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비극적’ 운명
우상전(연극배우)
국립극단의 3년마다 반복되는 ‘비극적 운명’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국립극단이 이제는 예술감독의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만 되면 ‘정치투쟁’ 장소로 변하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요사이 평론가 김미도교수의 외침을 듣고 있으면, “집단에 편입되는 순간 아무리 뚜렷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학력, 교양, 직업,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하나의 집단정신에 지배되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사교(邪敎)집단’을 향해 쓰던 말이 이제는 ‘정치집단’에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어느 종편 앵커는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김정남이 살해당해도 톱뉴스는 항상 ‘박근혜’로 시작한단다. 그러니까 그의 ‘땡뉴스’가 박근혜인 셈이다. 그래서 방송종사자들은 그가 약간 간 게 아닌가 한단다. 하지만 한번 ‘집단’이 호응해 주는 맛에 빠지면 그렇게 되는 법이란다.
사실 김미도교수의 국립극단에 대한 비난 글에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꾸하기도 싫었다. 자기의 분노, 증오의 감정을 ‘진실’인양 말하는 그가 평론가로서의 품격을 잃고 있어서다.
하지만 김미도교수보다도, 그의 글에 ‘호응’하는 집단, 그런 연극동네 사람들이 더 걱정스러웠다. 요즘은 ‘가짜 뉴스’도 넘쳐나는 시대가 아닌가.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국립극단의 공연 ‘미스 줄리’의 무대미술까지도 김미도교수는 “무대와 의상디자인은 인상파 회화를 보는 듯한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배우들을 겸손히 섬겨주는 무대라기보다는 무대장치와 오브제들에 오히려 배우들이 종속되는 듯한 거북스러움이 있었다.”
이러니, 뭔가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는 ‘사명감’에서 다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월간 <한국연극> 1월호 ‘국립극단, 문제를 통해 숙제를 생각한다!’에서 그는 국립극단의 공연에 대해 악의적인 ‘분노’로 일관하고 있다.
아, 분노! 먼저 ‘박근혜’는 평생을 ‘배신의 분노’로 살아온 분이다. 그 결과, 지난번 총선에선 유승민에게 배신의 분노를 퍼붓다 선기를 망치고, 결국 민심을 잃더니 ‘최순실 게이트’로 퇴출될 운명에 놓여 형무소까지 가게 생겼다.
또 대선후보인 ‘문재인’은 어떤가. “분노가 빠지면 정의를 세울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예수님이 괜히 ‘사랑’을 설파한 게 아닌데, 좌우간 지금 한국은 ‘분노의 시대’가 만개했다.
국립극단의 월간 <한국연극> 11월호, 이어 1월호에서의 그의 국립극단을 향한 악평(惡評)은 연말 ‘하반기 공연결산 좌담‘에서의 타 평론가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의 글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이건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평론가로서 할 짓이 아니지 싶다. 이제는 평론을 포기하고 정치의 ’진영논리‘를 따르겠다는 심사가 아닌지?
김미도의 ‘국립극단 농단사태’
사실 국립극단의 ‘비극적 운명’은 박근형의 ‘개구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손진책예술감독의 연임이 무산되었다는 게 연극동네의 공론이다. 그렇게 해서 ‘배신의 분노’를 앞세운 박근혜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의 일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진보좌파들에게 연극동네의 대(對) 국립극단의 투쟁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크게 공헌하는 대단한 활약상으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박근형대표만 해도 자기 극단에서 ‘해도 될 이야기’를 구태여 국립극단으로 끌고 가서 ‘분노를 표출’한 의도가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그는 많은 사람을 형무소로 보낸 또 다른 ‘분노의 시대’를 연 공로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언젠가 또 다른 ‘분노의 보복’으로 둔갑해서 우리를 괴롭힐지 모른다.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이 반복되는 나라 아닌가? ‘증오가 증오를 낳고, 부조리가 부조리를 양산하는’ 것은 인간사의 법칙이다.
그리고 다시금 3년 뒤, 이번에는 평론가 김미도교수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전 세종문화회관 M극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공연된 박근형의 ‘햄릿’을 보고 그는 이렇게 평했다. “햄릿이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서 공연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듯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부 평론가들과 좌파들이 김윤철감독을 ‘부역자’로 여기는 시선일 것이다. 하지만 김감독은 ‘특검의 영웅’인 유진룡장관이 임명한 사람이다. 따라서 김윤철감독도 (문체부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면서) 일반직 공무원들처럼 그저 ‘블랙리스트’의 소용돌이로 많은 피해를 본 피해자일 뿐이다. 그저 아무런 내색조차도 할 수 없는 국가공무원 신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그를 향해 (김미도교수가 무대에 오른 공연된 작품을 갖고 공격하니) 억지논리로 일관하니 ‘국립극단 농단사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일단, 월간 <한국연극>의 편집장인 김미혜선생이 김미도교수의 원고를 실어준 것은 잘못된 판단인 것 같다. 대학후배라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싶다. 아니면 ‘특집기사’로 어떤 거래나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예술감독 교체기만 되면, 연극인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며 싸우는 3년마다 벌어지는 ‘정례행사’는 국립극단을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번에는 어렵사리 평론가를 예술감독으로 모셨더니, 평론가들이 정치적 ‘분노’를 이렇게 연극판으로 옮겨 코스프레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당초 정부가 ‘인사(人事)’에서 전권을 휘두르면서 이미 말썽의 소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국립극단이사회’가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고, 모든 걸 ‘제왕적’ 대통령과 문체부가 전횡을 행사하다가 ‘최순실의 농단사태’로 박근혜정부가 붕괴되면서 결국 국립극단이 좌파들에게 ‘싸움터’를 제공한 꼴이 되었다.
