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련사>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즐기면 된다.
그림처럼…충분히 아름답다.
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
작/연출: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단체: SPAF 공동제작
공연일시: 2017/09/28-09/30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2017/09/28
무대 가득 커다란 경사무대가 보인다. 마치 흐르는 파도의 능선처럼 부드럽고 언뜻 보면 너와집 지붕처럼 얼기설기 나무판들이 엮여 있다. 아니 덮여 있다. 흰색에서 짙은 회색까지 그 색의 농도를 부드럽게 변화시키며. 공연 시작 전이라서 객석은 소란스럽다. 관객입장을 돕는 그러니까 관객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따위의 음악은 없다. 객석은 소란스럽고 무대는 고요하다. 이 기묘한 대조를 드러내는 것은 관객입장 전부터 경사무대에 홀로 길게 구워있는 한 인물 때문이다. 검정색 의상. 격식 있는 바지와 셔츠…하지만 편안해 보인다. 남자다. 그는 기분 좋은 늦은 오후에 넓은 지붕에 올라 노을로 물들어가는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듯, 아니 그저 따스한 햇볕을 늘어지게 고스란히 즐기려는 듯 그런 모양새로, 나른하게 그렇게 길게 누워있다. 객석 가까이 경사무대 아래에는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다. 그가 양말만 신은 채 있는 것 보면 그가 벗어 놓은 것인 모양이다. 위쪽 경사무대 한 켠에 등받이 없는 검정 철제 둥근 의자가 박혀있다. 공연시작 시간은 거의 다 되었는데도 객석은 여전히 관객입장으로 소란스럽다. 이러다 공연시작이 지연되나 생각이들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나 자켓을 입는다. 그리고 신발을 신는다. 재밌는 건 신발이 벗어진 그 모습 그대로 신발에 발을 맞춰 신는다는 것이다. 아…신발은 지붕에 박혀있다. 그는 그 신발의 모양새에 맞춰 발의 모양을, 다리의 모양을 고정시킨 자세로 상체만 자유롭게 움직인다. 신발 때문에 그의 다리가 고정되었다는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계속 연속적 진행과정 속에 놓여있는 착각이 든다. 흠…그러고 보니 공연시작은 그가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 객석조명은 여전히 환하고 소란스러웠으며 그는 더 멀리 바라보고 지켜보는 것처럼 관객의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그렇게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오랜 침묵. 관객의 소요가 사라진다.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남자와 관객은 정면으로 첫 대면을 한다. 아주 편안한 침묵 속에서. 본인에게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아주 세세히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무대에서 전해오는 치유(healing)의 느낌이다.
남자는 신발을 벗고 무대에 박혀있던 검정 의자로 가서 옷을 벗는다. 완전 나체가 된 그는 덮여있던 나무판 하나를 빼서 뒤집어 놓고 그 위에 눕는다. 회색의 나무판은 뒤집어 놓으니 하얀색이다. 그야말로 일광욕을 즐기는 모양새다. 다른 한 남자가 등장해 그 남자 위로 천을 덮어씌운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등장해 바닥에 놓인 또 하나의 다른 나무판을 들어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자 그 남자를 덮었던 천은 하릴없이 확 벗겨진다. 다시 전의 남자가 나타나 그를 천으로 다시 덮고 다시 또 그 다른 남자가 나타나 나무판으로 바람을 일으켜 그 천을 날려 버린다. 이 장면은 작품이 끝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치 음악의 주제 코드처럼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 장면까지는 스토리가 떠오르는 관습적인 관극을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바람을 일으키던 남자가 자신의 신발을 벗고 첫 등장한 남자의 벗어둔 신발을 대신 신고 바닥에 고정되어있던 신발을 뜯어 올려 물구나무를 선 채 무대를 걸어 나갈 때, 극의 모든 이미지의 차원이 전복된다. 그 신발의 바닥은 땅에 고정되어 심어있던 신발에서 자란 뿌리가 달려있다. 거꾸로 나가는 그의 모습은 상식적인 2차원, 3차원의 세계를 가상의 4차원, 5차원으로 공간인식의 관습을 깨던 현대미술의 그림을 떠 올리게 했으며 오히려 그 그림들의 움직이는 입체를 실제 구현하는 것이 이 극의 미학임을 드러낸다. 그 순간 무대인 듯 지붕인 듯 인식되던 경사무대는 대지 혹은 지구이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정한 캐릭터가 아닌 대지에 존재하며 사라졌던 모든 신화와 생명체 그리고 그 주인공인 인간들과 그 역사이다.
