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 부활의 가능성
<연극생존백서>
이주영(연극평론가)
작 공동창작
연출 변영후
드라마터그 김태희
단체 극단 창파
공연일시 2016/6/13~15
공연장소 노을소극장
관극일시 2016/6/15
극장 안이 어둡다. 이 암흑을 조장한 주체가 극장 천장에 폴리스라인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서울연극제 대관 심사 탈락, 창작산실 검열 사태, 팝업씨어터 공연 방해 사건, <<공연과이론>> 지원금 탈락 등 연극계를 향한 폭력적 사건들이 연극계에서 일어났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한 편의 연극을 올리기 위해 경제적 곤경을 고민해야 했던 시절이 그립기까지 하다.
관객들은 제7회 현대극페스티벌 참가작인 <연극생존백서>을 보기 위해 극장 문 앞에 서 있다. 극장 안내자는 관객들에게 휴대용 소형 후레쉬를 준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 마련된 객석에 앉는다. 극장 안을 둘러본다. 어둡다. 위를 쳐다본다. 으레 있어야 할 무대 위를 올려다보니 조명기가 없다. 대신 감시의 선들이 천장을 뒤덮었다. 딸깍딸깍, 관객들은 입구에서 받았던 후레쉬를 켠다. 작은 불빛이 모여 무대에 배우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관객과 배우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모두가 연극의 참여 주체가 된다. 연극의 생존, 연극 현장자뿐만 아니라 관객 또한 고민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관객들에게 미안해진다.
연극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 연극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탄압의 움직임들. 이에 리어, 오이디푸스, 장발장, 오필리어, 햄릿, 줄리엣, 사월이 등 7명의 연극 속 인물들이 무대에 나섰다. ‘폭력의 시발’을 향해 각각의 인물들은 ‘추적’을 시도한다. 저항과 탄원, 정당한 요구의 발언에도 감시는 꿈쩍하지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천장의 감시자와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대화가 불가능함을 깨달아가는 사이, 애초부터 소통의 가능성은 부재했겠지만, 이들은 생명력을 잃어간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성을 잃을 것 같다. 안 돼. 흥분하면 지는 거다. 진정하고 현 연극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무대가 아닌 극장 전체가 환해진다. 무대 위에 작업 현장자 네 명이 등장한다. 극의 마무리를 위해 회의를 거듭한다. 자본의 침입, 무차별적 감시 폭력, 상업극에 경도된 관객들 등이 토론의 내용을 구성한다. 비록 토론이 진행될수록 생산적 담론이 희석되는 것 같아 우려가 되긴 하였으나, 지금/여기의 연극계 상황을 객관화하는 데에는 충분하였다. 다소 지루했던 토론이 끝났다. 이성을 잃을 뻔 한 배우들은 힘찬 에너지로 다시 공연을 시작한다.
7명의 등장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목소리를 내본다. 극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내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심지어 발언이 차단되기까지 하였다. 울분을 토해내도, 열띤 토론을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꿈쩍하지 않는 천장의 감시자들. 좋은 공연으로 관객을 맞이해야 할 등장인물들이 결국 생명력을 잃고 극장 안에 갇혀 사망해버렸다. 이 순간 마법이 일어난다. 연극 작업 주체와 관객들 사이에 강력한 연대의식이 형성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 죽음에, 이 폭력의 사태에 일제히 후레쉬를 끄며 저항한다.
<연극생존백서>의 무대 위 연극은 죽었지만 공연을 통해 작업 주체와 관객의 연대, 그리고 저항의 동참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죽었던 연극은 부활할 것이다. 천장 위 감시자들이 노려보아도.
연극을 죽인 것은 무엇일까? 청와대? 문체부? 문예위? 우리는 안다. 연극은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망하기 시작했다고. 하향평준화되기 시작했다. 지금 대학로는 연출,배우를 하겠다는 좋은 인재가 사라졌다. 그저 학위논문 하나 써서 교수가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대학로는 ‘교수취업반’ 수강생으로 채워지고 있다. 교수들이 자기대학의 수입을 위해서 학위자만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엔 이른바 SKY대학에 서강대출신이라도 나서서 연출을 하겠다고 했다. 이제는 이마저도 차단되고 이론가만이 ‘세치혀’를 놀리는 곳이 되었다. 연극판은 ‘성찰도 반성’도 없는 곳이 되었다. 모두가 ‘남의 탓’을 하는 곳이 되었다. 대학이 무수히 생겨도 교육체계도 교과도 없다. 기술이 없고 논문만 쓰는 ‘인문학과’가 된 곳이 연극대학이다. 무용과에 춤추는 사람은 없고 논문쓰는 사람만 있는 꼴이다. 그렇다고 제대로된 저술도 한권 없다.
이런 판이니 제대로 연극을 하겠다는 사람은 없고, 세월호니 검열만 외치는 곳이 되었다. 이제 연극판은 정치노름판이 되었다. 그래야 엘리트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는 곳이 되었다. 정말 후배들이 무얼 배울까 싶다. 마냥 지원금타령이다. 지원금 안주면 적이고 잘주면 아군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선배교수들이 놀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서 50세면 용퇴를 하는 미덕을 발휘하면 어쩔까 싶다. 이게 진정한 ‘진보좌파’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이 연극대학을 한번 일으켜 세워 연극판을 살려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남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직시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짓말도 자꾸하면 진실처럼 느껴지는 법, 일단 공개토론회를 제안한다.
이주영평론가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