지난번 이명박정부도 초반부터 ‘쇠고기 시위파동’을 겪더니 5년 내내 힘을 못 쓰고 시들시들한 것처럼, 국립극단도 연이은 상처로 비실거리다 영원히 침몰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국립극단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국립극단의 문제점이란?
김미도교수의 비난 글에 이어, 이 글을 인용한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이 국립극단을 향해 던진 문제점은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1. ‘신(新)창작극’이 없다. ‘한겨레신문’의 지적은 국립극단에 ‘지금 여기 한국’이 없는 것이다. 즉 세월호와 위안부 등의 ‘한국인의 관심거리’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2. 또 하나는 외국연출가에 의한 공연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먼저 신작창작극이 없었던 것은 신작 ‘한국인의 초상’으로 미루어, 김윤철감독이 새로운 ‘콘텐츠’로 창작극을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창작극이 적었던 것은 본시 평론가여서 창작극에 대한 완벽주의를 추구한 ‘결벽증’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거기다 정부의 ‘블랙리스트’의 압력으로, 극적 ‘소재’에도 커다란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박근혜정부에서 누군들 ‘배신의 분노’를 보고 몸을 사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거기다 좌파의 득세로, 연극동네의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게 우리 동네의 사정 아닌가! 실제로 (구자흥감독시절)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모 연출가가 자기의 ‘좌파논리’를 서슴없이 표출하는 걸 눈여겨 보아온 게 사실이다.
또 (‘창작산실’의 공연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한국의 연극판은 ‘대극장용’ 창작극이 약세인 게 현실이다. 그건 단적으로 우리 연극계가 오랜 시절 소극장에서 공연활동을 해온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은 누구보다도 ‘평론가’들이 가장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여성평론가들이 김윤철감독에게 분노를 폭발하는 걸 보면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라도 있는지’를 알고 싶을 정도다.
50년 가까이를 연극판에 살아오는 나로서, 또 아무리 현(現)정치가 국민을 ‘분노의 시대’로 이끈다 해도, 처음 대하는 이런 ‘분노와 증오’의 글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연극평론가들의 ‘오만’
예전에 한국영화가 인기가 없어 방화(邦畫)라 불리던 시절, 아침이면 TV뉴스에 등장해 관객도 들지 않는 영화를 명화라고 소개하며 입에 침을 튀기던 사람들이 바로 영화평론가였다.
그때 영화평론가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연극인으로서는 무척 부러웠다. 그런 그들이 한국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하자 제일 먼저 TV와 잡지에서 사라져버렸다.
또 현대무용이 성황을 이룰 때, 무용인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사람들이 바로 무용평론가였다. 그들의 ‘황제대우’는 내가 보아도 시샘이 날 정도였다. 그토록 득세하던 그들이 대학로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학교에서 수업만 하고 있겠지?
한때 잘나가던 뮤지컬은 아예 처음부터 평론가가 없었다. 순천향대 원종원교수가 가끔 언론에 등장해, 뮤지컬공연의 홍보맨(?)으로 활약한 게 고작이다. 그래도 뮤지컬은 공연계에서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처럼 타 장르에서는 지금 ‘평론가’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래도 연극평론가만이 굳건히 한국예술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권위를 자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김윤철감독이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에 오르면서 연극평론가들의 ‘위상’은 절정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많은 현장연극인들의 주장대로 “평론가가 꼭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 나라가 어디 있냐?” “전혀 현장경험이 없지 않느냐!”등의 논란으로 김윤철감독이 임용에서 탈락했으면, 그 이후에 연극평론가들의 위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한 순간에 (말 그대로) ‘폐족(廢族)’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이 벌써 예전의 ‘논란’을 잊고 오만에 빠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평론가들의 억지 주장
김미도교수의 비난 글이 월간 <한국연극>에 실리기 전에, (내가 따로 만나) 김윤철감독의 그간의 성과에 대해, 객관성을 가진 믿을만한 분들에게 물어 보았다.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동안 국립극단 공연을 빼놓지 않고 보아 온 언론인으로 서울예대 부총장까지 지낸 정중헌선생은 “백점 만점에 70점은 줄 수 있어” 또 연출가인 원로 정진수선생은 “그만큼 할 사람도 없어!” 라고 짧게 답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지 않은가! 결국 김미도교수의 김윤철감독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에 의한 극히 주관적이고 악의적인 것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차라리 연출가 최창근이 ‘문화사대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외국연출가들로 인해 자신이 ‘밥그릇’을 잃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미도교수는 극작가도 연출가도, 배우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국립극단의 작업과는 무관한 사람 아닌가.
거기다 그동안 해외공연물을 빠지지 않고 관람하던 사람들이 평론가들 아니었나? 예술의 전당, LG아트센터, SPAF축제 등에서 공연되는 모든 해외연극을 빼놓지 않고 관람하며, 내심 이를 외면하는 현장연극인들을 경멸하던 사람들이 평론가들 아닌가?
