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의 실체는?
권병길
양심이 허락하는 대로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은 인간만의 존엄함이다. 그 기초하에 만들어진 것이 헌법의 정신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법 정신을 위배하고 창작 행위를 제약한다는 작금의 논란은 본질적 싸움을 태동케 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어쩌면 당연함이고 표현의 장기로 살아가는 예술행위를 무력 시키고 생명을 끊는 행위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 정신을 무시한 반 인권적 행위가 다반사로 이어지고 있다면 예술인들은 한낱 권력의 도구로 전락, 창작행위의 당위가 없으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근간은 다양한 삶을 정제하고 융합게 하여 품격 있는 삶과 질서를 유지하여 자율적 실천의지를 갖게 한다는 것은 아주 중하다. 사회안의 문화는 보이는 유형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 정서적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요 한가를 행정의 자리에 있는 문화 행정가나 그러한 가치를 중히 여기는 예술인들은 알아야 한다. 만일 진의를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 호도하는 것은 정신의 퇴행이요 비문화적인 것이다. 오늘날 언론의 왜곡과, 보여지는 영상의 세계 등이 이익을 추구하는 관점 아래 놓이게 되면 이는 허구의 세계를 전염병처럼 실어 날러 혼미한 정신을 전달케 될 것이다. 권력은 모든 것을 사유화하고, 그에 걸맞게, 사람도 제도도 길들여지고, 그에 조금이라고 도전의지를 보이는 사람들은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어 양심을 버리고 살도록 강요 하는 현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범죄 행위이다.
인생의 삶을 담아야 하는 내용은 희곡과 시나리오 대본을 바탕으로 연극 혹 영화 드라마가 오늘날 삶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어쩌면 어둡고 소외된 아픔의 얘기는 여기서 가장 화두가 될 법한데 그러한 의식을 가진 자들을 검은 눈으로 보고 리스트를 올려 자신들의 안위 유지를 위해 권력 내에 가두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불행이다.
연극 영화를 좌파 예술로 어느 날부터 구분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좌파가 아니라 사회 고발 내용을 담은 예술가들을 말한다. 그들은 소신대로 사회성 있는 작품을 만들고 오늘날 에만 있어온 것이 아니고 이미 연극과 영화는 다른 장르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고, 일찍이 할리우드에서 1950년대 동서 냉전시대, 공산주의자들이 영화에 종사한다 해서 블랙리스트를 적용, 활동을 금지시키고 추방하는 매카시 선풍이 불어왔던 시대를 우리는 알고 있다. 희곡작가 브레이트는 사회주의자로 매도했고,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세기의 천재 ‘챨리 차프린‘이 정보당국에 공산주의자로 찍혀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트롬보‘라는 작가는 ‘로마의 휴일‘을 써서 영화화된 유명한 작가인데 로마의 휴일이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블랙리스트의 낙인으로 작가의 이름을 숨겨야 했던 역사가 1950년대 얘기들인데 2017년에 우리 앞에 대비케 한다는 것은 우리의 퇴행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짐작게 하는 것이다.
예술은 무엇에 의해 제약당하고 창작의 자유를 침범 당할 수 없다.
화려하고 번들번들한 것과 허위 내용을 담은 비 사실이 마치 우리들의 모든 것인 양 일상으로 왜곡되는 표현이 만연한 오늘 날에는 거짓과 위선의 씨가 되고 있다.
사회고발 영화 한편을 소개하겠다.
