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극평론>> 2017년 가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뮤지컬의 공식과 ‘인간’ 나폴레옹
– 뮤지컬 <나폴레옹> –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조교수, 뮤지컬평론가)
작: 앤드류 세비스톤
작곡: 티모시 윌리엄스
연출: 김장섭
단체: ㈜쇼미디어그룹,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에스에이
공연일시: 2017/07/15-10/22
공연장소: 샤롯데 씨어터
관극일시: 2017/07/12 7pm
2017년 여름 시즌을 맞아 라이선스와 창작 양 측면에서 대극장 뮤지컬들이 제작되고 있다. <시라노>, <나폴레옹>(이상 라이선스), <아리랑>, <벤허>(이상 창작) 등의 여름 시즌 작품들은 SNS와 각종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생중계 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공연의 사전 기대감을 높이고 오픈 이후의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작품 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내 시장에서 가장 핫한 배우들 대부분이 위의 작품들에 캐스팅되어 있다. <시라노>의 홍광호, 류정한, <나폴레옹>의 마이클 리, 임태경, 한지상, 정선아, 박혜나, <아리랑>의 안재욱, 서범석, <벤허>의 유준상, 박은태, 카이, 아이비 등 제작사마다 배우 캐스팅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재연 <아리랑>을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은 국내 시장에서 가장 성공확률이 높은 고전(classic) 각색, 서양사극 계열이다.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시장의 취향을 저격하려는 전략임 셈이다. 시장의 흐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대극장 뮤지컬들의 생존 방식인 것이다.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이러한 라인업을 두고 ‘해당 작품을 왜 제작하는지’를 질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뮤지컬은 제작사의 예술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제작사의 의지와 판단에 전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해당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는 있다. 특히 <나폴레옹>과 같은 전기뮤지컬 계열의 경우, 왜 지금/여기에서 나폴레옹을 뮤지컬로 재현해야 하는지 혹은 나폴레옹과 같이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을 어떻게 뮤지컬로 최적화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공연을 통해 파악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나폴레옹과 같은 ‘프랑스 위인’이 한국 시장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가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다. 초연 <마타 하리>가 마타 하리의 인물형 구축에 실패하여, 제작사는 얼마 전 종연된 재연 당시 연출을 교체해 인물의 신파적 색채를 덜어내는 작업에 몰두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 <나폴레옹>에 이러한 서두를 붙이는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외형 상 현재 공연되고 있는 대극장 뮤지컬 중 가장 화려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지만(가령, 캐스팅의 면면을 보자. 나폴레옹에 마이클 리, 임태경, 한지상, 조세핀에는 정선아, 박혜나, 홍서영, 탈레랑에 김수용, 정상윤, 강홍석, 바라스에 김법래, 박송권, 조휘가 트리플로 캐스팅되어 있고 뤼시앙에 백형훈, 진태화, 이창섭, 정대현, 앤톤에 김주왕, 박유겸, 기세중이 포진해 있다. 현재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오롯이 뮤지컬 배우로 성장하여 실력을 인정받는 배우들과 아이돌 출신의 배우, 그리고 작년 말과 올해 초 방송되어 의외의 성과를 거둔 Jtbc팬텀싱어 출신 배우들이 한꺼번에 출연하고 있다. 이미 검증된 배우들과 이슈몰이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을 적절히 기용한 모양새다. 이러한 배우진 외에도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프랑스 왕실을 재현하는 거대 세트들과 화려한 의상 및 분장 역시 작품의 스케일을 돋보이게 해준다. 또한 ‘아시아초연’이라는 수식어 역시 공연의 무게감을 강조한다.), 위의 질문들에 작품이 제대로 답하려면 초연의 성과로는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나폴레옹>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가? 성글게 이어붙인 흔적이 역력한 드라마와, 편곡을 통해 재창작된 음악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을 찾아보려는 것이 이번 글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현장이 돌아가는 양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번 공연의 제작사 중 하나인, 게임 사업으로 시작한 ㈜이에스에이는 <나폴레옹> 제작으로 주가가 계속 상승 곡선을 타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뮤지컬은 작품성과 상관없이 어찌되었든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 ‘끝이 다 좋은’ 장르일지 모른다.