그래서 한번 묻고 싶다. 해외공연을 보면서 평론가들이 스스로를 ‘문화사대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평론가인 신현숙선생은 ‘경향신문’에 해외연출가의 작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희곡이 쓰여 진 해당 문화권에서 살았던 연출가들을 통해 작품의 문화적 배경에 따른,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해석을 경험하게 해줬다.”
그런데, 도대체 이를 김미도교수는 ‘문화사대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솔직히 ‘사대주의’를 부르짖는 최창근한테 배우로서 그의 ‘한국적’ 연출을 한번 경험하고 싶다.
나를 포함해 많은 한국배우들이 외국연출가를 선호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들의 오디션에 뽑히면 영광으로 알 정도다. (차마 한국연출가들과의 비교분석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출연배우들을 향한 ‘인격무시’와 ‘모멸감’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한국연출가가 없지 않은 현실에서, 한국배우들이 외국연출가를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미도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외국연출가는) 한국배우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통역이나 드라마터그를 통해서 별 문제가 없다하더라도 배우들의 발성과 화술이 적절한지, 연기에서의 정서적인 반응과 감정선이 제대로 구축되고 있는지는 섬세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배우 김정은은 ‘경향신문’에 외국연출가와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해외연출가들은 처음부터 명확한 무대콘셉트와 작품의 해석을 가지고 출발했다.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대화하고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
실제로 대극장에서 한국 배우의 발성과 화술은 내외국인 연출가를 가리지 않고 심각성을 보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배우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려 ‘붐’ 마이크를 쓰는 것도 외려 국내 연출가에게서 더 많이 발생한다.
김미도교수의 지적은 단적으로 우리에게 외국처럼 국립극단에 ‘보이스코치’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지 외국인과의 작업 탓이 아니다. 그런데도 외국연출가들과 작업도 해보지 않은 김미도교수가 (자기의 선입견만으로) 억지를 쓰면 안 될 것이다. 지금 김교수는 분노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내 경험으로) 연기에로의 접근법이나 공연에서의 완성도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연출가들은 아직도 해외연출가들에 비해 훨씬 아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해외희곡을 공연하려면, 더구나 해외고전의 경우는 연출을 외국연출가에게 맡기는 게 글로벌 시대에 맞는 합당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창작희곡으로 명동예술극장 등의 대극장무대를 채울 수 없다면, 해외명작의 연출을 외국인이 맡기는 게 옳다. 이제는 한국도 GDP 세계 11위 국가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10위가 우리가 ‘교육이민’가는 캐나다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명작이 나올 때까지 ‘창작극’을 기다려야 한다. 해마다 서울연극제를 개최해, 또 요사이는 ‘창작산실’까지 만들어, 좋은 신작창작극의 탄생을 염원하는 연극축제를 반세기에 걸쳐 시행하고 있지만, 꾸준히 관객을 모을 ‘명작 한편’을 건진 게 없지 않은가?
그동안 연극인들은 ‘창작극 육성’을 위해서, ‘극작가’들에게 너무 많은 걸 희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막말로 그들의 ‘마스터베이션’에 놀아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외레 연출가를 키우는데 더 공을 들이자! ‘세상엔 희곡도 많아 연출할 해외작품도 너무 많지 않은가!’
관객들의 대단한 찬사를 받은 중국의 ‘조씨 고아’만 해도 중국에서 800년 된 고전(古典)희곡이라고 하지 않는가! 뛰어난 고전희곡 한편 없는 우리로서는 마냥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여러 면에서 ‘한류’를 주도하고 있고, 세계에 1등 상품을 68개나 내놓고 있는 세계 14위 국가다. 이런 나라에서 명동예술극장의 무대를 채울 ‘고전창작극’ 한편이 없이, 해외연극인들에게 번역극 무대를 개방하는 걸 ‘사대주의’라고 폄하하고, 교류하는 걸 거북해 하는 것은 구한말의 ‘쇄국정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사대주의’라고?
오래전에 한국영화인들이 외세라며, 미국의 ‘UIP영화’를 막겠다고 상영극장에 뱀을 풀어놓은 일을 기억하는가? ‘UIP영화’가 침략해오면 한국영화는 ‘씨가 마를 것’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영화인들이 외쳤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불과 10여년이 지나자, 할리우드영화는 한국에서 2류 영화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태껏 이걸 고수하고 있다.
초창기 한국뮤지컬을 주도하던 연출가 윤호진대표 등이 나서서 일본 ‘시키’(四季) 뮤지컬이 한국에 상륙하면 (경쟁에서 뒤져) 한국뮤지컬이 모두 망할 거라고 외쳤지만, ‘시키’는 ‘잠실’에 터를 잡은 지 고작 일 년도 못 버티고 다시 일본으로 철수했다. 이제는 일본뮤지컬이 한국에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현상을 목격하면서도, (연극계의 지성인을 자처하는 좌파평론가와 연극인들이 모여서) ‘문화사대주의’를 외치는 게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는가?
김미도교수에게 한번 묻고 싶다. ‘한류’가 세계를 흔드는 나라에서, 당신들은 어디서 모여 북한사람들이나 사용할 용어를 써가며 – ‘문화사대주의’, ‘빈곤한 농촌’, ‘생계형 매춘’ 등으로 대화를 나눕니까?
