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진원에 대한 사유
–연극 <미국 아버지>
신영미
작･연출: 장우재
드라마투르그: 조만수
주최/제작: 국립극단, 극단 이와삼
공연일시: 2017.9.6 – 2017.9.25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7.9.18
성경에서는 분노를 미련한 자를 죽이는 것으로, 경전에서는 삼독(三毒)의 하나로 여긴다. 종교적인 가르침에서 분노는 통제하고 경계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이나, 현 시대는 우리에게 분노를 건강하게 표출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간이 분노와 욕망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나아가 집착을 버린 정의로운 분노는 가능한 것인가? 연극 <미국 아버지>는 이와 같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2004년 5월, 무장테러단체 알카에다는 미국인 닉 버그를 참수하고 그 영상을 공개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는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다. 참수당한 닉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는 평소 반전을 외친 사회운동가로서 아들의 죽음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전쟁저지연합의 연설을 대신해 긴 분량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아들을 죽인 테러단체에 대한 분노보다 부시를 비난하는 데 무게가 실렸다. 아들을 구금하고 있던 권력은 미국 정부였고, 부시가 폭력의 세계로 아들을 밀어 넣었다는 것이 마이클의 주장이다. 작가 겸 연출가 장우재는 마이클의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미국 아버지>를 썼다.
2000년 뉴욕, 맨해튼 옆 저지시티에 사는 아버지 빌(윤상화 분)은 아들 윌(김동규 분)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 과거의 빌은 자본주의 수혜를 입은 증권맨이었으나 상사가 부탁한 부정한 일을 수락하고 자칭 똥이 되어 마약중독자로 전락했다. 택시 기사로 재기를 꿈꾸지만 잘못을 용서하는 주체가 옛 친구인 데이빗(구자승 분)임을 알고 또 다시 분노한다. 데이빗은 60년대에 빌과 함께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친구였으나, 출세를 위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긴 후 TLC위원장이 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결혼 후에도 빌의 첫사랑 낸시(박유밀 분)를 농락했기에 빌에겐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다. 빌은 실시간으로 9.11 테러를 목격하고 무역센터 안에 있던 데이빗의 죽음을 확인한 후 “잘했어, 오사마 빈라덴.”을 외친다. 이어 ‘알라의 뜻이다(A is for Allah)’에 맞춰 춤을 춘다. 그는 무역센터 밑바닥엔 인디언의 뼈가 깔려 있고, 건물이 무너지며 밑에 있는 것들이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란 전복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남수단으로 봉사를 떠난 아들 윌이 참수되자 빌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연극은 빌이 과거의 환영들과 갈등하는 과정을 거쳐 자살로 귀결되는 서사로 진행된다.
사진: 극단 이와삼 제공
연극 <미국 아버지>는 윤리의 의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증권가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윌이 누군가의 삶을 파괴한다는 자괴감에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선택한 것은 윤리의식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윌이 주장하는 윤리는 본인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걸 지키는 삶을 의미한다. 무턱대고 분노하는 아버지 빌에게 윌은 그 분노가 결국 아버지를 죽일거라 경고하고, 무엇 때문에 무엇을 미워하는 지 정확히 인지하라고 조언한다. 이러한 윌의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와 연계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모욕을 당한 당사자만이 아니라 제 3의 관찰자가 봤을 때에도 납득할 수 있는 보편성이 담보되었을 때 분노해야 한다. 분노에 무감각하면 윤리적인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도덕적 결함을 가진 것으로 치부되지만 중요한 것은 중용에 맞게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편을 나누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윌, 국가적 폭력에 분노하는 마이클 버그와 대조적으로 빌은 사적인 감정에 의해 분노한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분노 대신 용서와 관용의 자세를 강요하는 것도 빌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연출가 장우재는 타자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는 행위를 윤리로 보기에 그의 사고는 연대성을 중시한 윌의 입장에 근접해있다. 한편 자본주의를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의 꼭대기라는 빌의 이중성이 극 기저에 깔려있다. 빌은 공립학교를 지지했지만 내 아이만은 사립학교로 보내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도 좋은 차와 집을 소유하고 싶은 모순된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나아가 아들 윌이 죽은 후 아랍계 며느리인 헤바(강선애 분)와 그녀의 부모 자말(정태화 분), 데르하민(조연희 분)을 불법체류자라 모욕하며 손자 자니를 뺏는다. 자신이 받은 폭력과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키는 빌의 행동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분노(憤怒)에서 천노(遷怒)로 바뀌며 폭력의 가해자가 된 빌은 자신이 멈춰야 함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다.
빌이 자기 처벌, 또는 분노를 견디지 못해 자살로 귀결되는 과정에는 환각 상태에서 나타난 환영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연출가 장우재는 시공을 드나드는 장치로서 극중극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알콜과 마약성 섬망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과거의 것들이 출몰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미국 사회의 신자본주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빌의 양가적 감정을 파악하는 데 극중극이 효과적으로 활용되기에 이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빌이 유흥의 목적으로 코카인을 흡입했을 때, 과거의 빌인 청년 빌리(이동혁 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초반 빌리는 빌이 주시하는 대상으로만 존재하다 마약을 의존적으로 사용하게 된 단계에서는 현 존재인 빌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위치로까지 발전한다. 빌리를 비롯한 낸시와 데이빗, 죽은 윌 역시 환영으로 찾아오고 그들과 나눈 대화는 빌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윌을 남수단으로, 자니를 헤바에게 보내라고 종용하는 것도 결국 젊은 시절의 빌이다. 그들에 의해 빌은 자신이 명확한 방향성 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음을 깨닫고 죽기 직전에야 죄책감에서 만든 환영이었음을 고백한다.
사진: 극단 이와삼 제공
<미국 아버지>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기에 영상 매체를 활용한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도처에 차용되었다. 특히 무대 하수에서 윌이 참수당하는 순간, 스크린의 직관적인 영상은 실제 참수 현장을 보듯 몰입감을 준다. 커튼콜 후 극장이 밝아지고 마이클 버그의 편지가 엔딩 크레딧처럼 화면을 채우는 연출도 무대를 확장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자살한 빌 뒤로 평화를 외치는 마이클 버그의 연설 역시 관객에게 강한 미장센을 주는 연극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배경 음악인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는 환각 상태에 상응하는 분위기 조성에서 나아가 무의식과 갈등하는 이중적인 빌의 의식을 반영한다. 코카인 흡입 후 빌의 귀에만 들린 이 음악은 과거에 신경 쓰지 않고 후회 없이 시작하겠단 가사와 달리 후회와 집착으로 점철된 빌의 인생을 부각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빌이 과거의 자신인 빌리와 마주할 때나 갈등할 때 들리는 드럼 소리는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는데 기여한다. 다만 비대한 내레이션은 관객과 거리를 두기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한 작가의 훈화조로 들릴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밀도 있는 윤상화의 연기는 영웅이 아닌 인간을 그리고 싶었단 장우재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탁월했고, 그 외 배우들의 역량과 메타적 장치가 극의 완성도에 기여했기에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작품이라 판단된다.
신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전쟁, 테러 등의 거대 담론을 한 작품 안에 내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임은 분명하다. 작품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제에만 머물렀다면 거부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억압과 폭력에 분노하고 무너지는 장면을 보며 관객은 무대 위에 투영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 테러범을 용서한 마이클 버그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처럼 구조적･직접적 폭력에 분노하고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함을 설파했지만 2008년 이후 잠적했다. 연극을 통해 관객은 분노의 근원이 어디인지, 어떤 방향성을 갖고 분노해야 하는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정의로운 분노는 가능한지 등에 대해 스스로 사유할 질문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