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호 편집인의 글)
철저히 파괴된 문화예술 행정, 상식의 회복만이 살길
지금 우리에게 딱 맞는 동화가 있다. ‘벌거숭이 임금님’이다. 자기 눈을 의심하며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기 바쁜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곧이곧대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아이들만 상식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은 건강하다. 잘못된 정보로 세뇌되지 않은 것이다. 세뇌는 종종 교육과 혼동되고 그래서 때로 악용된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세뇌는 일부의 욕심으로 다수를 희생시키는 불순한 의도의 산물일 뿐이다.
대통령이 수십 년 동안 심신미약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 사람을 왜 대통령으로 뽑았느냐고 질책하는 건 나중 일이다. 우선 능력이나 자격이나 모두 대통령으로 부적격이므로 당장 내려오게 해야 한다. 이에 있어 국정 공백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다. 4.19를 필두로 매번 국민의 손으로 정의를 세워온 나라이다. 광주민주화 항쟁 때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그 감동적인 질서 의식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10월 29일 토요일에 있었던 광화문 시위만 보더라도 금세 우리가 지닌 집단지성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비선실세라는 몇 사람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심 대상이 엉뚱하게도 문화예술이다. 만만해서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문화체육관광부는 물론이고 문화예술위원회를 필두로 한 여러 산하기관들마저 철저히 파괴된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그렇게 망가진 이 조직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시켜서 했건 자진해서 했건 잘못을 한 사람들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잘못을 잘못이 아니었던 걸로 만들기 위해, 또는 자신은 상관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다시 무리수를 범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적 쇄신이나 청산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 조직이 저지른 잘못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므로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히 혁명이라 할 정도의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이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이나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 행정의 최고 자리에서 군림하는 전근대적 구조는 사라져야 한다. 반드시 문화예술계 현장의 목소리가 모여 흐름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문화예술의 민주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물론 민주화는 시끄럽고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분명 그것을 견뎌낼 저력이 있다고 믿고 꾸준히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몇 번 시늉만 내다가 조금만 시끄러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로 회귀해버리는 행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그냥 맡겨놓고 기다리면 나름의 질서가 생길 텐데 그걸 못 참고 과거보다 오히려 더 경직된 체제를 들이대는 것은 분명 엉뚱한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2003년 연극계는 문화예술위원회 설립을 위한 문예진흥법 개정에 앞장선 바 있다. 이전의 문예진흥원을 관 주도로 보고 민간 주도의 위원회로 바꾸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그 결과 과연 민간 주도가 되었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의 문화예술위원회를 보면 과거 문예진흥원 시절보다 오히려 더 종속적이면서 훨씬 더 권위적이다. 여기서 종속적이라 함은 자율성은 없이 오로지 문체부 등 상급 기관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수동적 하부 조직에 불과하다는 뜻이고, 권위적이라 함은 그러면서도 예술인들에게는 엄청난 권력자로 행세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종속적인 것과 권위적인 것을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으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의 권위적 태도가 나올 것이 당연하다.
이미 제안한 바 있지만 진정한 민간 주도의 예술 지원 기구가 생겨야 한다. 그것은 지금의 문화예술위원회가 아닌 좀 더 세부적인 분야별 기구가 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존속한다면 이런 분야별 기구의 연합체 정도의 성격이면 족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몇 달 전 문체부가 발표한 미술진흥위원회 설립 계획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이번 최순실 사태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한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시절 입안된 정책일 테니 말이다.
분야별 위원회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아니 그 이후에도 정부는 일종의 스태프로서 지원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마치 시위 현장에 수백 개의 시민 단체들이 모여도 신기할 정도로 질서가 형성되는 것처럼 해당 분야에서 치열한 논쟁을 거치며 형성되는 흐름을 존중해야 한다. 설령 분야별로 각각 다른 형태의 기구가 탄생하더라도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 그 불편함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야말로 획일화로 가는 길이요, 예술의 특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극계에는 연극위원회 또는 연극진흥위원회가 필요하다. 어떤 형태로 만들고 누가 일을 맡을지에 대해 연극계 논의가 필요하다. 이 논의의 장에 못 들어올 연극인, 연극단체는 없어야 한다. 그게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어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길고 지난한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연극에 맞게 지원 정책을 펼칠 기구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형식만의 기구가 존재하고 무늬만의 지원이 존재하는 지금의 불합리한 상태를 반복할 뿐이다.
마침 나라의 통치 구조를 어떻게 할지 논의가 시작될 듯하다. 그 논의 역시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한다. 몇몇이 독점한 논의와 결정은 또 다른 불행으로 연결될 것이고 그럼 우리나라는 더 이상 회생의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시점에 문화예술에 대해서, 또 연극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얼핏 너무 지엽적이고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상식적인 부분들이 모여서 상식적인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진리이다. 게다가 문화예술이나 연극은 결코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우리 연극인들이 연극 지원 기구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논쟁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 연극계가 우리나라 전체에 상식을 퍼트리는 모범 사례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6년 11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니다 ᆢ의문이 잇습니다ᆢᆢ왜 영남출신 대통은 대부분 문제잇는사람들이 대다수 인지ᆢ거기만 권력을 잡으면 왜 철저히 민주주의가 무너지는지ᆢ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ᆢ그리고 여타지역의 국ㅇ신들도 이 문제에 대해 조직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