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아비/ 윤진현

원혼 재생산 시스템

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공동창작
연출 : 이성열
단체 : 극단 백수광부
공연일시 : 2016/04/08~2016/04/17
공연장소 : 대학로 SH아트홀
관극일시 2016/04/17 pm3:00

 

햄릿아비 포스터

 

 

선택이 아니어도 피할 수 없는

 

때로 생각한다.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삶을 파괴한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왕자로서 죽은 왕 대신 왕위를 이어야 했다고 생각하면 왕위를 빼앗긴 것이지만 여전히 여왕 거트루드의 아들, 삼촌 클로디어스 왕의 양자로 있으면서 후계가 보장되어 있다면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왕위에 올랐을 테니 왕위를 빼앗긴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극단적이고 성급했던 것은 아닐까? ‘와신상담’ 때를 기다리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이 구구한 생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햄릿의 죽음, 그 비극적 파국을 수용할 수 없었던 천진한 감상 위에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란 것은 인생과 인간의 역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러한 운명과 그래야겠다는 의지 사이에서 기울지 않는 진실을, 심지어 우리가 보고 싶어하든 그렇지 않든, 냉혹한 진실을 가차 없이 적시하지 않는가. 더구나 그 거대한 운명은 신성(神性) 또는 인간 저편의 다른 표현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많은 것들로 우리 삶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햄릿 앞에 선왕의 유령이 나타난 순간은 선택하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직면한 진실의 순간은 이를 대면하는 인간이 준비되어 있든 아니든 마주할 수밖에 없다.

 

진짜 왕자 햄릿

 

더구나 ‘유령’이다. 이는 연극의 시작으로 보면 굉장하다. 저승에 있어야 하는 망령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뒤흔들리고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햄릿은 자연의 이치가 와해된 세계와 대결하여 그 질서를 복구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세계에서 ‘왕’과 ‘왕자’와 같은 존재가 주인공으로서 수행해야 했던 것은 다수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거나 책임이 있다는 점을 적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햄릿이야말로 자신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세계이지만 능동적 주체, 말 그대로 국가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진짜 책임감 있는 왕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햄릿>은 정치극이다. 근대의 시민주체로서 자신과 사회의 역사에 공적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모범을 구한다면 바로 햄릿이다.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우유부단한 인물’의 대명사처럼 쓰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최소한 연극을, ‘햄릿’이 극적으로 얼마나 치밀하게 발전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햄릿은 갑자기 아버지가 사망하고 삼촌이 왕위에 오르면서 어머니와 재혼한 상태이다. 부자승계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에도 형제가 왕위를 잇는 일이 없지 않았고 왕위가 비었을 때 여왕과 결혼한 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던 서양의 왕위계승법을 염두에 두면 햄릿의 심정은 오로지 우울하고 쓸쓸한 것일 뿐, 그 자체로는 결단과 행동의 계기가 없는 균형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에 죽은 왕의 유령, 햄릿의 아비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식이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증언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의 증언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복수를 맹세하고 싸워나가지 않을까?
그러나 햄릿은 아버지의 말이라고 해도 단번에 믿지 않는다. 망령이 진짜 아버지의 혼백인지 악마가 변장하고 나타나서 홀리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대뜸 삼촌에게 달려가 “당신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면서요?”하고 질문할 수도 없다. 햄릿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운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신중해진다. 어리숙하게 굴거나 미친 체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전략이다. 더욱이 상대방이 방심하여 진실을 말하게 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햄릿은 우선 유령이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을 차단한다. 흉흉한 소문은 사람들을 긴장케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광기를 가장하고 극단을 불러 부친의 살해 장면을 담은 연극을 보여주며 클로디어스 왕과 거트루드 왕비의 반응을 살피고 사실을 확인한다. 요컨대 햄릿은 동기가 주어지자 치밀하게 전략을 세우고 흔들림 없이 행동한다. 햄릿의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를 햄릿의 두려움과 흔들림을 드러내는 대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참고하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생존의 치욕을 견디지는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그뿐인가. 햄릿은 왕이 홀로 무방비하게 기도하는 순간에 그를 살해할 수 있었지만 기도 중에 죽은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복수심을 자제한다. 죽는 게 전부가 아니라 지옥에 가서 제대로 죄악의 대가를 치러야 제대로 된 처벌이고 복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왕비가 죽고 레어티즈도 쓰러지며 음모를 폭로한다. 그가 입을 떼어 ‘범인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쳤을 때, 왕이 범인이라는 것은 사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햄릿은 이 순간에도 경거망동이 없다. 자신의 죽음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도 레어티즈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죽게 되었다는 고백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확실히 ‘왕이 범인이다’라는 마지막 말이 떨어지고서야 비로소 칼을 들어 왕을 찌른다.

