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과 반성, 정의를 향한 셰익스피어의 정치학
윤진현
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각색 : 로버트 알폴디
연출 : 로버트 알폴디
윤색 : 이경후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6/01/10 pm8:00~2016/01/24 pm3:00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극일시 2016/01/14 pm8:00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옳다. 심지어 나와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조차도 언제나 옳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새삼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사유와 인식으로 인도하는 그의 작품에 경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올해는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400주기가 되는 해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상연되고 있다. 국립극단에서도 지난 1월 10일부터 셰익스피어 말년의 작품 <겨울이야기>가 상연되었고 하반기에는 <십이야>가, 4월에는 중국화극원의 <리처드3세> 초청공연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권력의 속성
셰익스피어 말년의 작품 <겨울이야기>를 단순히 로맨스극으로 보는 것은 위대한 노인의 지혜를 불필요하게 축소하는 것이다. 크고 넓은 바다를 굳이 작게 볼 이유가 없잖은가. 물론 ‘로맨스’는 중요하고 즐겁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기쁨은 없다고 단정해도 좋다. 그러나 로맨스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이 늘 사랑이란 감정인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보자. 이 작품을 추진해가는 동력이 ‘질투’고 ‘로맨스’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예를 들어 평범한 한 개인이 ‘질투’를 느낀다고 해보자. 보통은 스스로를 나무란다. 조금 더 나아가면 연인이나 배우자를 붙잡고 질투를 느끼고 있으니 행동을 고치고 나를 더 봐달라고 부탁한다. 이조차 여의치 않으면 연인이나 배우자를 들볶는다. 우리가 아는 ‘질투’의 소임은 이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레온테스 왕은 다르다. 왕비 헤르미오네와 친구 폴릭세네스를 죽이려 하고 딸을 유기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레온테스가 왕으로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통제를 원하는 권력자의 욕망과 이를 넘어서는 정의의 실현에 관한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무엇보다 인간사회의 역학, 그 정치성을 기반으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환기하는 데 탁월하다.
이 작품은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가 아내 헤르미오네와 친구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의 관계를 의심하여 결국은 왕비와 자식을 모두 잃고 15년을 자책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다행히도 되찾는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양치기의 딸로 자라난 레온테스의 딸 페르디타와 폴릭세네스의 아들 플로리젤이 사랑이 빠지고 이들 사이를 반대하는 아버지 폴릭세네스를 피해 시칠리아로 와서 레온테스의 보호를 받는 사건이 엮여 전개된다. 불륜과 질투, 영아유기, 신분을 넘어선 사랑 등 오늘날 막장 드라마의 기원이 되는 흥미진진한 화소가 총출동한다.
물론 그뿐이었다면 그냥 잊혀졌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 같은 진부하고 뻔한 사건 위에서 지금/여기에서 중요한 현재적 문제를 탁월하게 제기한다. 이번 <겨울이야기>에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을 섬기되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정의의 힘이다. 또 하나는 반성과 회복의 시간은 어떻게 산정되는가이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친구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가 더 머물러달라는 자신의 부탁은 거절하였으면서도 아내 헤르미오네의 권유는 받아들여 더 머물겠다고 하자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한다. 얼핏 보면 레온테스의 의심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더 머무르라 만류하다 못해 아내에게 지원을 요청하고는 아내가 친구를 붙잡는 데 성공하자 곧바로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권력이고 권력자의 심리이다. 나보다 힘이 세다니! 권력자는 분노한다. 자신의 명령은 소용없는데 다른 사람의 명령이 수용된 것만으로도 참지 못한다. 자신보다 더 힘이 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천부권력자 왕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위정자들이 타인을 턱없이 비천하게 대하며 시비와 무관하게 고함을 치고 책상을 두드리며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레온테스도 마찬가지이다. 왕비 헤르미오네가 왕인 자신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니 참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왕비가 나보다 힘이 더 세다니,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저들은 모종의 내연(內緣)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말보다 왕비의 말을 듣는 것이다!’ 레온테스는 당연히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한다. 즉 이는 레온테스의 분노와 충격이 아내와 친구에 의한 것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만약 이것이 신분이나 계급의 관계라면 왕의 자리를 넘보는 신하, 반역을 꾀하는 대신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정교하게 계산되어야 한다. 관객은 헤르미오네가 정숙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레온테스가 본래 포악하고 의심 많은 성격이어서 무턱대고 헤르미오네와 폴릭세네스를 보면서 의심을 키워가는 정황에 동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르미오네가 정숙하고 억울하다는 것이 쟁점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레온테스의 통제권이 핵심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설명하면 헤르미오네가 폴릭세네스와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고 해도 이들을 죽이고 딸을 유기한다는 결정이 과연 옳은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에서 헤르미오네(우정원 분)의 동선 설계는 적절하다. 레온테스와 폴릭세네스 사이에 상투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레온테스에게서 떨어져 폴릭세네스 옆에서 마치 연인처럼 다정한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온테스는 다정한 헤르미오네와 폴릭세네스를 쏘아본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거역의 가치