그리스 신화세계를 연상시키는 켄타우루스와 식물이 자라는 화분을 머리에 인 여인(본인에게는 대지의 여신 데미테르를 연상시켰다)이 등장하고, 우주인이 등장하여 바닥에서 인간을 발굴한다. 달리 그림처럼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기묘한 추상의 세계가 그려지는가 하면, 르네상스시절의 해부학 실습실을 그린 유명한 당시 그림이 재현되기도 한다.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과 해부학 실습이 인육을 먹는 몬도가네 식사로 변하고, 또 다른 남자가 첫 남자처럼 나체가 되어 누워 첫 장면을 다시 반복 재생한다. 이미지는 반복되지만 결코 처음과 완전이 똑 같지는 않다. 기계의 팔과 손을 지닌 남자. 거기에 매혹을 느껴 광폭해지는 다른 이들의 탐욕이 그려지고 나무판들로 벽을 세우다 무너진 그 자리에 온 몸에 석고로 단단한 기브스를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 석고를 떼어내자 그는 살과 뼈가 있는 인간이 되어 평범한 추리닝에 셔츠를 입고 흔히 둘러매는 학생가방을 매고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은 남자는 검은 봉지에 쓰레기를 치우듯 석고조각을 담는다. 고주파소리에 빛이 바뀌고 남자는 나무판을 드러내고 바닥에 난 이 구멍 저 구멍에서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캐내고 그들이 합쳐서 또 하나의 인간이 된다. 지구를 들어 올린 남자. 아틀라스를 연상시킨다. 추상적인 이미지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 빨라지며 대지 위에 존재했다 사라지는 인간 역사의 속도를 반영한 듯 여겨진다. 인간은 또 인간을 낳고 또 그 인간은 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그 위로 화살이 쏟아지는 전쟁과 무덤이 되고 그 무덤 위로 화살은 마치 무성히 자라난 풀숲이 되어 또 다른 인간들에게 수확되는 밀들처럼 뽑아 올려 져 화분에 심긴다. 남자와 여자가 엉켜 서로 굴러가고 이 모든 상황을 앉아 지켜보는 이가 인식된다. ‘신’인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이 극의 제목이 말하는 ‘위대한 조련사’는 ‘신’일까, ‘인간’일까? 생각이 머물고 있는데, 인간의 역사가 빠르게 지나간 흔적처럼 무대도 흩어진 나무판들과 드러난 구멍들과 함께 난장판이 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 지붕을 수리하는 듯 무대를 정돈하고 그 가운데 무덤을 발견한다. 한 인간의 온전한 뼈만 남은 사체. 그 또한 일으키자 허물어 내려앉고 뼈는 무심한 듯 치워지고 해골은 인간이 만든 역사책 위에 놓인다. 무대는 그 위에 인간을 품은 적이 없는 것처럼 처음 본래의 무성(無性) 상태로 돌아간다. 그 위에 처음의 남자가 종이 날리기 놀이를 하며 무료한 시간을 채운다. 침묵 속에서 서서히 어두워진다. 막.
작품 내내 등장하며 연기한 10명의 배우는 자체가 그림이고 훌륭하게 다듬어진 신체와 잘 훈련된 움직임의 기술이 매우 탁월하다. 더구나 서로의 몸의 조각을 이어 하나의 생명체(켄타우루스, 등)를 만들고 움직임을 이어가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진행하는 것이 마치 영상이 엮어지는 듯 했다. 수많은 나무판들과 그 밑에 수많은 비밀 구멍(trap)을 숨기고 드러내는 무대디자인과 기술, 그리고 그를 운용하는 배우들의 능력 또한 감탄하게 만든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절제되어 사용되었던 음악과 소리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음악이 시작 된지도 알 수 없이 물 스미듯 점점 들려오는 왈츠와 인간의 숨소리. 나무판을 빼고 움직이고 스치며 만들어내는 소리와 리듬도 모두 섬세하게 고안되고 계획된 음악, 안무, 연기, 연출이었다. 빛의 사용도 절제된다.
SPAF 공동제작 아시아 초연의 작품 <위대한 조련사>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폐막식을 연출한 그리스 연출가의 작품이다. 그때 감동을 받고 열심히 재방송을 녹화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은 살아 움직이는 추상미술이고 그 이미지가 담은 세계는 느낌의 언어, 울림의 언어, 사유의 언어가 되어 관객의 눈과 귀와 가슴으로 새겨진다.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떠올리고, 무엇을 인식하였든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가 의미 그대로인, 생각 그대로 즐기며 감상하는 작품. 스토리의 결과와 정답이 없는 작품. 그대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그 연출이 부러웠다. 찬사를 보낸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