균열을 채우려는 과잉된 몸짓들
뮤지컬 <나폴레옹>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인상은 배우들의 열연이 안타깝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위 배우진 중 한지상, 박혜나, 강홍석 조합으로 관극을 했는데 이들은 연기와 노래 양 측면에서 국내 최상급 수준의 배우들임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존재하는 듯했다. 관극 내내 종잡을 수 없는 과잉된 연기 스타일이 그 이유였다고 판단된다.
특히 나폴레옹 역을 맡은 한지상은 눈빛과 태도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화술을 통해 ‘광기에 사로잡힌 나폴레옹’을 표현했는데, 그 광기는 권력욕과 정복욕, 그리고 잃어버린 조세핀을 향한 회한에까지 걸쳐 있었다. 2막에서 한지상은 객석까지 내려와 관객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이러한 나폴레옹을 정서적으로 밀착시켜 어필하려 했으나 실제 효과는 미미했다. 리드미컬한 연기에 능한 강홍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품의 나레이터이자 안타고니스트인 탈레랑은 강홍석에 의해 정치적 야망에 들끓는 막후 조종자로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안타고니스트적 그림자라는 점에서 <잭 더 리퍼>의 잭이 상기되고, 동시에 방대한 드라마를 압축적으로 전개시키는 나레이터란 점에서 <엘리자벳>의 루케니를 상기시키는 그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다루는 작품이 새로운 관점을 취할 수 있는 안전장치 같은 존재며 뮤지컬스러운 해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연기가 다소 톤다운 되었더라면, 드라마 진행의 중심축으로서 작품의 완급 조절을 섬세하게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했던 탈레랑이 작품 말미에 나폴레옹을 ‘내 영웅, 내 유일한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오래전에 잊힌 유령’으로 자조하는 모습은 따라서 결말에 맞는 ‘결말스러운’ 행동일 뿐 논리적 계기에 의한 각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조세핀을 연기한 박혜나는 인물에 자신을 완벽하게 녹여냈던 이전 작품들에서와 달리 심리적으로 다소 위축되어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팜므파탈과 희생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조세핀이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았다. 드라마의 전개 상 결국 희생되어야 하는 조세핀 연기에는 근본적으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점은 박혜나의 심리적인 위축을 더 가속화시킨 듯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은 성글게 결합되어 있는 드라마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나폴레옹> 제작발표회 당시만 해도, 이미 해외에서 <나폴레옹> 연출을 세 번이나 경험했던 리처드 오조니언이 연출을 맡고 있었고 홍승희가 협력연출을 맡아 프로덕션의 세부사항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파트너십은 오래 가지 않아 사라졌고 결국 헨리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김장섭이 연습 도중 연출을 대체하게 되었다. 대극장 뮤지컬 연출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김장섭이 임시적으로 연출직을 맡게 된 것이다. 드라마의 흐름에 일관성과 개연성이 부족한 현상은 결국 명확한 연출선과 컨셉 부재의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장면을 배우들의 과잉된 연기와 무대의 스펙터클을 동원하여 마스터 피스처럼 힘주어 표현하려고 한 것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였을 것이다.
인간적 감성을 가진 나폴레옹
그렇다면 뮤지컬 <나폴레옹>이 재현하려고 했던 나폴레옹은 어떤 존재였을까? 작품은 나폴레옹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20여 년에 걸쳐 스스로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 유럽의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손쉽게 영웅으로 신화화되던 기존의 프레임을 버리고 인간 나폴레옹을 조명하는데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이는 “(전략) 나폴레옹의 파란만장한 삶과 절대왕정을 무너트린 프랑스 시민혁명의 정신을 전 유럽에 전파시키려고 했던 그의 리더십 가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제작사의 홍보 문구가 무색해지는 이유다. 2막이 특히 나폴레옹의 내면에 집중하며 정신병적 징후마저 보이는 모습을 다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뮤지컬은 ‘인간으로 내려온 나폴레옹’을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첫째, 작품은 나폴레옹의 극한의 권력욕이 온전히 스스로의 것만은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욕망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여 자라난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는 시대의 희생양일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막후 정치가인 탈레랑은 따라서 매우 상징적인 존재다. “인간은 그의 시대를 만드는 만큼 그의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전기적 인물에 관한 유명한 명제는 탈레랑의 은밀한 조종 안에서 내내 상기된다. 어렸을 적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된 탈레랑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왜곡된 내면을 키워온 인물이다. 절름발이로서 정치판의 실력자가 되기 위해 냉혹하고 잔혹한 생존의 법칙을 터득해 온 그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는 나폴레옹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려고 한다. ‘I am the Revolution’은 나폴레옹과 탈레랑의 이러한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넘버로서, 스스로 황제가 되라는 탈레랑의 자극적인 조언을 결국 수용하는 나폴레옹을 강하게 드러낸다. 1804년 황제가 되어 제국을 건설한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의 패배로 급격하게 몰락했던 이유는 결국 나폴레옹 한 사람의 판단착오에 기인한다기보다, 인간과 시대 사이의 다이나믹스적 결과물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작품은 이렇듯 나폴레옹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평가를 유보한다.