서울대 송호근교수가 쓴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의 르포를 읽고, 한국의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마저 시샘하는 귀족노동자 천국에서, 도대체 이런 용어를 사용하며 대화를 하는 연극인들이 모이는 곳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박근혜대통령이 잘못한 줄 알면서도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한탄하는 (노인네들의 외침이) 김미도교수나 일부 평론가들의 발언, 최창근연출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정말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김미도교수 같은 사람이 국립극단을 터무니없는 논리로 농단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게 구(舊)시대 사람인 나의 각오다.
‘한겨레신문’의 논조를 빌린다면 “도대체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세상에 이런 찌질이들이 있나싶다. 그대들은 이 땅의 예술가로서 ‘전화위복’ ‘오기’ ‘극복’ 이라는 말도 모르는가?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미래의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저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검열’만 외치면 최고라고 여기는 젊은 연극인들에 대한 허무감이다. 그게 고작 ‘좌파’ 지성인들의 미션인가?
한국연극(국립극단)의 근본적인 개혁
지금 대학로의 한국연극, 서계동의 국립극단의 문제점을 ‘압축’해 들여다보면, 우리사회와 한국연극이 이런 ‘결핍’의 영향 하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해야만 대학로도, 국립극단의 문제점도 해결이 가능해질 것이다.
1. 한국에는 예술가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한국에는 ‘전업’예술가가 없어 대학교수들이 심심풀이(?)로 ‘겸업’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뛰어난 예술가의 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2. 한국의 예술교육을 관장하는 ‘교육기관’이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 지금의 예술교육으로는 단순한 ‘예능인’밖에 양성할 수 없어, 갈수록 ‘고급예술파트’는 외국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게 현실이다.
왜 ‘사회안전망’이 필요한가?
“한국정부가 어떻게 지원하기에 대중문화(한류)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수출되고 있습니까?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 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이들은 질문이다.
“정부가 경제 개발하듯 투자하고 계획한다고 문화가 발전하나요? 그렇다면 지원이 훨씬 많은 프랑스의 대중문화가 더 수출이 잘돼야 하겠네요.”
“한국정부의 그간의 문화정책 및 지원이 문화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하더라도, 한류 열풍에 정부가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한류는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 수용현상이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홍석경의 ‘한류탐사’에서 인용)
왜? 국립극단에 외국연출가들이 설쳐야 하는가? 왜 대극장에서 이 시대의 이슈를 다룬 좋은 희곡이 나오지 못하는가를 우리의 좌파 연극인들은 그저 이를 이념적으로만 판단하려 드는 게 현실이다. ‘문화사대주의’에 보듯 이를 정치이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홍교수의 글에서 보았듯이, 가장 글로벌한 장르인 한류도 정부가 지원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공연문화도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국내에서 ‘흥행’이 안 되면 글로벌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시대여서 ‘글로벌적 경쟁력’이 없으면 문화의 ‘소비국가’로, ‘문화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좌파를 신뢰하지 않는 게, 그들은 공연문화의 제반현상을 ‘정치논리’로만 펼치려들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국립극단의 문제점도 국립극단의 자체적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국립극단 공연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대학로의 연극인들이어서, 국립극단의 문제점이 바로 대학로 연극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좌파들은 이를 마치 국립극단의 자체적 문제로만 여겨 공격을 하고 있으니 논리가 허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리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게 되는 것이다.
김미도교수는 국립극단의 정단원이 되면 왜 노동조합을 만들어 장민호, 백성희선생처럼 ‘종신단원’이 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왜 ‘정단원’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한국연극에 왜 대극장용 연출가와 극작가가 없어, 국립극단이 해외에서 연출가를 ‘수입’해 와야 하는가를 ‘문화사대주의’ 말고 달리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방향을 바뀌어) 한국영화가 왜 흥행이 잘 되고, 어째서 한국에서 갑자기 민주화 이후에 뮤지컬이 활성화 되었는가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는 바로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데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나라’가 된데 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자, 자연히 재벌기업이 영화에 대한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생활이 풍족해지자 영화가 오락물로서 가치가 높아지고, 이를 통해 ‘돈벌이’가 잘 되고, 따라서 이들 장르에 자연히 인재가 모이게 되고, 그에 따라 영화의 질적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지고, 이런 ‘선순환’이 이루어낸 성과가 지금의 한국영화다. 이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를 만드는 영화예술인들도 대개가 다 ‘좌파’인 게 현실이지만, 그들은 ‘좌파논리 + 자본’의 결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한국의 연극인들은 ‘북한식’ 사고에 머물러 있다.
그건 한국연극이 자본의 혜택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국가의 지원만 받아 ‘사고가 고정’ 되어 있는 탓이다. 연극을 애초부터 ‘흥행’이 불가능한 구조로 운영돼 와서 ‘자본의 맛’을 보지 못한 탓에 ‘자본’의 사각지대가 된 게 연극세상이다. 그래서 연극인들이 게으르고 나태해 진 것이다.
따라서 영화와 뮤지컬에 동력을 제공하다, 박근혜로부터 핍박받은 CJ같은 재벌그룹들이 연극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연극에서 평론가들이 득세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된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연극이 국가의 지원밖에 기대할 게 없는데, 지원은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라고 전문가가 말하고 있지 않는가. 원래 지원이란 죽지 않을 정도로 ‘미음’만 제공하는 것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사회적 동력이 있어야 연극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무얼까? 그 유일한 방안이 바로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복지정책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연극인들은 관심도 없이 그저 정치인만 따라다니며 구호만 외치고 있으니, 이에 따른 결핍이 세계 연극과의 질적 수준을 점점 더 크게 벌리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 국립극단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기본소득’제도란?
