리가 영향을 미치듯이 말이다. 이처럼 시대의 요구와 희망에 따라 목소리를 내야 하는 존재가 배우다.

사실 영화가 ‘후시녹음’를 하지 않았으면 영화배우 김지미나 신성일 같은 스타가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있다. TV초창기에는 주로 미국드라마(미드)와 ‘주말의 명화’가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성우더빙’이야말로 ‘번역극 투’의 전형이었다. 정형적인 ‘노랑목소리’였다. 이처럼 ‘노랑목소리’도 따지고 보면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랑목소리’가 사라지고 외화도 ‘자막처리’가 대세가 된 게 사실이다. 시청자들이 ‘비록 배우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자연스러운 배우의 목소리를 듣는 게 더 좋다.’고 염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때 노인층이 ‘자막을 읽을 수 없으니’ 다시 더빙을 부활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비(非)학술적 회고담이야말로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더구나 녹음이나 영상을 통한 자료도 없이 노배우들의 막연한 구술에 의해 연기론이 논하는 것은 그저 ‘개인 찬양’이라는 후진성을 노출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배우론의 접근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요즘의 연기론

 

백선생님의 경우만 해도, 신파극, 초창기 신극, 앞에서 거론한 ‘번역극 투’, 이해랑선생의 초창기 신파적 ‘리얼리즘 연기’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화술(연기)의 변화를 겪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의 트렌드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변했기에 대학의 연기교육마저도 ‘구닥다리’라며 마냥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에 영화배우 공유가 자기 출연영화의 ‘제작보고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연기가 아닌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의 말을 통해서 요즘의 연기의 경향(트렌드)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관찰에 의하면) 컬러TV의 등장에 이어 1990년 ‘민주화’를 기점으로 한국의 연기가 명확히 변화했다. 한마디로 대중의 기호가 바뀌게 된 것이다. 배우의 연기가 일상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요즘의 의상처럼 ‘연기하지 않는 듯한 연기’가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를 좀 더 학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그 이전의 배우들은 ‘라디오드라마’와 외화더빙 등의 영향 등으로 목소리를 꾸며 등장인물로의 변신을 꾀하려한 게 대세였다. 그래서 그때 배우들은 일단 역할을 맡으면 자기가 일상에서 내던 ‘자기 목소리’를 포기했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목소리를 변형시켜 다른 어조와 리듬으로 역할의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했다. 당연히 배우들이 등장인물로 변신을 꾀하는 ‘명연기’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번역극 투’도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배우의 얼굴이 그대로 화면에 비치는 시대로 돌입하게 되자 시청자들이 이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배우들이 일상의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일단 배우가 일상의 자기 목소리에 변화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혹자는 이를 ‘리얼리즘연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젊은 연극인들이 선배배우들의 대사를 들으면 ‘대사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대들은 자기 목소리로 등장인물의 내면과 정서를 표현해도 충분히 인물창조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공연히 부자연스럽게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캐스팅된 것으로 변신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구시대 선배배우들은 이런 변화에 적응을 못해, 아니 적응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한번 길들어진 목소리에 새롭게 변화를 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화술을 익혀야 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복지차원에서 원로배우들의 활동을 보장하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니 무대에서 신구세대가 결합된 오래된 극단의 공연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목소리의 전시장’처럼 보이는 게 현실이다.

결국 대학의 연기교육도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구닥다리 연기교육’을 실시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변화의 기점에서 연극배우 윤석화의 연기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연기교육이 제대로 행해지려면 모두가 모여서 ‘시대의 감각’에 대한 토론과 논의가 우선되어야 하는 게 진실이다. 왜? 연기는 시대의 산물이어서 모두에게 시대적 ‘합의’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무지함(?)은 이것마저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마저도 모두가 ‘쉬쉬하면서’ 숨어서(?) 가르치고 있으니 한국의 연기교육이 후진성을 면키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교수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모른 채, 이론가들이 나서서 선배배우들의 연기를 논하고 있으니 정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요즘의 영상매체에서 활동하는 젊은 배우들은 아예 ‘연극 식’ 연기교육에 거부감을 가질 정도다.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입시생들만 여전히 연극연기인 ‘구닥다리’(?) 연기를 익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사회진출이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이론가들이 선배배우들의 배우론을 꺼내는 ‘무감각’은 심히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런 변화에 절대 비껴갈 수 없는 게 연극이다. 왜? 영상매체의 배우들은 크게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대배우 이순재선생이 ‘목을 긁으면서’ 발성을 해도 TV에서는 크게 어색하지 않는 게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그분마저도 라이브인 연극무대에 서면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변화에 가장 예민해야 하는 게 무대배우들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인 게 사실이다. 전혀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게 외려 연극 장르다.

