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이 지닌 유연함과 둔탁함
– <안 내놔 못 내놔>
정윤희
작: 다리오 포
연출: 이창훈
단체: 경계없는예술센터
공연일시: 2016.9.9(금) ~ 10(토)
공연장소: 경계없는예술센터 SPACE T
관극일시: 2016.9.10(토)
파시즘 체제의 충실한 경비견인 경감과 자신을 경비견 따위로는 보지 말라며 뒤꽁무니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는 경사, 두 가지 역을 동시에 맡고 있던 배우(염승철)의 연기는 날카로웠고 그 목소리는 앙칼졌다. 두 가지의 날카로움이 형성한 대립각은 체제의 견고함을 뜨게 만들었고, 그 틈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유연함을 발휘한다. 이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땅 위에 무언가를 지으려고 하지만, 그 토대를 이루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므로, 인공의 건축물로 그들을 포섭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이 지닌 유연함은 둔탁함 역시 지니고 있는 유연함이고, 쉬이 스스로의 변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날 물가는 또 올랐고, 거리에는 수 백 명의 아낙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들과 슈퍼마켓 지배인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났다. 지배인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한 임산부가 쓰러지자 지배인은 무릎을 꿇어 사과를 했고, 막간의 침묵 속에서 아낙들은 용기를 얻었다. 한 여인이 ‘이 놈이 임산부를 때렸겠다, 애기가 유산하면 어떡할거냐’고 소리쳤고, 안토니아는 ‘이 놈이 어린애 죽인다’고 거들며 행동대장의 역할을 한다. 안토니아 역을 맡은 배우(전보현)의 목소리 역시 카랑카랑했고, 극중 캐릭터는 달변인데다가 순발력이 뛰어나다. 동네 아낙들 역시 그를 따라 지배인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하더니 곧 단체로 슈퍼마켓을 들이닥쳐 물건을 털기 시작한다.
마거리타는 안토니아의 조력자로서 배우(장연주)는 푸근한 연기를 보였다. 그녀는 경찰과 남편들에게 도둑질을 숨기기 위해 자꾸 부풀려지는 안토니아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따라 뱃속에 식료품을 숨김으로써 하루아침에 출산을 곧 앞둔 임산부가 되었고 안토니아의 거짓말이 막힐 때마다 옆에서 거들기도 했다. 아낙들은 집 안에서 한 번 더 억압을 받는 존재이며, 남편과 도덕이라는 굴레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그날 그 굴레를 뛰어넘어 동네에서 기적을 일으켰다. 그날 밤 동네 모든 여자들은 신앙의 힘으로 예순의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산타 에브릴라의 기적처럼 모두 배가 불렀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슈퍼마켓에서 도둑질을 한 여편네의 남편이라면 마누라가 가져온 물건들을 깡통도 따지 않은 채 죄다 먹여버렸을 거라고 윽박지르는 죠반니 역(차성진)의 연기는 착하고 순박한 면도 지니고 있었고 의외로 어느 장면에서는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의 친구로 등장하는 루이지(정해솔)는 순응의 가치를 철썩 같이 믿는 친구 죠반니보다는 그 믿음을 일찍 깨버렸다. 그날 퇴근 길, 루이지는 통근 요금을 30%나 인상한 경영주에게 항의하기 위해 동료들과 벌판 한 복판에서 기차를 세웠고,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죠반니 역시 자신의 신념을 깨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이지로부터 앞으로는 일주일에 3일밖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설탕과 밀가루 부대 훔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캐릭터들은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주변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익숙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너스레를 떨며 말장난을 쳐대면 우리의 삶은 금새 어지러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하지만 코미디 극이니 이러한 상황들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다. 아주 오래전 마당극에서 가면을 쓴 배우들의 너스레는 주변을 웃음으로 넘치게 했었다. 대본은 따로 없었고, 헐거운 형태의 플롯과 애드리브만으로 극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연극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리오 포가 유년시절부터 살았던 이태리에서도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 다 같이 배를 굶주렸던 시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는 이들을 이렇게나마 골탕 먹이며 위안을 얻었지만, 오늘날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 역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니 현대의 코미디는 마당이나 거리에서 이루어졌던 옛날 연극의 정서는 그대로 가져오되, 배우는 타인 행세를 위한 가면을 벗어버리고 스스로를 연기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시대는 바뀌었고 적어도 이 땅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들은 둔탁한 유연함을 발휘하고 있으며 기적 또한 일으키고 있다. 반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날카로운 체제들 간의 대립각들이 미미해진 오늘날 유일한 승자만이 떵떵거리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진짜 배를 굶주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히기 십상이며, 그들에게서 기적을 기대하는 것도 매우 힘들어 보인다. 파시즘과 공산당이 대립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다리오 포의 작품이 오늘날 읽혀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