 

일개 젊은 왕자인 햄릿이 목표를 정하고 실천함에 어떻게 그렇게 신중하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진짜 왕자다. ‘왕’을 스스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힘을 가진 존재, 주체로 해석한다면 오늘날의 우리 또한 이 같은 사고능력, 실천능력이 필요하다. 때로 스스로의 장점이나 영민함을 감추어야 할 수도 있고 겉보기에 휘둘리거나 시간에 쫓길 수도 있으나 성급해서는 안 된다. 쉬운 일은 아니나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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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그러나 생각을 멈춘 우리, 햄릿

 

극단 백수광부가 창단 20주년을 맞았다. 한국 사회에서 20주년을 맞은 극단이라니, 그것도 쉽고 재밌기보다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와 대결하는 진짜 연극을 하는 극단 백수광부라니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

 

게다가 이번에는 공동창작이다. 공동창작은 언제나 옳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모든 연극은 공동창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위대한 셰익스피어조차도 얼마간은 복수형이다. 재능 있는 한 작가의 작품에 견주어 문학적 일관성이나 완성도는 미흡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공정한 집단적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배우는 자신들이 이해하는 세계와 현실에 대해 보여주어야 할 것이 있다. 백수광부의 이번 작품을 더욱 반긴 이유이다. 더욱이 이번 작품은 일관된 서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직접적으로 노출한다. 이 파편들은 사방으로 튕겨져 사정 없이 관객의 눈과 피부와 가슴에 들어가 박힌다. 안정된 극적 문법조차 가식적인 포즈처럼 느껴지는 지금, 이들의 언어는 확실히 옳다.

 

그리고 이들이 소환한 인물이 ‘햄릿’이다. 아니 햄릿의 ‘아비’이다. 이 사회의 시민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햄릿’에 견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아비’의 문제임이 명백해진다. 이들이 도달한 진실의 전제에 또 한 번 공감하였다.

 

극단 백수광부의 ‘햄릿’은 상조회사 직원이다. 죽음으로 먹고 산다. 햄릿처럼 자연의 질서가 와해된 현실을 복구하고 선왕의 혼령을 저승에서 편히 잠들게 하는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품이 된 익숙한 죽음. 매일매일 새롭게 닥치는 죽음을 판매할 뿐이다. 아비의 유령을 만나서도 퍼포먼스인지 현실인지 역사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역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유린되는 이웃을 만나서도 결국 홀로 도망치고 만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진실을 찾아내고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던 결단력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이는 곧 우리 자신이다. 정의도, 진실도, 인간도, 사랑도, 명예도 모조리 환금의 과정을 거쳐야만 가치가 드러나는 세상, 그리고 그 가격조차도 적정한 공정가격이 아니라 거품으로 부글부글 과장되는 세계, 이 세계를 만들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죽음인들 피해갈 수 있으랴. 누가 죽었다고 하면 슬픔보다, 고통보다, 보상금을 먼저 묻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가. 원가 5만원짜리 유골함을 50만원으로 부풀리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모두 그렇게 산다고 우기고 있지 않은가. 진실이란 이제 지혜롭게 행동하는 눈 밝은 자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하철 예술가의 퍼포먼스에 갇혀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유령이 등장한 때를 햄릿이 결정한 것이 아니듯, 우리 자신이 진실을 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스스로 극 속의 진실, 극 속의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악몽 같은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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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아비>의 노선도

(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아비를 해결하지 못하여 자식을 죽이다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햄릿’이 이 모양이 되었던가? 아버지 유령과 어머니 거트루드, 심지어 사랑하던 오필리어로도 햄릿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극단 백수광부의 햄릿은 시공을 초월하며 답을 구한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사관이다. 역사를 다시 쓰는, ‘과거를 지배하여 미래를 지배’하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인간을 유린하고 사람을 학대하며 정확히는 역사를 왜곡하는 사관이다. 이 와중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 여인,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가혹한 역사 왜곡 앞에서 그녀의 실체는 망각될 위기에 처했다. 쿠데타가 미화되고 이에 동조하여 매일매일 말(言語)의 폭탄을 터뜨리며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는 현실이 이미 시작되었다. 일간베스트, 극단적인 우익 추종세력에 과거의 연장으로서 노인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 가까운 청소년이 있을 수 있음을 적시한 것은 득의의 해석이다. 역사의 왜곡이 가하는 해독에는 기억해야 할 것을 지우는 것만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것을 저지르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 자경단이라도 되어서 못된 작자들을 암살이라도 하러 다녀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테러나 암살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햄릿의 반응은 당연하지만 그저 평범한 자들의 단순하고 신경질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뜬 햄릿은 소녀상을 만난다. 생각해보면 ‘소녀상’은 얼마나 애처로운 존재인가. 성장을 멈춘 채로 가장 빛나야 했을 시절이 악몽이 된 순간에 갇혀있다. 결단의 순간은 다가오니 목숨을 걸고 조국 독립의 거사길을 떠났던 안중근의 결단이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팽목항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객석과 무대의 거리로도 객관화될 수 없는 곳이다. 결국 아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우리의 자식을 잡아먹고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과거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면 미래가 암울해지는 이치를 잊기라도 했던 것일까.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햄릿이 아비의 유령을 만나 행동하지 않았다면 햄릿을 괴롭히는 것이 아비의 유령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원혼은 다른 원혼을 낳는다. 지금, 이 사회의 구천을 떠도는 혼령을 천도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많은 망령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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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하나 들고 돌아온 길, 우리는 어떻게 아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식을 구할 것인가. <햄릿아비>가 남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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