이태리의 영화 중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란 영화는 어둡고 가난을 배경으로 한 흑백 영화이다, 1949년도 전후 파시스트가 끝나고 희망 잃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찿기 위해 로마 시내를 몰려다니는 상황을 카메라는 사실적으로 쫓아가 거리와 인물들을 가감 없이 가식 없이 담아가는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영화였다. 주인공 리치는 전당포에 침대보를 맡기고 겨우 자전거 한 대를 빌려, 생계를 위해 포스터를 부치는 일을 어렵사리 맡아 시작한다. 그는 의욕적으로 작업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 누가 생명줄 같은 자전거를 훔쳐 달아난다. 그러자 주인공 리치는 눈이 뒤집히듯 로마 시내를 미친 듯이 누비며 찾아 나섰으나 허탕이었다. 실망한 그는 희망을 상실했다. 그때 어느 곳을 지나다 주인이 없어 보이는 어떤 자전거를 보자 거꾸로 자신도 절박한 유혹에 끌려, 똑같이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다 이내 발견되어 사람들에 몰려 두들겨 맞고 붙잡힌다. 당시 영화 “자전거 도둑“은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명예의 상을 받았고, 소시알 영화의 대표작으로 영화사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1960년 반공법에 걸려 상영이 한때 중단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이란 영화가 있는데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금도 우리 영화계의 첫째 둘째의 명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지금부터 55년 전 영화들이 불멸의 영화로 한국 영화의 대표 남아 있다니? 물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영화의 양심은 위 작품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1966년 작 이만희 감독의 흑백 영화 “만추“는 그 흔한 남녀 사랑 얘기인데 어떤 모습의 사랑이었기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영화 중 최고로 꼽히는지? 그러나 필름은 사라졌다. 누군가가 평양의 필름보관소에서 보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제발 그러기를 바란다. 필자는 젊은 시절 네 번에 걸쳐 이만희 감독의 만추라는 작품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 영화는 신분이 죄수인 남녀가 우연히 이틀간의 법정휴가를 받아 완행열차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깊은 고독의 남녀였다. 그리고 누구든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눈빛이었고, 신분, 재산, 학벌 등 세상이 조건으로 내세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갈구하고 있었다, 감독은 깊은 가을의 색체 속에 나목과 흩어지는 낙엽과 주인공의 꽃무늬 마후라와 낡은 바바리코트와 그리고 기다림의 마음을 필름에 담아냈다.
이 영화는 사랑이란? 하는 남심을 흔들어 놓은 영화이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배우들의 욕망이다. 그것은 제도권 안에 실기와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수한 집단의 무보수로 바닥 생활과 공기만 먹고 사는 맑은 영혼들에게 블랙리스트란 어떻게 다가 왔는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여러 가지의 각도로 우리에게 왔다. 우리 처지의 블랙리스트는 분단 시대의 이념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블랙리스트란?
블랙리스트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상하게 붙이는 말인듯한데 실은 여기에 종북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웅변 하는 종북프레임은 작금에 촛불정국 반대편에서 블랙리스트로 시끄럽게 만든 당국을 감싸고 거칠게 종북 세력을 규탄한다는 구호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예술계가 아니라 해도 연좌제니 보안법을 위반할 근사치에 간다든가 정권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들은 마찬가지 일 수 있다.
우리처럼 예술계에 만 여명에게 블랙리스트란 딱지가 붙어있는 나라는 없겠지만, 정권의 수장을 반대하면 블랙리스트란 말이 성립된다 하니 이 얼마나 우습고 황당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가?
블랙리스트는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인간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속에 악의 화신은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인간은 왜 사느냐? 예술은 왜 하느냐? 하는 물음에 놓이게 된다. 이 사회는 계속 인간을 인간의 품격 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공동체를 꿈꾸고 삶을 품위 있게 하고자 하는 진실의 표현은 불필한 부당한 찌꺼기를 걸러내 알량한 알맹이만 남아 서로 소통하고 화답하고 하는 모든 행위를 블랙리스트들이라고 한다면 다시 역으로 말하면, 소통을 방해하고 화합을 이유를 달아 방해하고 사람과 사람 계층과 계층을 단절시키고 끼리끼리 놀아 사는 자들이 되돌아보면 블랙리스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형님같이 글을 써도 이런 대접을 받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매날 지나간 과거만 들추지 마시고요. 솔직히 정말 한국이 표현의 자유도 없고, 예술에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속박은 지금 한국이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갈등이 심해서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꼴입니다. 따라서 이런 불안은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면 계속이어질 것입니다. 하긴 모두가 진영논리로 싸우니 이런 말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형님 문재인후보가 다음에 대통령이 된다고 합니다. 제발 형님들이 나서서 연극계의 가난 좀 해결해 주십시요. 그때는 그분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침묵으로 일관하지 마시고요. 이제는 나이도 70인데 후배들을 위해 책임도 통감하셔야 합니다.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