따라서 무대연기에서 가장 큰 과제는 시대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목소리를 낼 것인가? 또 무대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변화된 목소리가 낼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연기’가 미덕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런 목소리에 불만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이유는 ‘힘(에너지)없는 연기’라는 것이다. 그런 연기는 마냥 배우가 ‘입술’만 움직이는 ‘TV의 안방연기용’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아직도 배우의 에너지 넘치는 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에너지’란 단순히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선 굵은 연기’ – 무대에 가만히 서있어도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연기를 지칭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그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게 바로 연극배우들이다. 더구나 대극장공연이 많아지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무대연기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게 바로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연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음성훈련’이 정석이다. 왜? 목소리에 힘이 있으면서도, 배우의 몸 전체가 강렬한 표현력을 갖는, 그러면서도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연기가 무대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백성희선생님의 목소리가 주는 교훈

 

백성희선생님의 배우론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선생님의 뛰어난 ‘목소리’일 것이다. 정말 백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목소리에 힘이 있고 딕션에서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선생님 자신도 자신의 ‘연기력’이 바로 자신의 ‘목소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신다. “(내가) 한 번도 쉰 목소리로 연극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고 싶다. 백성희가 피로에 찬 대사로 하는 연극을 본 사람은 백성희 70년 연극역사에는 없을 것이다.”

또 이런 내용도 보인다. “6. 25가 나자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고 모윤숙과 함께 서울 시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에 참여했다. 목소리가 좋은 나를 모윤숙이 청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의 우수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1.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후학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당연히 선생님의 뛰어난 목소리이다. 덧붙여 그런 목소리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가를 아는 것일 거다. 물론 ‘천부적’인 것이다. 나는 그런 행운이 바로 선생님의 몸, 그 중에서도 ‘얼굴’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이해가 잘 안 되면, 이태리의 테너가수 ‘파바로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그의 탄탄한 목과 가슴상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배우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주장이다.

그건 탤런트 윤여정선생을 떠올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윤여정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다. 이점에서 백성희선생님과 흡사하다. 물론 윤여정은 허스키한 음색이고, 선생님은 카랑카랑하다. 하지만 이건 성대가 다른데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목소리에 딕션이 아주 명확하고 힘이 있다는 점에서, 우선 두 분이 생김새에서 아주 닮은꼴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좀 수긍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배우의 구강구조와 코를 형성하고 있는 생김새(얼굴)가 배우의 좋은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원천이어서 그렇다. 목소리가 형성되는 구강과 부비강이 얼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배우의 ‘타고난 신체조건’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연기력에게 가장 중요한 목소리의 성능은 바로 배우의 ‘타고난 신체조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게 바로 배우의 ‘악기의 성능’이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배우의 호흡, 발성, 공명이 배우의 연기력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게 배우의 타고난 신체조건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악기의 성능’이 되는 신체적 조건일 것이다. 이게 연기력이 되므로, 배우는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목소리의 성능을 높이는 ‘음성훈련’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배우의 ‘신체적 조건’에 대한 개념은 물론이고 ‘목소리의 가치’나 ‘음성훈련’마저도 도외시 하고 있는 실정이다.

