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불씨가 된 사람들
<제향날>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채만식
연출 : 최용훈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7/10/12~11/05
공연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 2017/10/16 pm. 8:00
소설가로 잘 알려진 채만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려 30여 편에 가까운 희곡을 남긴 극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쓴 희곡 <제향날>(1937)이 80년 만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여덟 번째 작품으로 공연된 것이다. 발표 당시에 공연되지 않았던 희곡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다소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일이지만 또 그만큼 상상의 여백이 큰 작업이기에 기대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최용훈 연출의 <제향날>은 원작의 단조로운 구성과 시공간의 중첩 문제 등을 영리하게 돌파하며, 희곡 속에 갇혀 있던 역사의 불씨를 포착하고 지금-여기의 현실에 불을 지피고자 한다.
연극 <제향날>은 동학혁명과 삼일운동, 사회주의 등을 다룸으로써 식민지라는 현실적 고난과 근대적 질서의 틈입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재발견하게 한다. 망자를 위해 향을 올리는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극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오에게 할머니가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영오는 천진난만하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머니를 조르고 할머니는 동학운동을 하다 잡혀간 남편과 독립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간 아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전달해준다. 이 가족의 비극적인 내력은 한국 역사의 흐름이자, 그 속에서 시대의 억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역사의 흔적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들, 그리고 손자에게로 이어지며 대물림 되는 비극은 또 다른 손자인 상인에게로 이어진다. 연극은 ‘노구할미’의 이야기로 매조지 되는 희곡의 순서를 바꾸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상인이 무대 밖으로 나가는데서 맺고 있다. 이것은 비극의 역사가 반복 되고 있으며 그 여파가 현재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적 선택의 결과이다. 지배 권력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민중의 편에 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가혹했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작의 대사와 구조, 흐름 등을 바꾸면서 희곡 <제향날>은 연극 <제향날>로 탈바꿈했다. 원작 희곡을 읽어보면 이 이야기가 무대화 되는 데에 제약이 많다는 것을 금세 가늠할 수 있다. 할머니가 영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시간의 진행, 즉 연대기적 시간과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는 사건들의 시간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원작대로 할머니의 이야기가 영오에게 전달되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지루함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용훈 연출은 무대의 중심에 할머니와 영오를 배치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시에 이야기 속의 사건이 재현되는 방식을 택하여 극의 단조로움을 탈피한다. 같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영오는 극 중 사건을 지켜보는 목격자로 존재하게 된다. 할머니는 남편을, 아들을 빼앗겼던 그 사건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여러 번 반복 회상 되었을 이 기억이 할머니의 머릿속에 맴도는 소리(이야기 속의 사건이 끝날 때마다 할머니가 머리를 감싸며 당시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오버랩 된 소리에 반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들과 함께 무대 위에 불려나올 때, 책으로 논문으로 신문기사로, 국사 교과서로 ‘역사화’ 된 사건들이 누군가에게는 분열적으로 들러붙어 생을 지배하는 고통 자체임을 환기시킨다. 할머니에게는 이 사건들이 이미 먼 과거이고 그래서 마치 노구할미처럼 상전벽해 된 세상을 넌지시 바라보는 위치에 있어 이야기는 담담하게 전해지고 또 감정적으로 흘러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가 반복되는 한, 반복 재생되는 기억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영오가 소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로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꾸를 하는 장면이라든가,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는 장면 등에서도 최용훈 연출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자는 식민지 현실을 적절하게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다. 아마도 가장 고심했을 연출이라고 생각되는 후자의 경우, 3막에 등장하는 원시인들의 대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이미지 중심의 장면들로 대체하면서 자칫 극의 주제가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강조될 수 있는 위험성을 걷어냈다. 물론, 비극적인 가족사가 무게 있게 진행되는 와중에 무대 위쪽에서 근육질로 무장한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여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긴 했지만, 영상 이미지와 음향을 통해 인간에게 불씨를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의 선각자적 모습이 우화적으로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연극을 통해 재발견 된 것은 우리 역사에서 크게 조명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수난사, 그러나 여전히 그림자로 존재하고 또 재현되었던 그녀들의 삶이 아닐까 싶다. 이 극의 중심에는 해설자/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또한 이 집안 역사의 산 증인으로, 극 중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머니가 있다. 무대는 그녀가 지키고 있는 집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할머니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 가운데 자리를 거의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집안의 남성들이 동학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로 집을 비울 때 그녀(들)은 묵묵히 집안을 지켜내야 했다. 기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사회로 뛰쳐나가는 남성 중심의 역사란 가정에 남아 있는 여성들의 (비)자발적 무지와 눈감음, 그리고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여 계승되는 것이었다. 근대극 연구자로서 이미 희곡의 내용은 물론 당대 시대상을 잘 아는 상태로 연극을 봐서일까, 희곡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부분이 연극을 통해 전해져 왔다. 자현을 하겠다고 나서는 남편과 아들을 눈물로 붙잡는 어머니와 며느리, 다시는 집에 못 돌아올 것 같다고 남은 재산을 들고 마지막 절을 하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와 만삭인 배를 부여잡고 남편에게 매달리는 아내의 모습은 그간 우리가 역사적 사건의 재현에서 굳이 보려하지 않았던 모습들이 아닌가. 남편도 아들도 집을 나서면서 그들이 무슨 일을 위해 나서는지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녀들도 묻지 못한다. 할머니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래서 역사의 구체성보다는 기다림과 아픔, 고통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낡아빠진 집과 함께 남은 이 늙은 여성의 모습은 역사의 불씨를 간직한 채로, 자신을 관통했으면서도 그 자체가 아닌 역사를 자꾸만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제향날>은 처음 무대화 된 희곡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다시 들여다보고 곱씹는 과정에서 혹 만개했다 지는 꽃을 보느라 뿌리를, 흙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보지 못한 것들까지도 다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와 현재의 지속성을 묻는 연극은 그 존재들을 위해 가장 오래된 미래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