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장윤정

사라진 아버지가 남기고 간 황량함
– <떠도는 땅> 리뷰-

장윤정

 

작품명: <떠도는 땅>
작: 동이향
연출: 동이향
드라마터그: 김슬기
단체: 극단 두
공연일시: 2016년 2월 13일(토)~2월 28일(일) 평일 8pm, 토요일 · 일요일 3pm(월요일 공연 없음)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2016년 2월 24일(수) pm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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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설 같은, 소문 같은, 떠도는 땅만큼 떠도는 이야기다. 20년 만에 고향을 떠났던 한 인물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돌아와 겪는, 단 하룻밤 동안에 벌어지는 이야기. 깊어가는 밤 가운데 수많은 이미지들이 뒤엉킨 채 덮쳐오는 순간,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순식간에 좌표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야기.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다.

공연은 시골마을 어딘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오래전 떠났던 ‘미스타 노’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일을 지속한다. 양계장 닭들에게 먹일 사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후 위탁양계를 하던 회사의 부도를 알게 되고 남겨진 닭들은 처치곤란상태기에 처치되고 만다. 양계장 비닐하우스는 닭들 간의 약육강식으로 피 칠갑이 되고 그런 닭들을 도살하는 노인들은 너무나도 태연하다. 마치 시골 아낙들이 둘러앉아 김장하듯 털을 뽑고 피를 씻고 목을 치고 내장을 빼낸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생명이랄 것이 없다. 그렇기에 도살 내내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들의 대화는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미스터 리’라는 이름을 가진 연쇄살인범은 그날 밤 ‘미스타 노’와 만나게 되고 인간의 죽은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미스터 리’에게 인간의 죽음과 그 신체는 하나의 사물일 뿐이며 시체를 분절하고 분절된 시체를 조우하는 것은 고깃덩어리 혹은 기계장치를 조우하는 것과도 같다. 역시 생명이랄 것은 여전히 없다. ‘미스터 리’는 시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죽은 이의 표정을 읽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말한다. 노인들은 도살되는 닭의 표정을 알 수 없다. 이들은 대상과 자신을 구분하여 거리두기를 하면서 감정이입을 철저히 배재하고 있기에 생명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공연은 그렇게 스산하고 황량한 이미지를 내내 전달한다. 희망은 없고 오로지 기이하고 괴상한, 그래서 불안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작품의 주인공인 ‘미스타 노’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땅을 팔아 빚을 갚을 셈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삶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죽은 아버지의 시신은 사라지고 영혼만 남은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날 밤 ‘미스타 노’는 아내의 불륜을 알아채고 딸 ‘영지’의 첫 경험을 목격하고 고단한 삶에 지치고 나이 들어버린 첫사랑 ‘영지’를 만나자마자 또 다시 잃어버리며 마지막엔 ‘미스터 리’의 분신과도 같은 커다란 트렁크를 건네받는다. 화장터에서는 잃어버린 아버지 대신 다른 걸 태우고 아버지의 땅에는 오래전에 패전한 병사들의 뼈가 나뒹군다. ‘미스타 노’를 구원할 아버지의 땅이란 건 이 땅에 없었고 그 땅을 남겨둔 아버지는 사라졌다. ‘미스터 리’의 아버지 또한 태어나자마자 불에 타 죽음을 맞았다. 어쩌면 이 땅 위의 아버지란 아버지는 이내 다 사라져버렸거나 사라지는 과정이거나 사라질 예정인지 모른다. 그렇게 떠도는 아버지와 함께 이 땅도 떠돈다. ‘미스타 노’는 아버지가 남겨둔 모르핀으로 떠도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떠도는 땅에 안착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입만 닿으면 벌컥벌컥 넘어갈 컵에 담긴 가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 가래 같은 상황을 입만 대면 넘어갈 텐데 비위가 상해서 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한다. 이 지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간밤의 일들은 지금 현실에 만연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와 병폐의 현상들로 의미가 치환되고 사유는 확장된다. 그리하여 시대적 성찰이 권유된다.