 

  1. ‘목소리의 성능’에 관여하는 것들

 

배우의 타고난 신체조건이 만들어내는 ‘목소리(악기)의 성능’이 역시 배우에게 선천적으로 작동하는 호흡법과 발성법, 공명기관과 결합하여 배우의 연기력을 결정하게 된다. 물론 이건 아직 연기교육을 받지 않은 원초적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초보자의 태생적 연기력은 당연히 이에 크게 의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처음 대사를 치려고 접근할 때 어떻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가 하는 ‘선천성’ – 천부적 재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천재적 배우’라는 칭호가 연기세상에서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사실 이 부분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왜? 이때 신체만이 아니라 배우의 정신세계인 이완상태나 대본해석력(문학성)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추후에 설명하겠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배우의 구강구조, 코, 연구개, 경구개, 혀의 놀림, 사이너스공명 등이 배우의 목소리에 크게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서 배우의 신체부위인 얼굴의 생김새, 흉곽의 크기, 목둘레, 아랫배, 앞이마 등의 배우의 생김새(골격)가 배우의 목소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위가 목소리를 내는 배우의 ‘악기’이자 ‘악기의 성능’에 관여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배우의 얼굴 생김새와 흉곽, 구강구조는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니 딕션만 해도 혀놀림, 연구개, 경구개 등의 구강구조에 결함이 있으면 제대로 발음도 안 되고 전달력에서도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관찰에 의하면 좋은 배우는 대사를 칠 때 가슴을 울려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발성습관도 대개는 선천적으로 작용해 연기력에 기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것들이 서로 결합해 배우연기의 ‘천재성’을 결정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흔히 배우가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만 해도 그렇다. 즉 배우의 혀가 짧지 않은데도 얼굴의 구강구조나 사이너스공명, 즉 코 주변에 산재해 있는 ‘부비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므로 해서 ‘혀 짧은 소리’를 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실제로 짧은 경우도 간혹 있지만, ‘일상에서’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는 배우의 잘못된 발성습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볼펜을 입에 물고‘ 연습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두성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도 목소리를 확장시키지 못해 무대발성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런 결함들을 개선해야 이 시대의 트렌드인 ‘자연스러운 연기’도 가능해질 것이다.

 

  1. 배우에게 왜 ‘음성훈련’이 필요한가?

 

  1. 배우의 악기는 일반악기와 달리 제작전문가인 장인(匠人)에 의해서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의 악기는 낳아주신 ‘어머니의 작품’이다. 따라서 미완성품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배우는 악기연주자들처럼 좋은 연주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일부러 명기를 소유하거나 임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배우의 악기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성능이 중요성을 갖는다.

  1. 따라서 배우는 늘 자신이 자기의 악기의 성능을 스스로 업그레이드할 훈련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장인에 의한 완성품이 아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성능’의 우수함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2. 따라서 배우는 불완전한 자기 ‘악기’가 망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하고 길들이지(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악기의 운용기술(연주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잘못된 습관에 빠지면 않게 말이다.

설령 타고난 성능이 좋지 않아도 훈련을 하고, 잘 운용(연주)해서 좋은 기능이 되도록 해야 한다. 되레 잘못 관리해서 좋은 성능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내가 항상 대학교육과 연극판을 원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우들이 자기 악기를 쉽게 망가뜨리도록 방치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배우가 자기 연기에 필요한 인물이나 작품의 분석, 해석, 화술구사 등은 타인 – 작가, 번역가, 연출가, 보이스코치, 선배, 동료로부터의 지적이나 도움으로 얼마든지 이를 보전할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의 성능’이 부족해 표현이 안 되는 것은 당연히 배우자신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장에서는 이런 말을 듣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너 연기(화술)가 안 되는 것은 음성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거야!” 또는 “네 악기의 성능에 애당초 결함이 있어서 그런 거야!”

고작해야 화술에 대한 지적이 전부다. 왜? 우리는 ‘악기의 성능’과 음성훈련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너는 앞니를 성형한 게 결정적인 실수야!” 이런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개념 없이 배우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성형을 해대는 것이다.

