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론] 밑바닥에서, 미스터마우스/ 최승연

<<연극평론>> 2017 여름호 재수록

텍스트의 보편성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뮤지컬 <밑바닥에서>, <미스터 마우스>-

최승연(뮤지컬평론가)

<밑바닥에서>

원작: 막심 고리키

작: 왕용범

작곡/편곡: 박용전, 안희진

연출: 왕용범

단체: NCC(New Contents Company)

공연일시: 2017/03/09-05/21

공연장소: 학전블루

관극일시: 2017/05/03 8pm

<미스터 마우스>

원작: 대니얼 키스

작/가사: 천우연

작곡: 장소영

연출: 심설인

단체: 쇼노트·파파프로덕션

공연일시: 2017/03/09-05/14

공연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관극일시: 2017/04/22 3pm

2017년 봄, 한국 뮤지컬 시장의 화두 중 하나는 ‘보편성’인 듯하다. 10여 년 전에 초연된 이후 공연이 중단되었던 작품들이 동시대 무대에 부활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해보자. 뮤지컬 <밑바닥에서>와 <미스터 마우스>는 각각 2005년, 2007년에 소극장 뮤지컬로 초연되어 주목을 받았다가 2017년 봄에 모두 재연되었다. 외견상 초연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제작이 전문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밑바닥에서>는 2005년 당시 왕용범을 포함한 서울예대 동문들이 만든 극단 자세레퍼토리의 제작으로 초연되었으나, 2017년 버전은 인터파크의 NCC(New Contents Company) 제작으로 성사되었다(NCC는 <밑바닥에서>를 제작사의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 <미스터 마우스> 역시 초연 당시 대본과 가사를 맡은 이현규가 파파프로덕션의 대표로서 제작까지 책임졌던 상황에서 벗어나, 꾸준히 뮤지컬 콘텐츠를 개발해오고 있는 쇼노트의 제작으로 재연되었다.

‘무엇을 동시대 뮤지컬 시장의 콘텐츠로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특히, 오랫동안 묻혀 있던 과거의 작품을 동시대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여기에서 해당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두 작품이 전문 제작사의 선택을 통해 부활했다는 사실은 일단 텍스트 자체의 유효성이 공적으로 인정됐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그 유효성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는 텍스트의 문학적 힘, 즉 드라마의 보편성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작사의 이러한 판단에는, 시대를 초월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다룬다는 ‘드라마의 추동력’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때의 보편성은 보다 넓고 큰 시장을 전략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선택되는 ‘보편주의’ 대신, 장소와 시대를 막론한 드라마의 원초적인 힘을 지향한다. 두 작품이 모두 문학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원작은 수많은 각색 버전을 낳은 ‘훌륭한 원천’이라는 점은 이를 더 강화시켰다. 두 작품의 ‘희망/절망’과 ‘행복’이라는 핵심어는 부활이 가능했던 근거였다.

드라마의 힘이라는 소통 포인트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두 작품의 핵심어는 어떤 보편적인 힘을 갖는가?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주지하다시피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1902)가 원작이며 <미스터 마우스>는 대니얼 키스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1959)을 각색한 작품이다. 뮤지컬이 원작으로부터 취한 드라마의 힘, 다시 말해 뮤지컬이 취한 문학적 보편성은 무엇인가?

<밑바닥에서>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사회적 위기가 극심했던 시절, 땅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러시아를 유랑하던 상황을 배경으로 둔 작품이다. 작품 속 빈민들이 거주하는 여인숙에는 각양각색의 밑바닥 계층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임박한 자물쇠공 부인 안나, 아픈 아내에게 무심한 남편 클레시, 이름을 잃은 알코올중독자 배우, 여인숙 주인 부부 코스틸료프와 바실리사, 이들과 치정관계로 얽힌 좀도둑 페펠과 바실리사의 동생 나타샤, 사랑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나스탸, 만두장수 크바시냐, 모자장수 부브노프, 60대의 순례자 루카 그리고 무직의 부랑자 사틴 등이 그들이다. 작품은 커다란 드라마의 흐름 없이 견고하게 절망적인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들의 절망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딱히 출구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 루카가 나타나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루카의 이야기들이 ‘거짓의 위로’였음에도 시체처럼 무감각했던 그들의 삶은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감각은 깨어나고 논쟁이 시작된다. 그 정점은 루카의 말에 희망을 품었던 알코올중독자 배우가 그것이 모두 거짓의 위로였음을 깨닫고 자살하는 장면이다. 작품은 바로 이 정점에서 끝나버린다. 이들의 밑바닥 삶은 그저 무력하게 남겨진 채.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막심 고리끼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삶의 무력감’을 초점화했다. 2005년 당시 연극을 하며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했던 30대 초반 왕용범의 자아가 반응했던 지점이다. 삶의 무력감은 굳이 청년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정신적 피로감이다. 뮤지컬이 원작에서 취한 드라마의 핵심이다.