레온테스의 의심과 분노는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는다. 현실 세계에서는 보통 진위와 무관하게 권력자의 이 같은 분노는 숙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이 부당함을 극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카밀로’의 ‘거역’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거역의 역할에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레온테스는 신하 카밀로에게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를 살해하라 명령한다. 그러나 카밀로는 레온테스의 잘못을 알기에 왕의 명령이지만 따르지 않는다. ‘왕’이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 시대에 ‘왕’은 말 그대로 ‘절대권력’으로서 운명에 맞서 싸우는 비극의 ‘영웅’을 계승한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절대권력은 더 이상 정의를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리석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카밀로’는 충성과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와 시비를 판단하고 실천해야만 했으니 맹목으로도 수월하게 정의를 실천할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 코기토에 의지해서 매순간 선택해야 하는 근대 주체의 고난은 이미 카밀로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뿐인가. 왕을 설득하고 공주를 지키고자 애쓰다가 실패하자 왕비를 숨기고 죽음을 가장하는 ‘파울리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주 페르디타를 유기하라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안티고누스가 곰에게 변을 당하는 것으로 마치 벌을 받듯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의 믿음은 확고하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권력자의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급기야 카밀로는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를 보호하여 함께 보헤미아로 탈출한다. 그러나 폴릭세네스가 레온테스의 핍박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당연히 옳고 지혜로우며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폴릭세네스 또한 보헤미아의 왕, 권력자로서 아들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연인을 택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아버지 레온테스에게 버림 받았지만 양치기의 딸로 아름답게 성장한 페르디타는 보헤미아의 왕자 플로리젤과 사랑에 빠진다. 폴릭세네스는 변장하고 아들에게 와서 연인을 부왕에게 소개하고 사랑을 허락받으라 권유한다. 그러나 몇 번을 권해도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격분하여 아들을 버리고 양치기와 페르디타를 벌하겠다고 협박한다. 자신의 말보다 아내의 말이 힘을 가진 것을 알자 이들을 의심하는 레온테스와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페르디타에게 경탄하게 되었다면 아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왜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부모다운 자애를 보여주지 않을까?
이 가혹한 폭력의 순간, 카밀로는 다시 폴릭세네스를 거역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떼어놓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카밀로는 이들 연인을 시칠리아로 보내어 결국 부녀상봉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자면 카밀로는 저항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남용되고 오용되는 권력에 맞서 인간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아울러 레온테스 왕의 곁에서 왕이 자책하며 후회하도록 직언을 계속하는 파울리나 부인도 왕이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왕비 헤르미오네를 숨겨두었다가 조각이 살아난다는 이벤트를 벌여 왕과 왕비를 다시 만나게 하니 이 또한 권력자를 위해 거짓을 감수하며 진실을 지키는 능동성을 의미한다.
카밀로와 파울리나는 이렇듯 저항하고 거역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레온테스와 폴릭세네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주었다. 이들의 우정과 자식과 사랑은 오로지 카밀로와 파울리나의 용기있는 결단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항은 존재를 넘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마치 아이처럼 레온테스의 명령을 듣는 카밀로, 그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반성은 끝날 수 없다
부당한 의심과 폭력으로 소중한 것을 해치고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 반성하고 거듭나야 한다. 극적으로 이러한 상실과 반성의 감정은 사랑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대부분 사건으로 환유될 수 있다. 개인 간의 일뿐만 아니라 단체나, 그룹, 국가간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레온테스는 재혼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15년을 달게 질책을 들으며 반성하고 후회하였다.
우리는 흔히 성급하게 지나간 일을 잊으라 권유받는다. 이제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이 시작하자는 목청 높은 주장도 듣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중요한 것이 상했고 다치게 했다면 그 반성의 시한을 정하는 것은 자신일 수 없다. 용서는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명백히 과거완료가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박도섭이 하늘의 용서를 확신할 때 받게 되는 충격을 기억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레온테스 왕은 그런 점에서 ‘아내와 딸을 되찾을 때’까지라는 적당한 반성의 시간을 예시한다. 이번에는 파울리나의 날카로운 비판과 경계를 감수하며 재혼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뿌리치고 오로지 후회하고 자책한다. 더욱이 그의 자책과 반성은 아내와 딸을 되찾는다는 희망 위에 축조된 것이 아니었으니 반성은 오로지 잘못을 인정하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의지에 있는 것이지 그 보상으로 잃은 것을 되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관객은 그러한 인물의 반성에 너그러운 법이다. 알폴디의 연출에서 레온테스가 아내 헤르미오네를 되찾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헤르미오네를 보전하는 듯, 거대한 액침표본을 연상케하는 수조는 마치 겨울 얼음장처럼 장려하게 깨져나가니 대단원의 통쾌함을 목표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 같은 통쾌함이 적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얼음장은 녹는 것이지 깨져나가지 않으며 깨져나가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암울한 겨울의 기억 또한 따뜻한 햇볕이 아니고는 녹아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tale)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고 홀로 외롭게 죽어가야 했던 그 어린 왕자는 곧 잃어버린 ‘겨울이야기’ 자체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어머니의 귓가에 어린 왕자가 재잘재잘 들려주던 ‘겨울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다만 한 어리석은 아버지가 그 어리석음 때문에 아들을 잃고 다시는 아들의 겨울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겨울이야기를 대신할 뿐이다. 그리고 연극은 그 반성을 이어간다.
수조의 파열이 너무도 강렬해서 시간이 들려주는 후일담을 음미하기에 감정의 안배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사건이 해결되고 모두 제 자리에 돌아오고 난 다음에도 돌아오지 못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연극이 끝나고 긴 시간이 지나 봄의 문턱에서 다시 ‘겨울이야기’를 상기하는 이유이다.
(사진제공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