이런 실정이나 ‘음성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솔직히 백성희선생님의 연기력이 어디서 유래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배우론을 논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1. ‘음성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음성훈련’이 없는 곳에서는 배우가 발성을 위한 ‘호흡의 지지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게 가장 커다란 손실일 것이다. 왜? 당연히 호흡이 짧아져 긴 대사를 칠 때 자꾸 대사가 끊어져 어미처리가 안 될 뿐 아니라, 감정의 분출에서 약세를 보이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이른바 ‘힘없는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배우의 대사가 관객에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되며, 또 목소리의 강약고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게 배우의 대사처리(화술)의 핵심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배우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아무리 작가가 리얼리티를 살려 구어체로 대사를 구사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대사는 ‘글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극을 구성할 때 일상처럼 ‘소리 말’로만 대사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연기’도 배우의 목소리의 성능이 좋아야 가능해지므로 배우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게 바로 ‘음성훈련’이다. 그를 통해 배우의 목소리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에너지가 넘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일상처럼 ‘연기하지 안 듯’ 연기를 하는 게 대세라지만 ‘연기는 연기여서’ 대사가 화술로서의 특수성을 갖게 마련이다. 장르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강한 감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영상매체도 마찬가지다. 항상 ‘멜로드라마’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어체인 ‘글말’이라도 자연스럽게 일상처럼 목소리를 내려면 일단 ‘음성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작가들도 대사에 구어체(일상의 소리 말)를 적극 구사하지만 여전히 ‘대사는 대사’일 뿐이다. 그래서 일상처럼 자연스러움을 얻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라이브 무대’인 연극에서는 말이다.

거기다 연기에는 ‘사극’이라는 장르도 존재한다. 또 연극배우들에게는 ‘무대발성’이라는 특수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배우의 목소리에는 일상과 다른 ‘에너지’가 요구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배우들에게는 일상과 다른 호흡과 발성기능이 요구되며, 공명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니 체계적인 훈련이 없으면 당연히 이러한 것들이 배우의 미완성품인 악기와 ‘선천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렇게 되니 표현력에서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대사의 의미전달과 발음이 부정확하고 소리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작금의 한국연기의 현실이다.

  1. ‘악기의 성능’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

 

여기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게 목소리의 성능이 ‘배우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일 것이다. 단적으로 ‘악기의 성능’이 배우의 목소리에만 영향을 미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연주자인 배우가 사용하는 악기가 연주자와 ‘동일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일반악기연주처럼 연주자와 악기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있다.

따라서 배우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악기의 동일체가 배우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아야 배우들이 ‘음성훈련’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앞에서 초보시절에는 배우의 타고난 악기의 성능이 연기력의 우열을 결정하게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악기의 성능이 배우의 정신세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가 ‘동일체’라는데 있다. 그래서 악기의 성능이 연주자(배우)의 연주술만이 아닌 정신세계에도 직접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마련이다.

우선 악기의 성능이 좋으면 배우가 표현력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 동일체에서는 악기의 성능이 연주자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우가 자기의 악기가 고음을 잘 낼 수 있다고 여겨지면 배우인 연주자는 당연히 고음에 자신감을 갖고 자유자재로 이를 목소리로 표출하려고 들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능이 좋으면 배우에게 ‘이완’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배우가 상상력에서도 크게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또 이완은 당연히 신체적 움직임을 원활하게 할 것이며, 배우의 대사암기력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호흡’도 자유로워 ‘발성’도 잘 될 것이고 ‘공명’ (긴장은 공명의 적)도 잘 이루어져 목소리의 성능이 좋아질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연기에서의 ‘악기의 성능의 가치’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음성훈련’의 가치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악기의 성능이 좋으면 (또는 좋아지면) 배우의 목소리가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자유롭게 대사를 떠올리고 감정을 분출하게 되며, 수시로 목소리를 높이고 낮출 수 있으며, 자유롭게 휴지(포즈)를 만들어내고, 말에 강조를 살려 ‘리듬감’이 넘치는 연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1. ‘동일체’의 오류

 

사실 배우가 ‘음성훈련’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일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연주자가 자기의 악기사용방법을 별도로 익힐 필요가 없다는 착각 때문이다.

배우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미 악기의 사용법을 다 익혔다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훈련과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게 연기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이로 인해 조기교육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단기간 교육으로도 충분히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여겨 대학입시에서도 별 준비 없이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 학생들이 기초교육을 무시하고 ‘운이 좋으면’ 얼마든지 배우로 대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렇다. 또 교육의 부실과 훈련이 체계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연기교육의 ‘무용론’이 나오는 것도 그렇다.