<미스터 마우스> 역시 원작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가져왔다. 원작은 뉴욕 빈민가에 사는 32살의 빵가게 점원 찰리 고든의 삶을 다룬다.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갖고 놀림거리로 살아가던 찰리는 대학교수의 뇌외과 수술을 받고 천재가 된다. 앨저넌이라는 이름의 실험용 생쥐와 같은 신세가 된 찰리는 바라던 대로 ‘머리가 좋아졌지만’ 그 이후 급격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주변사람들과 멀어지고 성인으로서의 연애감정에 당황하고 오만해진 자신이 두려워진다. 그러나 안정적이지 않았던 실험의 희생양이었던 찰리는 결국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작품은 그렇게 끝난다. 뮤지컬이 취한 원작 소설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급격한 지능의 변화를 겪은 찰리가 어린아이의 지능을 갖고 살았던 과거에 비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 존엄성의 문제와 연관된 원작의 질문은 <미스터 마우스>의 드라마에 그대로 녹아 있다.

‘뮤지컬적’, ‘한국적’이라는 코드

두 작품이 찾은 위와 같은 소통의 포인트는 뮤지컬로 각색되며 공연에 필요한 코드와 겹쳐 있다. 주목할 것은 문학적 보편성이 소위 ‘공연화’가 가능하도록 각색된 지점들이다. 2017년의 <밑바닥에서>와 <미스터 마우스>는 초연 버전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되 그 위에 동시대 뮤지컬 시장과 소통할 수 있는 코드를 강화해 놓았다는 특징을 보인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첫째, 현재 뮤지컬 시장에서 흥행력이 있는 배우들이 두 작품에 참여해서 그들의 이슈 몰이를 통해 작품의 부활이 탄력을 받았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지점이다.

<밑바닥에서>는 소위 왕용범 사단이라고 할 만한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어 있다. 왕용범의 전작 <프랑켄슈타인> 재연 당시 앙리를 연기해 주목을 받았던 신예 최우혁 그리고 서지영, 안시하, 김대종, 조순창 등 오랫동안 왕용범과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의 연기 호흡은 함께 한 시간만큼 자연스러웠지만 주로 강렬한 드라마의 대극장 작품에서 맞춰왔던 호흡을 이어감으로써 소극장에 필요한 완급 조절에는 실패한 듯 보였다. 그 사이에서 초연 당시 배우를 연기했던 이승현이 또 다시 배우를 맡아 이름과 기억을 상실한, 완전히 무력한 삶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연기로 작품의 템포감이 조절되었다. <미스터 마우스> 역시 주인공 인후 역에 스타 홍광호와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신예인 김성철이 더블 캐스팅 되었다. 인후의 캐릭터 변화가 <미스터 마우스> 드라마의 핵심인 터라 흥행의 승부처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에 놓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홍광호와 김성철 캐스팅은 매우 적절했다. 특히 김성철은 인후의 변화 이전과 이후를 리얼하게 표현하되 여유를 잃지 않음으로써, 주인공의 연기력으로 작품을 이끌어야 하는 쉽지 않은 경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캐스팅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초연 당시 인후를 연기했던 서범석이 문종원과 함께 안타고니스트 강박사에 더블 캐스팅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홍광호 캐스팅과 더불어 마케팅의 주요 포인트로서, <미스터 마우스>가 티켓 오픈 초반에 시장 내 이슈를 효과적으로 선점할 수 있었던 이유로 작용했다.

