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채승훈 (연출가)
근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의 명령에 따라 예술위는 지원심사에서 특정예술인들을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예술위는 예술인들의 창작과 권익을 위해 봉사하여야한다는 것이 그 존재의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위는 도리어 정권의 편에 서서 예술인들을 억압하여 예술위의 근본정신을 훼손시켰다. 악역으로 전락한 예술위의 현재 위상에 대해 과거 설립운동을 했던 한사람으로서 심한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관주도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하 ‘진흥원’)을 민간자율주도인 예술위로 전환시키고자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예술계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다. 당시 운동을 반대하였던 측이 내세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예술위로 전환시키면 지원행정이 중구난방이 된다, 느리게 된다,’ 등이었다. 즉 진흥원과 같은 정부주도의 행정구조일 때 일사불란한 행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예술위는 위원들의 협의체이다보니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예술위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의사결정이 오래 걸리고 힘들어도 그것이 바로 예술정신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결정된 의견이야말로 예술인들의 보편적인 공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그리고 초기에 잘 정착하면 의견 조율도 점차 익숙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우여곡절을 통해서 결국 예술위는 설립되었다. 사실 당시에도 민간자율정신이 예술위에 완전히 정착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민간자율이라는 것은 위원들과 위원장이 완전히 민간, 예술인들에 의해 임명된다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렇게까지 되지는 못하였다. 공모제였지만 위원에 대한 최종 임명은 문화부장관이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반의 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예술위는 그러므로 설립 이후에 더욱 민간위주의 예술위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예술계와 민간의 추천을 받은 위원들이 그러한 정권의 부당한 간섭을 일사불란하게 용인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위는 그 후로 도리어 더욱 후퇴하여 진흥원과 다를 게 없어졌다. 예술위 관련법이 2011년에 많이 고쳐졌다. 대부분 인사권에 대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제1항에 따라 위원을 위촉할 때에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위촉하는 자로 구성하는 위원추천위원회가 복수로 추천하는 자 중에서 위촉하여야 한다. 이 경우 위원추천위원회에는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전통예술 등 문화예술 각 분야 및 지역 인사가 고루 포함되어야 한다.” (문예진흥법 23조)
“위원장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29조제1항에 따른 임원추천위원회(이하 “임원추천위원회”라 한다)가 복수로 추천한 사람 중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위촉한다.” (문예진흥법 24조)
두 번째 항목의 임원추천위원회라 함은 예술위의 경우에 위원들이 그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국 예술위의 위원들이나 위원장 모두 문화부장관이 임명하는 구조이다. 초기의 위원들이나 위원장이 공모나 상호호선에 의해 선출되던 방식에서 더 후퇴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했는데 도리어 뒤로 후퇴했다. 이런 구조는 과거의 독임제 방식의 문예진흥원과 다를 게 전혀 없는 관료체제이다. 민간자율이라는 예술위를 왜 만들었는지 이해가 전혀 안 되는 황당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폐쇄적인 인사구조 속에서 정권의 임명을 받는 위원장이나 위원은 이번처럼 블랙리스트 탄압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 정권이나 정부는 예술위를 그들의 통제아래 두고자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그 답은 하나이다. 바로 이번 블랙리스트와 같은 행위를 하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술위가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애초의 설립 취지를 살려야 한다. 핵심은 위원들, 위원장의 인사권을 민간 예술인들에게 부여해야한다. 방법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차기 정권에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유명무실해진 분야별 소위원회를 다시금 활성화시켜야한다. 그리고 되도록 빠른 기일 내에 각 분야별 위원회가 설립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분야별 위원회라 함은 연극, 무용, 음악, 문학, 미술 과 같은 기초예술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위원회로 분화 설립됨을 말한다.
과거 대학로포럼에서 예술위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궁극적으로 분야별위원회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러나 예술위로의 전환과정도 녹록치 않았기에 일단은 통합형 예술위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 통합형 예술위는 출범 때부터 약간의 문제점을 노정했다. 여러 예술 분야가 함께하다보니 정책, 지원예산배분 등의 의견조율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각 분야가 무척 개성이 다르다. 미술은 미술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그렇다. 게다가 한 분야 안에도 세부적으론 다 다르다. 미술은 서양화, 조각, 동양화 등으로, 연극은 배우, 연출, 극작 등으로 사실 입장이 다르며 다른 분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각각에 대한 지원정책은 무척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분야를 대표한다는 위원들도 사실 다양한 목소리나 요구사항을 대변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체육 분야의 예를 들어볼 수 있다. 체육은 전체 통합형의 대한체육회가 존재하고 각 종목별로 별도의 단위협회가 존재한다. 우리보다 좀 더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견에 반대가 있을 수 있다. 위원회가 많아지면 경제적인 부분에서 낭비적 요소가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운영을 위한 경상비나 상근직원들에 대한 신규임용 등에 대한 인건비 등등에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출혈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한 걸음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방식의 분야별위원회로 나누어진 지원체계는 언젠가는 새로운 문화계의 빅뱅을 일으킬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선 커다란 이익이다. 거기서 비롯되어지는 경제적인 가치도 대단할 것이라 본다.
우리는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해 사고를 바꾸어줄 필요가 있다. 예술은 눈앞에 보이는 실제적인 경제 가치는 그리 생산해 내지 못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예술은 무한대의 잠재적 경제성을 가지고 있다. 좀 더 자유롭고 효율적인 지원정책은 예술가들을 좀 더 나은 창조력으로 이끌게 되고 그것은 결국 새로운 예술콘텐츠를 만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경제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러한 원동력은 국민들을 더욱 신명나게 만들어 무한대의 에너지를 만들게 된다. 그것보다 더한 경제성이 어디 있을까한다.
그러므로 예술위와 같은 지원기구들은 궁극적으로 각 지자체별 작은 단위로 더욱 분화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시나 군, 구와 같은 작은 단위의 다양한 지원기구들이 곳곳에 생겨난다면 그것은 결국 국민들 아주 가까운 곳에 예술이 숨 쉬게끔 도와주게 된다. 자연스럽게 국민들은 경직성을 풀고 상호 소통의 장으로 한 걸음 더 나오게 될 것이다.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들은 사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만을 만드는데 공헌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계속 마음의 문을 닫고 어깨를 움츠린다. 국민들 손에 닿는 곳에 예술이 존재한다면 마치 경직된 기계에 기름을 칠한 것과 같은 효과가 그들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이럴 때 문화부와 같은 정부기관은 세분화되어 있는 지원단체들에게 되도록 많은 정책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이란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것이 예술의 특성이고 생명력이다. 경제나 과학 등의 다른 분야하고는 전혀 다르다. 순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건강한 예술적 착오의 영역을 수용하려면 거기에 맞는 정교하고도 순발력 있는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수직적이고 행정적인 구호나 일반화된 정책만으로는 절대 그러한 것들을 수용할 수 없다. 촘촘하게 설립된 다양한 지원단체들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착상과 감성을 즉시즉시 챙겨줄 수 있어 실효성 있는 예술지원정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전혀 예측치 못한 문화 동력이 생긴다.
이런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정부, 예술가, 향유자인 국민들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또한 국민과 예술인 가까이에 있는 단체들에게 블랙리스트와 같은 통제나 압박은 애초에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운은 사회를 경직에서 풀어주어 살맛나는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하는 관계를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