일상처럼 어휘만 떠올리면 연주술이 저절로 발휘될 거라는 선입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말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면, 화술(연기)에서도 전혀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노래나 춤을 출 때는 별도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말이다.

이처럼 배우세상 전반에 걸쳐 별도로 악기 사용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선입견이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배우의 악기는 미완성품이라는 사실이다. 완성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훈련을 통해 이를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가 완벽한 연기력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분석력이 좋은, 머리가 좋은 배우라도 목소리의 성능이 좋은 배우의 연기력을 넘어서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국립극단의 ‘겨울이야기’의 경우에 연극을 본 관객들이 특정 배우의 역할을 거론하며 “제일 연기를 잘한다!”며 칭송을 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가 칭송을 받는 이유는 많은 출연자 중에 그 배우만이 유일하게 ‘가슴으로 발성’을 하는데 있다. 그게 그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물론 당사자는 그걸 인지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덧붙여 할리우드배우이신 오순택 선생은 출판기념회에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에서는 연기를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놀랐다.”

정말 그렇다. 한국은 진짜로 배우의 몸(신체조건)의 중요성을 모르는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이건 이론을 전공한 유학파들이 한국연극에 만들어놓은 민낯이기도 할 것이다.

 

  1. 왜 ‘보이스코치’가 필요한가?

 

‘동일체’로 인한 오류는 또 있다. 아마 가장 큰 맹점일 것이다. 즉 배우자신이 자기 악기의 성능에 대한 ‘객관성’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좋은 성능이 배우에게 연기력(표현력)을 발휘할 ‘영감’을 주지만, 불행히도 자기 악기의 성능이 ‘미비한 것’은 이를 배우자신이 감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미완성품인 악기여서 부족함이 적지 않을 텐데, 배우가 자기 악기의 성능의 약점을 알기 힘들어 이를 개선하려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동일체에서는 ‘객관성’에 맹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맹점으로 배우들이 남의 조언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동일체의 커다란 맹점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자기 악기에 대해서 ‘객관성’을 갖기 힘들어서 그렇다.

그래서 성악가들은 ‘객관성’을 가진 ‘스승이나 멘토’를 찾아 나서는 게 일반화된데 반하여 배우들은 아직도 이에 대한 개념이 없다. 교육의 부재를 실감한다. 아마 이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라가 한국의 연극세상일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보이스코치’가 존재하게 마련인데 말이다. 그런 주제에 무슨 배우론을 떠들고 있나싶을 정도다.

다시 말해 ‘동일체’ 악기의 강점은 ‘영감’을 주어 연주자를 자극하지만, 맹점은 연주자가 자기 악기의 미완성으로 인해 좋은 연기를 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배우들 중에 자기 악기의 성능이 어떻게, 얼마나 부족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아마 이를 감지하고 있다면 우리의 ‘음성훈련’이 이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조언자의 재능이나 도움에 따라 배우의 연기술에 우열이 가려지는 현실을 노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배우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어머님이 주신 미완성품인 악기를 가지고 마치 완성품인양 잘난 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력이 많은 선배들은 더욱 그렇다.

 

  1. ‘악기의 성능’이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사람

 

  1. 목이 가늘고 길며, 가슴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
  2. 얼굴이 잘 생긴 사람, 영화배우 김지미, 신성일을 떠올려 보자.
  3. 대체로 몸이 유연해 신체적 표현력이 좋은 사람
  4. 축농증, 비염 등 질병이 있는 사람, 또 앞니를 교정(성형)한 사람
  5. 대체로 여자보다는 남자, 그래서 연극배우 중에 여자들이 각광을 받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제는 배우들의 타고난 신체조건이 바로 배우 자신들의 연기력의 원동력이 된다는 나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부적으로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배우가 사용하는 악기, 즉 목소리의 성능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게 곧바로 표현력(연기력)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따라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음성훈련’이 배우의 연기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단 악기에 성능이 없으면 표현력에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니 한국의 배우들이, 그것도 대극장 무대에서 활동해야 하는 연극배우들이 ‘음성훈련’의 개념을 갖지 못해 훈련을 등한시 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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