둘째, 두 작품은 2017년 국내 시장에서 공연되기 위해 ‘뮤지컬적’, ‘한국적’이라는 대중적 요소를 더 확실히 밀고 나갔다. 사실 <밑바닥에서> 원작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 작품 전체를 포괄하는 드라마의 큰 흐름이 없다. 인물들이 밑바닥 인생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왕용범은 이러한 원작이 ‘뮤지컬’로 공연되기 위해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캐릭터 설정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극의 흐름과 갈등이 명확하게 인지되도록 만들었다. 가령, 이와 같은 식이다. 작품의 공간은 여인숙이 아니라 타냐가 운영하는 작은 술집이다. 타냐는 원작의 바실리사를 대신하는 인물이지만, 치정관계에 놓여 있던 바실리사와 달리 아들이 딸린 미혼모로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타냐의 술집에는 그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기꾼 싸친과 남작, 매춘부 나스쨔가 있다. 타냐는 병에 걸린 자신의 아들 막스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함께 살고 있으며, 타냐의 남동생 뻬뻬르는 술집에서 일하던 바실리사와 과거의 연인관계를 벗어나 술집에 새로 고용된 나타샤와 연인관계를 형성한다. 바실리사는 뻬빼르를 버리고 남작과 결혼함으로써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려 했으나, 결혼 후 남작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뻬뻬르에게 다시 집착한다. 또한 원작의 루카는 삭제되고 그 역할이 모두 나타샤에게 맡겨졌으며, 이에 따라 나타샤는 언니에게 학대당하던 인물에서 성실하고 순진한 아가씨로 변해 처음부터 끝까지 남는다.

이렇게 원작의 흔적을 간간히 찾을 있을 정도로 변형된 설정 속에서, 드라마는 타냐와 막스의 관계가 막스의 죽음으로 결국 밝혀지는 이야기와 뻬빼르, 나타샤, 바실리사, 남작 사이의 치정관계를 엮어 놓음으로써 묻혀 있던 과거사가 드러나고 결국 비극으로 종결되는 강렬한 흐름을 형성한다. 물론 원작의 휴머니즘적 관점을 읽을 수 있는 싸친의 ‘인간론’, 배우가 나타샤의 위로로 희망을 품다가 결국 자살한다는 설정이 뮤지컬에서도 유지되고 있지만 드라마의 방점은 네 사람의 치정극과 타냐의 개인사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작품은 원작처럼 배우의 자살로 끝나지만, 더 이상 인물들의 밑바닥 인생을 명확하게 표현할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종결되는 인상이 강하다. 앞에서 언급했던 배우들의 연기가 ‘강렬함’이라는 하나의 톤으로 유지되는 것도 이러한 극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사실상 대중들이 쉽게 인지하고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된 것으로서, 이후 왕용범의 재창작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각색 문법의 원형처럼 읽힌다. 이에 더하여 인물들의 대사와 템포감이 코믹한 상황을 여러 번 만드는 것 역시 한국 소극장 뮤지컬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대중적 소통의 포인트로 감지된다.

<밑바닥에서>가 대중과 좀 더 쉽고 강렬한 소통을 목표했다면, <미스터 마우스>는 원작에서 한국적 변용 포인트를 찾아 뮤지컬로 각색되었다. 원작 소설과 뮤지컬의 내러티브는 주인공 인후의 변화를 중심으로 과학의 만능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관념을 질문한다. 큰 틀에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각색 과정에서 인후의 변화 이전과 이후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과 인후 자신의 반응을 조금씩 변형시킴으로써 뮤지컬이 원작과 전혀 다른 정서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미스터 마우스>의 정서적 특징은 한 마디로 ‘따뜻함’이다. 그리고 그 따뜻함의 정서는 가족애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인후가 어쨌거나 ‘자의로’ 수술을 받는 이유는 “밥 잘 먹고 똑똑해지면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는 끝없는 믿음 때문이며, 이런 인후를 돌보던 짜짜루 주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수술을 허락한다. 또한 인후가 변화한 후에도 주인을 포함한 짜짜루 식구들은 모두 인후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 인후를 적대시했던 짜짜루 주인의 아들 태호마저 인후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장면은 유사가족으로 묶인 이들의 깊은 정을 특히 강조한다. 이로써 인후는 자신을 실험용 발명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강박사에게 받았던 상처를 이들로부터 치유 받는다.

인후가 실험용 쥐 이누의 퇴행상태를 파악하고 곧 찾아올 자신의 퇴행 역시 감지한 이후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정서적 소통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원형적인 지점이다. 인후는 사실 그동안 과거 정신박약의 상태에서 불을 질러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후의 부모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후를 짜짜루 반점에 보냈지만 그를 매우 그리워했다. 천재가 된 인후가 드디어 방문하게 된 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인후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는 인후를 결국 ‘알아보지만’ 미안한 마음에 아는 체를 하지 못하고 둘은 조용히 이별한다. 슬픔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인후의 염원도 인후의 비극도 모두 가족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촉발된 것이며, 인후의 상처는 유사가족이 치유한다는 구조. 채연과 강박사 캐릭터의 애매함 역시 유사가족의 프레임에서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을 정도다.

