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호 편집인의 글)
예술 지원 선정의 폭력성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약칭 공이모)에서 발간하는 계간 연극지 ‘공연과 이론’이 2016년 문예진흥금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공이모는 1992년 창립된 단체이다. 그 즈음 국내외에서 학위를 마치고 연극 현장으로 복귀하거나 진입한 소장파 연극학자들(김창화, 오세곤, 이재명, 김형기, 서명수, 박철완)이 창립 동인이고, 곧바로 이혜경, 이화원, 이상란, 노승희 등과, 뒤이어 손동철, 심재민, 장은수, 임선옥 등이 초기 멤버로 합류하였다.
공이모의 대표적인 활동은 월례비평이다. 매월 작품을 정해 연출가, 배우 등과 함께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것인데, 25년 째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월례비평이야말로 공이모의 간판이자 바로 계간 ‘공연과 이론’의 핵심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공연 참가자들과 평론가의 만남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때로는 뭔가 답답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의 힘은 나름의 방법론을 확립시켰고 그래서 월례비평은 우리 연극계의 중요한 소통 공간이 되었다.
계간 ‘공연과 이론’은 2000년에 창간되었다. 공이모의 월례비평을 실어 전파해 주던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월간 ‘오늘의 연극’이 예산 문제로 정간되고, 이어서 그 역할을 해주던 월간 ‘한국연극’이 편집 방향을 바꾸게 되면서 딱히 실릴 곳이 없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아예 자체 저널을 발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얼마 후 ‘공연과 이론’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물론 창간 초기에는 평생회비 등으로 발간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면서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이 때의 지원 결정은 예산상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공적인 가치 인정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자체 자금과 지원금을 합쳐 2015년 말 60호에 이르기까지 큰 문제없이 발간할 수 있었다.
예술위는 이번 일에 대해 첫 번째로 예산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각 분야 선정 비율을 보면 이 말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서류미비 등으로 제외된 경우를 빼고 실질 신청이 이루어진 건수 대비 선정 건수를 보면 무용은 8대 7(87%), 음악은 7대 5(71%), 전통예술은 2대 2(100%)인데, 유독 연극은 10대 3(30%)이다.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던 대상이 제외되는 건 대단히 엄중한 상황이다. 그 대상의 존폐가 달린 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산이 준다면 고민이 필요하다. 과연 연극의 경우처럼 선택과 집중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분야처럼 탈락을 최소화하고 함께 고통을 분배할 것인지 방향을 정해야 한다.
연극계 대표적인 저널은 월간 ‘한국연극’이 있고 계간으로 ‘연극평론’과 ‘공연과 이론’이 있다. 이중 ‘한국연극’은 예년과 동일한 액수(5000만원)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연극평론’은 작년보다 100만원 적은 액수(1700만원)를 지원받았다. ‘공연과 이론’은 작년에는 1500만원을 지원받았지만 올해는 한 푼도 지원받지 못 했다.
게다가 심의진 구성을 보면 더 이상하다. 예전에는 분야별로 5명으로 구성하더니 올해는 분야별 2명으로 구성하였다. 단 2명의 결단으로 연극계 저널의 판도를 결정해 버린 셈이다. 게다가 연극 분야 심의위원 2명 중에는 현 ‘한국연극’ 편집주간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심의 당시에는 편집주간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시점 상 너무 가까워서 이미 내정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초심으로 돌아가 회비를 갹출하여 발간할 수도 있다. 사실 공이모는 그렇게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연극 현장에서 역할을 담당하던 3개의 잡지 중 2개는 선정되고 하나는 선정되지 않았다. 아마 앞서 말한 방향 중 선택과 집중 쪽을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과격하다. 나름대로 특성을 갖고 있을 때 단순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열 개의 잡지 중 한 두 개를 제외하는 정도라면 납득이 된다. 그러나 단 3개뿐인 상황에서 하나를 없앤다는 것은 최소한의 다양성마저 그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부 산하 국가기관이다. 나라 일을 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봉사함에 있어 최선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술 지원 예산이 줄어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예산 확보를 위한 노력이 가장 우선이겠지만, 동시에 예산 축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고자 고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공연과 이론’ 지원 탈락에는 그런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마치 우리 사회가 예술을 대하듯 또 다시 평론이나 저널을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즉 정부 관료들조차 “예술에서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는 참으로 무지한 소리를 해대는데, 그런 예술을 지원하는 기관 안에서 또 다시 “창작도 아닌 평론이 뭐 중요하냐?” 하는 수준 낮은 인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연극 분야에서 이렇게 과격한 결정이 났을 때 위원회 측에서 그에 대한 재고 요청이나 조정 노력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지원 결정을 통한 실질적 검열 사태’ 상황에서 나왔던 이른바 “최종 결정권은 위원회에 있다”는 주장을 고려할 때 더욱 예술위의 평론에 대한 인식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예술에서 밥도 안 나오고 쌀도 안 나오므로 별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된 인식임을 모른다면 국가를 운영할 자격이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창작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론을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예술 지원기관으로서 수준 미달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런 수준 미달의 판단력이 현실을 좌우한다는 데 있다.
판단력이 없이 힘을 가지면 폭력이 되기 쉽다. 물론 온갖 논리를 갖다 붙이지만 그건 다 궤변일 뿐이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백번 양보해서 국가 부도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산이 줄었다고 10년 동안 지원하던 잡지를 제외시켰다. 게다가 갑자기 “다 살리려고 하다간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펼친다.
결국 상대적으로 살릴 가치가 떨어지는 대상을 찾아 죽음의 명령을 내리는 셈인데 그런 비장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왜 좀 더 잘 하지 그랬어.”하는 조롱의 표정뿐이다. 이런 가벼움 역시 폭력성을 배가시킨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부디 정부 공무원이건 지원기관 직원이건 심의위원이건 예술 지원 선정이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하기 바란다.
2016년 5월 2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