요즘 대선후보인 이재명성남시장이 공약으로 내세운 ‘기본소득’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 서구에서 실험대상에 오른 새로운 개념의 복지정책이다. 앞으로 연극의 좌파들도 이런 좌파성 정책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본소득’이란? 한마디로 ‘국가가 개인에게 자격제한 없이 의무도 요구하지 않고 개인의 기본생활의 보장을 위해 돈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나가 기본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복지제도다. 나라에서 기본적으로 개개인에게 무작정 기본급을 제공하는 신(新)개념의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공짜 밥’이라고 말하는 회의론자들도 있지만, 이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4차산업혁명’을 앞두고 가장 주목해야 할 복지정책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이건 ‘청년실업’과 ‘노인복지’를 해결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매달 일인당 우리 돈으로 300만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되었다. 그래서 마치 국민들이 ‘공짜’를 싫어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사실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이로 대체할 수 있을지, 재원확보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일단 더 생각해보자는 것으로 미루어졌을 뿐이란다.
문제는 바로 이를 위한 ‘재원확보’ 방안을 강구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여야가 싸우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해법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복지가 시행되면
1. 누구나 극작가를 꿈꾸고, 연출가와 연극배우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 기본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에. 거기다 조금씩 알바수입을 보태면 생존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찾아 용기를 내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인공지능시대가 되면 ‘로봇’이 할 수 없는 연극이 최고로 선망 받는 직업이 될지 모른다.
2. 국립극단의 참가자들은 모두가 ‘대학로 사람’들이다. 그렇게 되어 대학로의 연극이 풍성해지면, 뛰어난 인재가 배출될 것이고 당연히 국립극단에 좋은 인재풀이 형성될 것이다. 그래서 ‘문화사대주의’라는 말을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3. 그렇게 된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배우를 하지 않고, 연출가로의 진로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우리의 연극생태계가 도저히 ‘연출가’가 탄생할 수 없는 구조여서 나처럼 포기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연기를 못해서 연출을 한다고 놀림을 당하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4. 애초부터 수입이 보장된 대학교수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나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연극인이 되려고 나설 것이다. 또 국립극단에서 작업을 못해 노심초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경제적으로 안정된 배우들이 좋은 연출과 작품을 골라 개인극단으로 많이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5. 연출가들이 연극인이 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자기만족을 만끽하며, 연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배우들이 각자 도생할 수 있어 제작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출가의 작업의 폭이 자유롭고 넓어질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실험극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독특하고 독창적인 연극이 탄생해 관객들의 관심도 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기본 생활이 보장되어야 누구나 안심하고 예술로의 커다란 욕망으로 도전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활고로 인해, 또 이게 무서워 아예 접근을 하지 못하거나, 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어느 세월에 좋은 인재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연극이 전 분야에 걸쳐 정체되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연극계의 좌파들도 이제는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저 특정후보를 따라다니고, 광화문 텐트에서 구호를 외친다고 연극판의 근본적인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취약점이 해결되지 않아 좌파가 지배하던 김대중, 노무현시절에도 연극은 한발 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좌우(左右) 상관없이, ‘복지정책’의 실행만이 연극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니, 항상 무언가에 억눌려 살고 있다는 악몽에 시달려 늘 독재시대에 사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만 엉터리 좌파의 논리에만 심취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공산독재에 시달리던 동유럽이) 그래도 연극예술로 꽂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식’ 복지정책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만 해도 공산독재로 사고의 자유가 없어 ‘좋은 신작’이 탄생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연출가와 배우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국립극단의 정단원이라 할지라도 오디션에서 탈락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니 유학을 가도 ‘교수가 되기 위한’ 이론을 전공하고, 연출을 전공해도 부모의 유산이 없으면 한국에 와서 제대로 작업을 할 수가 없어 ‘대극장용 연출가’로 입신하기 힘든 것이다.
복지정책이 있어야 유덕형 예대총장이나 홍상수감독처럼 ‘금수저’가 아니어도 정상적인 예술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평론가들도 정치판의 구호만 외칠 게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현실을 냉철히 진단할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 ‘교육기관’의 역할이 중요한가?
손진책감독시절,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의 통합론이 한창 거론되고 있을 때였다. 손감독에게 (내가)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과 통합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한예종 연극원’과 통합하는 게 어떤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것도 러시아의 세계적인 연출가 ‘레프 도진’ 극단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국립극단이 앞으로 성장하려면, 같은 문체부 소속인 ‘연극원’(교육기관)과 통합이나 연계를 강화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두 기관은 같은 문체부 소속이어서 아주 손쉽게 결합할 수 있다.
한국연극처럼 복지정책이 허약해 인재난을 겪고 있는 형편에서는 공연현장과 교육기관을 직접 연결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처럼 예술대학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예술가의 배출을 전적으로 예술대학에 의존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되레 ‘상급예술가’를 양산하지 못하고, 즉 극작가, 연출가, 안무가, 작곡가 등을 양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기능예술인’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성악가, 발레리나, 발레리노, 피아니스트의 배출이 전부다.