‘가족애’에 기반을 둔 따뜻한 정서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사실상 매우 익숙한 코드다. 특히 <미스터 마우스>처럼 여기에 ‘슬픔’과 ‘애환’의 정서가 더해지면 소극장 뮤지컬 무대에 익숙한 코드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원작은 이러한 코드와 거리가 있다. 원작의 정서는 ‘차갑고 냉정’한데, 특히 찰리의 변화 이후 그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뮤지컬과 매우 다르다. 천재가 된 찰리가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객으로만 대하며, 찰리 여동생 노마를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는 찰리를 실상 과거에 ‘버린 것’이며, 찰리가 천재가 되어 나타나자 노마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찰리에게 맡기려 한다. 또한 짜짜루 주인의 모델인 빵집 주인 아서 도너는 천재 찰리가 보이지 않는 빵집의 위계질서를 바꿀까 두려워 찰리를 빵집에서 내쫓아버린다. 이러한 원작의 냉정한 리얼리즘이 한국 시장에서 편하고 익숙하게 수용될 수 있도록 정서적으로 변이된 것이다.

스테디 셀러로 자리 잡으려면

그런데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있다. 2017년 재연에서 일종의 불균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밑바닥에서>를 관통하는 과잉된 연기 톤과 더불어 특히 <미스터 마우스>에서 두드러졌다. 가령, 초연 당시 강박사는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과학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던 주요 안타고니스트였다. 작품은 명예욕에 사로잡힌 부정적인 과학자들을 싸잡아 인후와 대척적인 관계에 놓음으로써 ‘과학의 윤리’를 제기하는 텍스트이기도 했다. 인후를 그저 욕망실현의 도구로 대하는 과학자 집단은 윤리의식이 완전히 거세된 지극히 풍자적인 인물들로만 묘사되었다. 이는 황우석 사태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의 정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2017년 <미스터 마우스>는 강박사에게 개인사를 부여함으로써 비정상적이고 기계적으로만 묘사되던 과학자 집단에서 그를 분리시켜 놓았다. 강박사를 개별적인 인물로 확대시킴으로서 인후와의 갈등을 제대로 부각시키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따라서 강박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은 ‘무능한 의사들 때문에 죽은 어머니’라는 과거의 한에 연원을 둔 것으로 ‘설명’되고 그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는 이렇게 내장된 한을 동력삼아 인후를 통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수정된 캐릭터의 맥락을 따라 작품 후반부에는 인후와 크게 대립하는 장면 역시 첨가되었는데, 이를 통해 실험의 성공이 ‘두려운 싸움’의 온당한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강박사의 주장이 부각되었다. 이렇게 첨가된 강박사의 드라마는 <미스터 마우스>가 붙잡고 있는 가족애의 프레임 안에서 반복된 것인데 안타고니스트라는 인물의 기능에 적합하도록 왜곡되어 있다. 이로써 초연부터 유지되던 신파적 감성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사실 이러한 수정의 방향성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강박사의 인물형 강화를 위해 새로 쓰인 음악이 기존 음악과 매우 다른 질감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자신의 한을 설명하는 아리아 ‘이제 내 눈 앞에’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에서 가창될 법한 드라마틱한 선율과 오케스트레이션이 사용됨으로써 <미스터 마우스> 음악의 전반적인 특징인 소박하고 심플한 질감과 동떨어져 있었다. 강박사가 집요하게 이어오고 있는 연구의 이면을 설명하는 ‘미래연구소’라는 넘버 역시 추가된 것인데, 노래 중간에 나오는 강박사의 대사가 전부 노래로 처리된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기존 넘버가 전부 살아있는 상태에서 새로 추가된 넘버들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이유였다.

또한 초연 당시 소극장에서 시작되었던 작품이 대극장 규모의 동숭홀로 옮겨졌지만 안무와 연출의 기본 스타일이 거의 유지되었다는 점, 강박사를 제외한 나머지 과학자 집단의 기계적인 희화화 방식은 인물과 음악의 수정 작업에 비해 상상력의 빈곤을 매우 드러내고 있다는 점(왜 부끄러움은 관객의 몫인가!) 등은 작품의 불균형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홍광호와 김성철 두 주연배우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덧붙인 흔적까지 극복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 보자. 두 작품이 스테디 셀러가 될 수 있을까?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한국 창작뮤지컬의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고전의 현대화, 고전의 재해석 작업이 꾸준히 지속되듯, 두 작품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소환될 수 있을까? 두 작품의 부활이 드라마의 보편성에 기댄 바가 크다면, 공연의 성과는 2017년 버전의 동시대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다. 스타 캐스팅으로 절반이 성공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재해석’ 작업이 유의미질 수 있는 방안이 더 적극적으로 모색될 때 성공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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