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호 편집인의 글)
진정한 새 출발을 위하여
류진룡 전 문화부 장관이 화제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부당함을 직언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인사 문제로 밉보여 해임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양심적인 공무원들을 통해 확보한 상당량의 블랙리스트 실증 자료를 특검에 제출한 듯하다. 그러면서 과장급 이하 문화부 공무원들에 대한 면책 주장을 하였다.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하위직 공무원들은 또 하나의 피해자일 뿐 그들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나름 일리가 있고 상당히 공감도 된다. 그러나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사후 책임을 묻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있어 잘못의 원인이 뭐고 과정은 어땠는지 따져 책임의 소재와 정도를 밝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다음 비로소 실제 문책의 범위와 방법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정서적 면과 실질적 면을 모두 살펴 문책으로 얻는 것보다 오히려 잃는 것이 많을 때 심사숙고와 사회적 동의를 거쳐 면책의 선언이 가능할 것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서 특검의 엄정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실체가 드러나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특검의 조사는 아무래도 범죄 입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텐데, 우리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진실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특검이나 감사원과 같은 외부 조사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문화부와 관련 산하기관들의 자체 조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에 있어 스스로 가혹할 정도의 기준을 적용하여 잘못을 밝히고 그에 대한 분석과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 보는 것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건강성 회복에 필수적 과정이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데 잘못에도 종류가 있다. 같은 정도의 잘못이라면 대부분 실수보다는 고의에 대해 엄격하다. 물론 고의라 해도 악의적인 경우도 있고, 완전한 고의라고 보기 어려운, 약하고 비겁한 데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아마도 문화부 하위직 공무원들의 잘못은 이중 후자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악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끼친 악영향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면책이란 말이 쉽게 나오기는 어렵다. 게다가 말이 하위직이지 정부 중앙부서 공무원들이 담당하는 영역은 실로 대단해서 과연 그들을 약자로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즉 적어도 자신의 담당 영역에서는 권력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있어서는 분명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으므로 일단 약자로 분류하기로 한다. 통상 약하고 비겁해서 저지른 잘못에는 양심의 가책과 자책이 따른다. 류진룡 장관이 확보한 자료들은 대부분 이런 가책과 자책의 산물일 개연성이 높다. 이에 반해 완전한 고의일 경우 양심의 가책은 없고 잘못을 들킨 데 대한 자책만 따르는 경우도 많다. 엄중한 처벌로써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잘못을 저질러도 무사할 수 있다는 그릇된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남는다. 약자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더욱이 자신은 지시대로 행했을 뿐이므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심각하다. 약자로서 하위직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는 차치하고, 일단 누구건 진실 고백과 뼈를 깎는 자기반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실 이건 고의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에 적극 가담하여 이미 처벌 대상으로 드러난 일부 고위직을 제외한 모든 담당 공무원들에게 해당된다. 류진룡 전 장관만 하더라도 블랙리스트의 폐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가 해임될 때까지 이루어진 소극적인 실행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도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은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을 가리는 판정뿐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려내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에 있어 일부 잘한 일이나 억울한 일로 그 사람의 잘못을 모두 덮는 것도, 그 반대의 경우도 옳지 않다. 선정주의에 빠진 우리 언론이 자주 범하는 오류이다. 단언컨대 선정주의는 흥밋거리는 될지언정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거나 향후 현실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 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대한민국 문화예술 행정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이제 진정한 문화국가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바로잡고 새로 세워야 할 때이다. 태풍의 중심에 놓였던 문화부는 물론이고 그 영향 아래 있던 모든 관련 기관들 또한 예외 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화부 담당 공무원들과 관련 기관 해당 임직원들의, 선정주의도 자기합리화도 아닌, 잘잘못에 대한 성찰과 고백과 자기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게 환골탈태의 각오로 완전히 다시 태어날 때 비로소 우리 문화예술 행정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참다운 문화예술 융성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2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중앙일보는 현정권의 블랙리스트의 발생을 박근형의 ‘개구리’라고 대서특필한 기사를 보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주관적 외침이 일파만파를 불러왔다. 그래서 물론 정치적인 이유이긴 해도, 많은 고위직 공무원이 형무소로 갔다. 이로써 ‘블랙리스트’의 서류작성은 앞으로 중지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불이익까지, 또 상호 간에 불편한 관계는 여전히 지속될지 모른다. 이게 인간사다.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 오교수는 정권이 바뀌면 예술판 ‘정무직’에 오르길 희망하는지 모른다. 계속되는 글에 그런 냄새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오교수에게 위험함을 느낀다. 사실 연극인 모씨가 노무현정권에서 나섰다고 ‘문화부차관’이 날아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있는 연극인은 그 후 집에서 쉬고 있다. 공무원들의 보복이 아닌가 싶다. 리더가 되려면 집단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막글은 나같은 소인배나 쓰는 것이다. 왜 자꾸 공무원을 자극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속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 두고보자” 할까 두렵다. 우리 이야기를 하자. 차마 지원금 때문이라는 말은 하기 싫다.
그리고 심재찬씨의 글은 싣지도 않다가 이제 싣고, 나는 그가 연극계의 리더가 되지 못하고 대구에 가 있는 게 결국 우리의 손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본인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교수는 깊이있는 신중한 처신을 하든가, 나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막가든가 해라. 내가 보기에, 당신이 이판을 더 어지럽히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교수도 은퇴하고 동네에서 놀 사람이 아닌가! 길게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우상전선배님 말씀에 공감합니다만, 오교수님처럼 깨어있는 글을 쓰는 사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렴 저같은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수로 다음 정권에서 임명직을 바라시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동종업계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시기에 따라 오해를 가져올 수 있죠.
지금은 더 큰, 밖의 적을 위해 힘을 모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거죠. 보다 나은 예술환경을 만들기 위해. 후배은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기 작업에 열중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연극계의 젊은 후배인 오세혁이 이런 인터뷰를 한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 요지는 “자기는 지원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지방으로 어린이극을 하러 다닌다.” 그래야 연극인이 바른 길을 갈 수 있겠다 싶다는 그의 말에 한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저런 생각을 하는 연극인도 있구나 싶어서다.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싸운다고?’ 불행히도 우리는 제 정신을 갖고는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럴 것이다. 어느 정치세력에 가담한 사람들, 정치교수들이 너무나 세를 과시한다. 이제는 그들의 말이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그러니 반대의견을 내세우면 역적이 될까봐, 왕따당할까봐 말을 못할 지경이다. 연극계의 편협과 독선이 도를 넘었다. 아직도 80년대 ‘운동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점점 사회는 다양화되어가는데 연극계는 더욱 쪼그라들고 있다. 과연 박근혜만 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꼭 문재인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연극인이 갈 최선의 길인 것 같다. 빨리 대선이 끝났으면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린다. 이것도 편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