작품은 내내 떠돈다는 것에 집중한다. 머무르지 못하는 것. 안착하지 못하여 불균형하고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죽은 아버지의 영혼은 바람에 따라 떠돌고 오래 전에 죽었던 패잔병들의 뼈가 나뒹굴고 지난 밤 내내 온 곳을 떠돌아다니며 날이 밝아서야 앉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지금을 보게 된다. 체념한 듯 지쳐버린 듯 이제야 앉는 ‘미스타 노’. 그의 이후마저 결코 편할 리 없을 것이라는 건 곁에 놓인 ‘미스터 리’의 트렁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미스터 리’의 트렁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납치한 첫사랑 ‘영지’의 구두를 훔쳐가는 모습에서 아마도 구두가 들어있겠거니 혹은 트렁크 곁에 떨어진 손가락에서 분절된 시신이 들어있겠거니 하는 것이다. 그 트렁크에는 마치 세상의 혼돈을 잔뜩 쓸어 담아놓은 것만 같다. 세상의 불안과 혼돈과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무겁게 담긴 트렁크는 이제 ‘미스타 노’의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전에 ‘미스타 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손에서 놓지 않고 짐 같은 트렁크를 끙끙 거리며 들고 다닐지 모른다. 무엇이 들어있는 지도 모른 채. 아이러니한 그 모습은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이 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들고 있는 이것은 무엇이며 내가 서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러한 일부의 장면들은 순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미스타 노’의 과거행위를 딸 ‘영지’가 행하고 떠돌던 ‘미스터 리’의 트렁크를 ‘미스타 노’가 이어받고 바람결에 실려 오는 아버지의 영혼은 며느리 ‘미세스 노’와 며느리의 불륜상대 ‘김 대리’를 이어 ‘미스타 노’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 작품은 이 땅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그래서 두려운 현실이 오늘의 몫만은 아님을. 오래전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미래까지 다를 바 없음을 암시한다. 밝아온 아침이 반갑지만 이 땅은 여전히 황량한 상태이기에.

<떠도는 땅>의 미덕은 대사에 있다. 대사 속에 숨겨진 수많은 상징들과 언어의 뉘앙스는 직접 시각적으로 접하는 것 보다 상상의 몫으로 두는 것이 훨씬 더 확장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너무 많은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다 상대적으로 대사가 가진 미덕을 놓쳐버린 격이 되었다. 무대 위에는 각각의 이미지를 모두 시각적으로 노출시켜 관객에게 혼란을 주었으나 그것은 애초에 작품에서 목적으로 하고 의도했던 혼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혼란의 양상이었다. 관객은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떠돎과 작품의 의도에 벗어났던 겉돎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떠도는 땅>은 보여주기 보단 들려주기에 더욱 집중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나마 그것을 잘 주물러 한데 뭉쳐놓았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덕분이었다. 각 인물들은 결코 쉽지 않은 서사에 압도당하지 않았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집중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가면들로 표현되는 인물들이다. 개인적으로 한 작품의 완성도는 코러스가 만든다고 생각한다. 코러스라는 역할이 작품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하기에 가끔 완성도가 아쉬운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안타까운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공연 내내 몰입을 유지하다가도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 작품은 깨져버리는 것이다. 코러스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등장하기에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작품 관람에 방해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이번 공연에서 코러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가면으로 표현되는 세 인물 중 한 명은 ‘미스타 노’의 딸 ‘영지’다. 물론 관객은 그 중 누가 ‘영지’인지 알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가면들은 ‘미스타 노’가 모르핀을 복용한 후 만나는 환영 같은 존재기에 ‘영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지점이 숨겨져 있다. 작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딸 ‘영지’의 이름이 모든 인물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조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가면들은 작품 내내 등장하면서 그 자체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가면들은 단순한 코러스를 넘어서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 가면들은 마치 모두가 ‘영지’인 듯 연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모두가 ‘영지’인 것은 곧 모두가 ‘영지’가 아닌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나 모두가 ‘영지’가 아닌 ‘연기’는 지금까지 오르내렸던 작품 속 ‘영지’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배반이다. 공연에서는 각 가면들이 ‘영지’로서의 대사를 읊었으나 다소 아쉬운 연기력을 보였다. 덧붙여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을 말하자면 가면들의 성교장면이었는데 이 장면이 불편했던 것은 성교하는 장면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왜 그 상황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의 문제였다. 서사의 흐름에 따라 해석했을 때 ‘미스타 노’는 모르핀을 복용했고 그로 인하여 성기에 반응이 생겼으며 이후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딸 ‘영지’의 성교 장면이었음을 언급하는 점에서 그 장면이 구성되는 원리는 논리적으로 설명된다. 다만 그러한 상황과 장면이 관객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배우의 연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딸의, 아이들의 성교장면으로 불온한 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파괴력 있는 장면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연은 그러하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감사했으나 아직은 어딘가 어색한 동작에서 관객은 다른 의미로 불편해지고 말았다. 이 부분은 작품의 절정에 이르는 지점이기에 그만큼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도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코러스야말로 작품의 중심축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역할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결국 <떠도는 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재모습, 그리고 이 사회의 모습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반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떠도는 아버지의 혼처럼 죄책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도는 땅과 같이 반복되는 황량함일 수도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을 테고. 과거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현재의 역사로 미래는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원죄처럼 이 땅위에 묵직한 트렁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하더라도 삶이란 것이 비단 그런 비탄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리라. 언젠가 또 한 번 <떠도는 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맨 몸으로 좀 더 가벼워진 ‘미스타 노’를. 그리고 우리를 대면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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