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호 편집인의 글)
희곡 번역의 풍토 전환
지난 5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떠들썩했다. 그게 ‘알파고’, ‘미니멀리즘’과 함께 인터넷도서계가 뽑은 상반기 핫이슈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단한 일인 건 틀림없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맨부커상이란 단어로 나오는 기사는 2016년 이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세계 3대 문학상이라며 떠들어댄 언론에 대해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은 작가와 번역자를 동등하게 대접한다. 아마 상금도 똑같다는 것 같았다. 그러자 언론이 돌연 데버라 스미스라는 번역자를 집중 조명하였는데 그때마다 “한국어를 배운지 6년밖에 안 된 29세의 여성”이라는 이야기는 빼놓지 않고 거론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죽어라 매달려도 그리 신통치 않은 우리의 영어 실력에 비추어 나온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은 그렇다 치고 언론마저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해 온 데에 대해서는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6년밖에” 운운은 일종의 선정주의에 해당한다. 왜냐 하면 외국어를 배우는 기간으로 6년은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내 여러 한국어 교육기관들이 “안녕하세요?”밖에 모르는 외국인들을 1년 반 정도 교육시켜 대단히 높은 수준의 한국어 구사자로 배출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데버라 스미스가 한국이 아닌 곳에서 터득한 한국어 실력이 정말 최고 수준인지도 알 수 없다. 왜냐 하면 실제로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어보다는 영어였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잘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을 수 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파악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번처럼 작가가 생존하는 경우는 직접 작가에게 정확한 의미를 알아볼 수도 있다. 아마도 데버라 스미스는 그렇게 파악한 의미를 자기 모어(母語)인 영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을 것이다.
외국어는 모어가 아니면 완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물론 어린 시절 외국어에 접하면 이중언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열서너 살 정도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후로는 문법을 통해 배우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외국어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아무리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외국어를 잘 한다고 해도 모어가 아니라면 미세한 느낌까지 터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특히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는 이 미세함이 더욱 중요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문학 작품에 대한 외국어 번역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간 언론의 태도로 볼 때 과연 우수한 번역자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이루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러면서 우리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목을 빼고 기다린다. 사실 국제적인 문학상을 기대하기 이전에 가능한 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 문학 작품을 읽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사실 문학상보다는 그게 더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외국 문학에 대한 우리말 번역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유명 소설 번역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지금껏 그렇게 세밀한 표현에까지 관심을 갖고 따져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무척 반가웠다. 그러면서 희곡이야말로 이런 논란이 꼭 필요한 분야인데 왜 이렇게 무관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설이나 시는 문자로만 전달되므로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그 폐해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희곡은 공연을 통해 확산되는 성격을 지니므로 잘못된 번역의 폐해 역시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또 소설이나 시의 경우 이상하면 여러 번 읽어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연극 공연은 단번에 전달되어야 하므로 잘못 되면 그대로 문제가 된다. 희곡 번역에 대해서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옳고 그름을 치열하게 다투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희곡 번역은 연극의 특성을 살리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가 대사로 구사하기 어려운 문어적 표현이 자주 쓰이는가 하면 단번에 들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장마저 흔히 발견된다. 더욱이 그런 미흡한 번역을 원어에 충실한 것이라며 타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번역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대부분 공연을 통해 검증된 것들이다. 즉 원어 상태에서 그렇게 구사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일 리가 없다.
우리 연극은 외국 작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번역 희곡이 너무 많이 공연된다고 해서 창작극 위주의 연극제도 여럿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창작 희곡은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혹시 외국 작품을 정확히 받아들이지 못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셰익스피어건 체호프건 과연 우리 번역이 원작의 훌륭한 점들을 속속들이 전달하고 있는지, 비록 전체 내용이나 구성, 인물 유형 등은 알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연극의 가치를 이루는 세밀한 사항들을 놓치거나 막연한 정도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 본다.
어차피 번역은 계속 보완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언어가 다르므로 완벽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희곡 번역에 대해서도 한 번 깊이 점검해 보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 진수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따져 웬만하면 다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소설의 경우처럼 치열한 논란이 전제되어야 한다. 단어 하나의 표현을 두고도 번역자들 사이에, 또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풍토가 우리 희곡 번역의 수준을 한층 올려줄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훌륭한 작품들로부터 정말 배울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희곡 번역의 근본적인 풍토 전환을 제안한다.
2016년 7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