둘째, 그러므로 주목할 것은 작품의 관심이 나폴레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닌 감성적 재현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은 두 가지 맥락 안에서 관객에게 감성적인 어필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의 휴머니스트적 면모와 조세핀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라는 측면이다. ‘뭣도 아닌 놈’이었던 코르시카 하급 장교가 프랑스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냉혹한 정치적 술수가 아닌 ‘휴머니스트적 면모’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은 나폴레옹의 품성을 강조한다. 앤톤과의 에피소드는 이러한 나폴레옹을 보여주기 위한 대표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앤톤이 나폴레옹의 충직한 병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함께 참전했던 병사 하나하나를 기억할 정도로 병사들을 향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전쟁 참전을 두고 두려워하는 앤톤에게 ‘잠들어 있는 영웅을 깨’워 ‘삶을 바꾸는 의지’를 발동시키자고 독려하는 장면은 앤톤이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탈레랑의 아유를 살만큼 숭고하게 표현되는 이 장면은 나폴레옹의 정치적 수완이 탈레랑과 달리 따뜻한 감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인간적 면모는 조세핀과의 관계를 통해 2막에서 더욱 강조된다. 작품은 조세핀과의 이혼이 나폴레옹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레랑의 술수로 벌어진 일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끝없이 조세핀을 그리워하다가 엘바섬을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이룩한 것도, 결국 조세핀의 죽음으로 ‘승리의 여신’을 잃은 나폴레옹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행한 일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 개념화된다. 역사적 사실을 비틀어서 사건을 추동시킨 인물의 내면을 강조하는 방식인 것이다.
셋째, 이렇듯 나폴레옹의 내면을 다루는 새로운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왜 작품에 견인되기가 힘들까? 이는 아마도 전형적인 뮤지컬의 공식이 작품의 감성적 전환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이 많은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내적인 성찰을 생략한 채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심지어 그 순수한 에너지로 주변의 갈등을 해결하는 패턴을 보여준다는 점은 그의 인간적 면모가 인물의 구체적인 특수성으로 인식되지 않는 이유다. ‘밑바닥 출신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갈 수 있다는 꿈’이 결국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 ‘혁명은 평민에게 왕관을 수여한다’는 신념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뮤지컬의 클리셰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급박한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조세핀과의 이혼 그리고 그 이후의 정신적 붕괴 과정 역시 끝나버린 사랑으로 방황하는 수많은 남성 캐릭터 모델이 상기되는 낯익은 모양새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형의 자장 안에서 조세핀 역시 나폴레옹을 끊임없이 긴장시켰던 실존 인물의 캐릭터 대신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캐릭터로 변모되어, 뮤지컬의 젠더적 관심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나폴레옹>의 주요 인물들은 이렇듯 뮤지컬의 공식화 과정을 거치며 캐릭터 본연의 특수한 매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을 마냥 비관적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김성수 음악감독 특유의 폭넓은 원곡 해석력과 특히 교향곡 스타일의 장중한 음악들은 캐릭터의 이미지와 드라마의 전개를 잘 담아내고 있어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재연 당시 제대로 업그레이드되어 기사회생했던 쇼미디어그룹의 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나폴레옹>의 부활을 꿈꾸는 것은 무리일까? 작품 한 편에 들어간 많은 인력들의 에너지가 쉽게 사장되지 않고 좋은 작품의 탄생을 통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