왜 그럴까? 예전에 스승과 대면해 ‘도제교육’으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예능교육’을 단지 대학이라는 정규교육으로 대체한 게 전부여서 그렇다. 그래서 김미도교수가 가르치는 문예창작과에 다녀도 ‘도제교육’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으면 훌륭한 극작가가 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체계를 갖춘 예술대학을 만들지 않으면 ‘도제교육’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급예술가를 길러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예술대학을 없애면 그나마 예능인마저도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대학을 나와야 (대졸이 희망) 하는 한국현실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을 통한 상급의 고급예술가를 도모하려면 우리만의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연극원은 다행히 ‘교육부’ 소속이 아니어서 새로운 변화를 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따라서 연극원을 ‘잘만 운영’하면 한국연극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내 주장이다.
그러려면 단적으로 일반예술대학처럼 운영하지 않고 ‘차별화’를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일반대학처럼 대입시를 치루지 않고, 나이, 학력 제한도 허무는 것이다. 교수도 65세 정년을 허무는 것이다. 현장종사자가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야 배운 것을 바로 공연현장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연출이나 극작 지망인 경우, 지금처럼 대학에서 자기(학생)들끼리만 작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연출전공생이 아이디어만 좋으면 국립극단에서 곧바로 기성배우들과 직접 공연을 시도해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처럼, 외국연출가를 불러 국립극단에서 공연만 달랑하고 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시즌교수’로 임명해 작업도 하고 교육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들을 연극원의 강의로 연결할 수 있고, 그들의 교육 자료를 연출지망생에게 참고자료와 실습이 가능하도록 연결시키는 시스템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사회가 ‘대졸(大卒)’을 너무 희망해, 19세짜리들이 대학에 진학해서 별로 배운 것도 없이, 군졸(軍卒)까지 마치고 30세가 다 된 늘그막에 공연현장으로 기어 나온다. 외국의 경우는 25세에도 유수한 국공립극단의 예술감독이 되기도 한다는 데 우리는 그저 ‘졸업장’ 따기에만 바쁘다.
그리고 커다란 문제는 대학이 수입을 늘리려 ‘대학원’에 진학시켜 ‘논문’만 쓰게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학의 연극논문은 대부분이 현장사람들에게는 ‘쓰레기’로 취급되기 일쑤다.
나이, 학력 제한 없이 ‘완전개방대학’의 성격을 유지해 재능만 뛰어나면 바로 ‘국립극단’무대에 서고, 연출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65세 정년을 해체해 능력이 좋은 연극인은 외국의 예술아카데미처럼 80세에 가까운 사람들이 오랜 예술적 (또는 교육적) 경험을 살려 가르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국립극단(현장)에 발도 대보지 못한 사람들이 ‘논문’하나로 예술대학 교수를 하니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다.
여기서 탈피하지 못하면 영원히 외국연출가를 불러와 ‘사대주의’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오래 전에 기성연출가들을 위한 ‘해외연수’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연출가를 해외로 이민 보내는 프로그램이 되고 만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통합된 국립극단에서 강의를 하거나 작업을 하면서, 또 일정한 보수를 받아가며, 많은 인재들이 뒤섞여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자리를 만드는 게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으면 좌파의 ‘할애비’가 집권을 해도 사대주의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벗어나도 ‘저질공연’이라는 핀잔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우리의 ‘인사시스템’의 문제점
김미도교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윤철 예술감독의 폭넓은 식견과 안목은 우리 국립극단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극단들의 운영체계와 제작방식을 잘 연구하여 우리 국립극단의 위상을 격상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다.”
일단 자기의 분노표출을 위해 김감독을 ‘높이’ 추겨 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립극단은 예술감독에 의한 ‘프로듀서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독특한 구조다. 외국처럼 예술감독이 예술적인 책임을 지는 체제가 아니다. (막말로) 예술감독은 ‘객석점유률’만 높이면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체제다. 그래서 외국의 국립극단체제를 모델로 삼을 곳도 없고 삼을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우리 국립극단은 ‘후진국형’이다. 왜? 한국은 연극의 인재풀이 허약해서 그렇다. 그리고 이건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해 연극이 발전을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립극단의 위상을 격상시키려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청와대가 나서지 않으면 획기적인 변혁은 불가능하다.
우선 ‘인사시스템’부터 달라져야 하는데, 이는 김윤철감독의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거기다 김윤철감독은 (손진책감독이 해놓은 1년, 또 구자흥감독이 해놓은 1년) 제하고, 실질적으로 현재의 통합된 국립극단을 운영한 것은 고작 1년 남짓이다.
