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다] 햇빛샤워/ 김태희

수많은 광자들을 위해 – <햇빛샤워>

김태희

 

한 여자가 있다.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당연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그녀가 가진 거라곤 ‘이광자’라는 이름밖에 없다. 장우재의 신작 <햇빛샤워>(2015)는 광자라는 이 불쌍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장우재는 전작 <환도열차>(2014)와 <미국아버지>(2014)에서 거대한 담론과 마주한 인간들의 삶을 보여줬다. 기상천외한 상상력,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탓에 이야기는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덩어리의 이야기, 요컨대 한국전쟁의 비극이나 국제적인 정세와 같은 것들 때문에 개인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측면이 있었다. 2015년 남산예술센터에서 선보인 <햇빛샤워>는 이와 다르다. 전작에서의 도발적인 상상력은 찾아볼 수 없지만, 어느 때보다 인물들의 서사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름도 기억하기 쉬운 “ 광자”. 이 작품은 광자가 왜 썅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수많은 광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일종의 보고다.

 

삶을 사는 두 가지 방법

 

<햇빛샤워>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광자가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이야기다. 사건은 광자의 출옥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이름이 끔찍이도 싫었던 광자는 출옥하자마자 이름을 바꾸기 위해 전직 형사와 거래를 시도하는데, 돈이 부족해 거래가 무산 될 위기에 처하자 형사를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이를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이는 광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앞으로 펼쳐질 광자의 삶을 암시하는 문제적 대목이다.

광자의 인생은 그녀가 살고 있는 반지하방으로 집약된다. 손바닥만한 햇빛이 겨우 드는 반지하방에서 광자는 지상을 욕망한다. 성관계 후 의상 디자이너 앞에서 광자가 선보이는 댄스처럼, 그녀의 인생은 조악하고 어설프다. 광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팔기도 하고 이를 촬영한 비디오로 상대 남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그녀에게서 죄책감은 찾아 볼 수 없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썅년’으로 만들어가고 그럴수록 광자는 새로운 이름과 그에 걸맞은 인생에 집착한다.

광자와 짝패를 이루는 인물은 광자가 세 들어 사는 집 아들 동교다. 동교를 연기한 이기현은 <래빗홀>, <소년B가 사는 집>에 이어 어딘지 음울하고 상처받은, 혹은 미성숙한 인물 연기의 표본을 보여준다. 양부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동교는, 유난스러운 양모의 타박에도 어색하고 주눅 든 웃음으로 일관한다. 동교는 세속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술도 마시지 않고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도 하지 않는다. 동교의 유일한 즐거움은, 하루 종일 연탄을 나르면서 연탄을 용돈으로 받고 이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동교는 시종일관 양부모들로부터 겉도는데, 그가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거는 대상은 광자다. 동교가 광자에게 말을 걸고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광자처럼 동교도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진정한 관계를 거부하며 사실상 오롯이 ‘혼자’ 인생을 살아간다. 동교는 이 동질감을 광자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한편 광자는 고등어를 가져다주고 아픈 곳을 걱정하는 동교를 자신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남자 중의 하나로 치부하는데, 이는 동교의 순진함을 배가시키는 동시에 둘의 상반된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동교와 광자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양극단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광자와 동교의 이야기가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의 축을 형성하는 것은 광자에 대한 부수적 인물들의 인터뷰다. 이들은 돈과 지위를 빌미로 광자와 잠자리를 하고 더 나은 보수를 위해 광자와 경쟁을 하면서, 그녀와 다양한 층위로 관계를 맺는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광자를 “깨끗한 여자”, “성실한 직원” 등으로 명명한다. 실제로 광자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수시로 몸을 팔고 남의 비밀을 폭로하고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셔 대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거짓말에는 이유가 있다. 광자와의 관계가 옅은 것에 불과해서 기억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광자에 대한 폭로가 자신에 대한 폭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건을 빼돌려서 광자에게 돈을 마련해주는 물류센터 직원이나 매장 매니저 자리를 담보로 광자의 자취방에 드나드는 디자이너나 광자에 대한 온전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자신 역시 떳떳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광자에 대한 거짓된 증언은 반대로 그들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는 기능을 한다.