김미도교수의 글에서도 이 사실을 명확히 주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시비를 걸고 보겠다는 심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옛 장충동 국립극단시절의 일이다, 당시 정상철단장이 대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단원들이 대만국립극장과의 상호교류를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만을 다녀온 정단장이 단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대만은 이미 3년 후까지 공연계획이 다 짜있어서, 교류는 그 이후에나 가능해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정말 놀랐다. (프랑스나 영국도 아니고) 같은 동양권인 대만이 3년이라는 장기계획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하고 있다니… 고작 1년 계획밖에 갖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보다 못할 게 없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우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겨우 1년 계획이 고작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문체부(정부)의 인사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정부가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의 교체를 (고작) 1~ 2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단행한다. 그러니 정권의 풍향에 휘달릴 뿐 아니라, 극단 자체가 ‘장기계획’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손진책, 김윤철 예술감독들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물러날 경우에는 모든 ‘플랜’이 완전한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일본의 ‘신(新)국립극단’만 해도, 교체 1년 전에 후임을 임명해 1년 동안 두 사람의 감독이 함께 근무토록 해 극단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대부분의 극단이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아스테지 한국본부 (아동청소년협회)가 ‘연속성’을 이유로 이사장 선거를 임기만료 1년 전에 시행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우리도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이런 시스템이라도 채택하지 않는 한, 국립극단의 발전을 위한 ‘연속성’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게 불가능하다면, 한국국립극단은 (3년을 주기로) ‘정치적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 국립극단의 비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김미도교수 같은 사람이 나서서 정치의 ‘진영논리’로 감독교체기의 국립극단을 한번 뒤흔들면, 또 좌파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면 별다른 대책이 없이 그냥 무너져야 하는 게 국립극단이다.
거기다 실제로 공무원들은 청와대 권력에 취약해서, 지금의 인사시스템으로는 비극적 운명을 막아낼 길이 없다.
현재 평론가들이 국립극단의 외국인 초빙연출가의 작업이 신통치 못하다고 질책 하지만, 이것도 1년의 ‘단기플랜’밖에 가질 수 없는 국립극단으로서는 좋은 연출가를 초청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왜? 외국의 연출가들은 장기계획에 의해서 자신들의 예약된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국립극단은 (타 극장처럼) 이미 완성된 해외공연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공연을 위해 연출가가 장기간 연습을 위해 체류해야 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장기계획이 없으니 더욱 섭외가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좋은 연출가를 섭외하는 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국제적 네트워크가 있는 김윤철감독이어서 가능한 게 현실이다.
(우리의 경우) 김윤철감독이 지난해에 올 한해 계획을 미리 짜놓았다 해도 이는 후임자가 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짜놓은 모든 계획을 다 ‘백지화’해도 누구도 말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파 예술감독이 ‘지금 여기 한국’을 실현한다고 세월호, 위안부 스토리로 모든 레퍼토리를 바꾸어도 이에 대해 시비를 걸 사람이 없는 게 정치권에 예속된 국립극단의 현실이다.
그런 처지니, 당연히 임기가 다 된 예술감독은 장기계획을 갖고 움직이는 외국인들과 1년 이후의 작업에는 일체의 계약과 교류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해외와의 교류마저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게 경제대국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니 국립극단은 이런 무(無)연속성의 ‘악순환’에서 항상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국공립극장은 대통령을 위시한 지자체장의 정치적 이념과 색깔에 따라, 수시로 ‘계획과 색깔’을 바꾸어 카멜레온처럼 운영하는 ‘문화후진국’ 형태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고작 1년 계획으로 연명하는 게 우리 국립극단의 처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국립극단의 ‘평가시스템’을 개선하라!
국립극단의 ‘평가시스템’을 새롭게 개선 정착시켜야 한다. 그 핵심 골격은 다음과 같다.
1. 어떻게 예술감독을 평가해 선정할 것인가?
2. 어떻게 예술감독의 운영을 제대로 평가할 것인가?
지금 국립극단의 최대의 당면과제는 새로운 ‘평가시스템’의 정착이다. 지금처럼 예술감독의 선정도 청와대와 문체부가 밀실에서 ‘뚝딱’ 해치워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지금처럼 정치적 ‘바람’을 막아낼 도리가 없고, 연극계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막기도 벅차다.
운영평가도 그렇다. 사실 김윤철감독만 해도 ‘유진룡 전(前) 장관’에 의해서 선임된 예술감독이다. 그런데도 그는 제대로 된 평가절차도 없이 정치적 바람에 휩쓸려 그냥 물러나야 할 판이다. 지난번 손진책감독도 박근형의 ‘개구리’ 한방으로 자리가 날아가 버렸다.
차라리 이런 식이라면 아예 ‘연속성’을 포기하고 문체부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정치적 색깔에 따라 ‘단임제’로 하겠다고 천명하는 게 옳다고 여겨진다.
또 이런 식의 불명예 퇴진이 계속된다면 누가 예술감독이 되려고 나서겠는가? ‘욕하면서 배운다’고 이런 식으로 예술가에 대한 인권침해가 매번 자행된다면 차라리 ‘히딩크’처럼 외국인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우선 예술가에 대한 예우가 아닐 것이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너무 손쉽게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게 개선되지 않는다면 국립극단은 앞으로 ‘장기계획’을 포기하고 청와대만 바라보며 예술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요즘 국민들이 개헌을 요구하고 있으나, 당선이 예상되는 대선후보는 당연히 이를 반대하게 마련이다. 왜? 자신의 임기가 3년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제도개선을 시행하려면, 새로운 예술감독을 임명한 후에는 불가능하다. 본인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해서 변화를 싫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 최적기다. 요즘처럼 정치적인 요동으로 새로운 감독의 임명이 지체되고 있을 때 새로운 개선과 변화를 시도하는 게 옳다.
전폭적인 개혁이 불가능하다면, 일단 현 단장의 임기를 연장한 다음에, 차기 감독을 동시에 임명해 (일본 신(新)국립극장처럼) 1년 정도를 두 사람이 같이 예술감독의 임무를 수행토록 한 후에, 신임감독에게 임무를 넘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립극단도 이제는 ‘연속성’이 정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다.
그리고 이런 제도가 정착하려면 당연히 기존 예술감독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 김미도교수가 외친다고, 또 협회가 상소문(?)을 올렸다고, 문체부가 여론에 밀려 그냥 포기를 해서는 안 된다. 왜? 여론이 전문성을 갖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선정위원회’와 ‘평가위원회’를 제도화시켜야 한다. 이제는 ‘청와대 마음대로’가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은 ‘정치의 개입’을 유도하고, 국립극단의 발전을 위해서도, 한국연극의 장래를 위해서도 거부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지금의 ‘국립극단이사회’를 강화하고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 전문가로 ‘이사회’를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매번 실질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평가위원들을 선정해 심도 있는 토론과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제발 ‘정치바람’에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게 확립되어야 국립극단의 비극적 운명이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래야 국립극단의 ‘장기계획’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고, 외국의 유능한 연출가의 섭외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제는 임기만료 1~ 2개월 전에 후임자를 선정하는 후진성에서 빨리 탈피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국립극단의 합리적인 운영이 가능하겠는가?
한겨레신문의 ‘지금 여기 한국’이란?
박원순 서울시장이 등극하자 박인배 세종문화회관사장이 “서울시극단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투쟁기를 극화하시오!”해서 논란이 일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솔직히 좌파의 사고는 그게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한겨레신문은 ‘지금 여기 한국’을 내세우며, ‘한국의 국립극단이 어느 나라 국립극단인가’ 이렇게 질타하면서, 왜 모든 국민의 관심거리인 ‘세월호와 위안부’ 이야기가 국립극단의 공연에 없는가를 따지고 있다.
물론 ‘블랙리스트’ 때문에도 공연이 불가한 게 사실이지만, 요사이 발생한 한국의 시국사건들은 일단 정치가 ‘안정된’ 이후에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 극화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좌파들은 ‘분노의 표출’을 위해 한시가 새로울 것이지만, ‘세월호’만 해도 ‘무엇’이 문제인가보다 ‘누가’ 저지른 사건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첨예한 좌우대립으로 갈려져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런 소재로 국립극단이 공연을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들의 의사에 반하면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덤비는 나라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국립극단이 국민의 ‘갈등을 유발할‘ 소재를 다루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사건을 다루려면 더 많은 시간과 세월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지금 우리는 ‘촛불시위’가 ‘태극기시위’를 불러와 갈등과 분열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는 걸 목격하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이런 나라에서 첨예하게 갈등을 유발할 소재로 국립극단이 공연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당연히 ‘자기검열’을 시도할 게 뻔해, 예술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쓰는 이런 글도 ‘토씨’ 하나에도 신경 쓰느라 머리가 빠질 지경인 게 현실이다)
서울남산센터에서 공연된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공연 ‘푸르른 날에’도 말이 많았지만, 결국 연출가인 고선웅의 손을 거치면서 그나마 명성을 얻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좋은 희곡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구리’때보다 더 큰 소란에 휩쓸리게 될 건 자명한 일이다. 왜? ‘태극기’를 들고 한번 ‘시위하는 맛’을 안 노인네들이 이제는 수시로 태극기를 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시위의 맛’을 알면 이를 즐긴다는 게 옛날 국립극장 노조를 하면서 깊이 느낀 일이다.
그리고 이런 ‘주문생산’은 옛 국립극단에서도 좋은 창작극의 발굴을 위해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를 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한국처럼 ‘신작창작극’의 작가들이 활성화되지 못한 나라에서, 그것도 대극장공연에서 성과를 기대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 모두가 긍정할만한 좋은 작품을 쓸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박인배사장의 ‘소란’을 다시금 반복할 공산도 없지 않다.
저는 SNS를 하지 않습니다. 나의 연극계 불만이 참지 못해 폭발하면 혹여 연극을 사랑하는 애관람자들까지 우리의 치부를 알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꾹 참고 ttis의 내부망에만 글을 써왔던 게 사실입니다. 우리 연극계의 대외적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내가 쓴 글인데도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5년이 저물어가는 이때, 우리 국립극단은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답답한 심정입니다. 이게 우리 국립과 대학로의 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장충동국립극단을 서계동으로 내려오게 오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입니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기존 단원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요. 더구나 유인촌장관이 대학동문이어서 더욱 그랬죠. 장충동시절 그렇게 불만이 많아 그쪽을 향해 욕을 해대던 대학로 연극인들이 이제는 만족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솔직히, 오로지 불만이라면 자신이 정규단원이 되어 국립에서 월급을 못받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들리는 소문이 그게 전부이니 말입니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우리의 현실아닌가요?
서계동 국립극단이 어느덧 10여년이 다 되어갑니다. 여기서 내가 느끼는 것은 우리 연극계에 연출가는 많아도 예술경영자는 없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국립극단도 예술경영자를 모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나는 김미도선생이 5년동안에 좌파이념의 경영체제라도 개척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민족주의와 국립극단’을 여성평론가들을 앞세워 외치시더군요. 실망했습니다. 문재인 시대를 마감하면서 이제 연극을 발전시키는 건 정치이념, 진영논리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증명한 게 전부 아닐까요? 하긴 이것만으로도 한시대를 마치면서 다행이라 여기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