부수적 인물들의 인터뷰는 광자의 서사 사이에 적절히 배치되면서 전체 서사에 탄력을 부여하고 관객들이 광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을 방지한다. 인터뷰의 주체를 알 수 없다는 것, 마치 사건 후의 취조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는 사실이 공연 내내 관객들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럴수록 관객들은 동교와 광자의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게 되고,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현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망하게 된다. 요컨대 인터뷰는, 관객들로 하여금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집요하게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광자의 과잉된 귀환, 잉여의 메시지

 

동교와 광자는 각자 다른 삶의 위기와 마주친다. 동교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지역 자치단체는 동교를 언론에 알리고 이를 기회로 보조금을 받아 새로운 연탄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는 동교의 삶을 순식간에 뒤흔든다. 아들 덕을 보려는 양부모의 욕망과 이에 보답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동교를 옥죄고 결국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짝패인 동교의 자살은 광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광자가 동교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는, 동교가 양부모를 피해 광자의 방으로 숨어든 날 만들어진다. 엄마 냄새를 알고 싶다는 동교의 말에 광자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브래지어를 빼서 건네는데, 동교가 자살 한 후 그 브래지어 때문에 동교가 “여자 속옷이나 훔치러 다니는 놈”이라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 광자는 형사가 찾아왔을 때까지도 동교의 삶에 개입되기를 거부했지만, 동교의 죽음에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 양부모를 보며 결국 분노를 느껴 칼을 휘두르게 된다. 이 행위는 단순히 광자가 동교의 부모에게 행한 사적인 복수에 그치지 않는다. 광자의 칼은 자신들을 향한 비정함에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로 향해있다.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중얼거리는 것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이름이다. 세상은 광자의 이름을 미친년으로 명명했고 그녀는 이 족쇄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이 살해 장면에서 광자는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되뇌이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비정함에 대한 반발이자 광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 나아가 자의식의 최초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광자는 삶의 종료 직전, 원래 이름처럼 빛나는 여인으로 무대 위에 현현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의의는 결국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살아가던 광자가 최초로 동교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의식을 완성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의 완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광자라는 캐릭터에 빚지고 있다. 장우재는 이야기를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다. 그는 어느 때보다 원숙한 구성력으로 광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사소한 디테일하나도 놓치는 법 없이 섬세하게 묘사한다. 작가가 연출을 겸할 때의 장점은, 극작을 시작 할 때 염두에 두었던 장면들이 디테일하다는 점이다. 장우재는 매번 극작과 연출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도 장면들은 상당히 디테일하다. 가령 <햇빛샤워>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은 단연코 광자가 햇빛을 몸에 바르는 장면이었다. 몸이 약해진 그녀에게 의사는 햇빛을 많이 받으라는 주문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살고 있는 지하방에는 손바닥 만한 햇빛이 들어오는 게 전부다. 집에 돌아온 광자는 신성한 의식이나 치르듯 햇빛을 손바닥에 담아 자신의 몸을 문지른다. 이 시적인 장면은 섬세한 작가의 시선이 무대 위에 실현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다만 이 섬세함과 꼼꼼함은 간혹 무대에 과잉된 인상을 남기고 만다. 동교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순진한 인물로 그려진다. 부적응자 같은 인상을 풍기던 동교가 유난히 생경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건 “관계”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는 때다. 이 작품은 관계에 대한 메시지가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관계 없는 삶”. “관계 맺는 삶” 등과 같은 대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관객들은 순식간에 메시지를 주입받는 위치로 자리 이동하게 된다. 장우재는 극적 현실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사유의 문제를 던져주는 것을 즐겨왔다. <햇빛사냥>의 경우 유난히 그 의식이 과하게 작동한다.

작품의 앞뒤로 배치되는 싱크홀에 대한 은유 역시 주제 의식과 관련을 맺는다. 누적된 문제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싱크홀이라는 거대한 구멍으로 삶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거대한 구멍은 광자의 지하방과 닮아 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다.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싱크홀은, 요컨대 관객들 자신의 삶을 반추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와도 같다. 하지만 이런 은유가 얼마나 작품과 효과적으로 연관을 맺는지는 의문스럽다. 이미 무대는 광자의 지하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우재 연출은 무대 가운데에 리프트를 위치시키고 높낮이의 변화를 주면서 공간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높낮이의 손쉬운 변화를 통해 무대 중앙은 동교의 집, 광자의 방, 싱크홀, 의류 매장 등으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두 개를 연이어 쌓아놓은 옷장의 위태로움에서부터 엉성하게 쌓여있는 광자의 방 짐짝들에 이르기까지 허투루 이용되는 공간은 없다. 모든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데에 비해 싱크홀이라는 공간은 비교적 먼 거리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극의 처음과 끝의 강렬한 인상을, 혹은 구분을 위해 의도되었다면 이는 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광자가 이름을 바꾸기 위해 전직 형사와 만나 잠자리를 갖게 되는 장면이 훨씬 압축적으로 광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싱크홀의 장면은 잉여일 수밖에 없다.

 

<햇빛샤워>는 광자를 위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절한 현실을 살아가는 광자의 삶은 절절하게 불쌍하다. 그럼에도 광자가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뚫고 나아가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라. 이 절절함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이 세상의 수많은 광자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웹진 문화다에 수록된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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