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평문은 <공연과 이론>(통권 68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내밀하고 은밀한 시선을 위하여
-사막별 오로라의 <Make up to Wake up2>
장윤정(연극평론가)
90년대 대중문화 속 ‘걸파워’는 현재 ‘걸크러쉬’문화로 치환되었다. ‘걸파워’가 남성적 기준의 미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그와 동시에 여성의 사회문화적 억압에 대해 적극적인 항변을 하는 여성으로 의미된다면, 현재의 ‘걸크러쉬’문화는 그보다 좀 더 복잡하다. 남성적 기준의 미(美)를 거부하고 거기다 지금껏 남성의 역사로 구축되었던 사회·경제적 범주마저 넘보는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한편, 사회·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동시에 나이 차가 무색할 정도의 연하 남성들과 적극적인 연애와 결혼을 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전자와 후자는 이전의 여성들이 감히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개척정신으로 동일한 ‘걸크러쉬’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자든 후자든 자신은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하는 지점이다. 다만 전자와 후자 여성들의 차이를 아름다운 외모 유무로 구분하고 평가하는 미디어의 발견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 지점은 사회·경제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지 못하면 연애 및 결혼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은밀히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걸파워’, ‘걸크러쉬’, 사회·경제적 능력이 있음에도 아름답지 못해서 결혼할 수 없다는 대중적 인식 형성의 저변에는 자본주의로 점철된 대중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걸크러쉬’라는 명칭이 대중매체 속을 떠돌아다녀도 여전히 대중매체는 은밀하게 혹은 버젓이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들이 어떠한 투철한 변혁 정신으로 ‘걸크러쉬’문화를 선도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않는 것은 일견 타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걸크러쉬’라는 명칭 하에 페미니즘적 사유를 제한하도록 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걸크러쉬’를 지지하지만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하는 이들의 태도는 무엇에서 비롯되었을까? 페미니스트라면 으레 고리타분한 이론과 서적들로 중무중하여 결코 이성적으로 매력이 없을, 혹 매력이 있다 해도 그 고리타분한 이론들 때문에 매력이 반감될 이들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게 조성된 것일까. 대중매체에서 묘사되고 있는 페미니스트의 형상은 일관되게 유사하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보아야 할까. 그와 더불어 대중매체에서 끊임없이 표상되는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찌되었든 ‘걸크러쉬’든 페미니스트든 여성으로서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미덕은 동일하게 요구된다는 점은 주지해야할만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객관화하여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아름다움이라는 그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성질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 등장하였다. 창작집단 사막별의 오로라의 <Make up to Wake up2>다. 이 작품은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의 기준 속에 들어맞기 위해 온 몸으로 온 몸을 검열하는 여성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사실 창작집단 사막별의 오로라의 이 같은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올해 3월에 <Make up to Wake up>으로 외모강박과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여성의 자아 및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김정, 황은후 두 배우는 스스로 페미니즘 연극을 창작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스트라 말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반갑기 그지없는 행보다. 이들은 여타 연출들이 제공하는 한정된 여성캐릭터의 세계관을 벗어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여성의 문제와 여성이 직접 그리는 여성캐릭터의 세계 형성을 위해 창작집단 사막별의 오로라를 창단하였다. 이번<Make up to Wake up2>는 그러한 세계관 형성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리를 활보하는 행동의 위험성
<Make up to Wake up2>는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가상의 사회적 상황을 끌어들였다. 작품의 서사를 관통하고 있는 사건은 ‘하이드비하인드’라고 하는 미네소타주의 전설을 차용한 여성실종사건이다. 하이드비하인드는 말 그대로 등 뒤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 실체 없는 괴물이 일자눈썹을 하거나 트렌드에 뒤떨어진 여성을 납치해간다는 재미난 발상에서 서사는 진행된다. 하이드비하인드의 등장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 가꾸기에 더 적극적이고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 과정에 ‘새뷰티운동본부’가 신설되었고 이들은 여성들에게 납치의 위험이 오히려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기회라는 도착적인 태도로 외모 가꾸기를 주창한다. 마치 히틀러가 철저히 미디어를 이용하여 전체주의를 형성했듯이 이들의 운동방식 또한 미디어를 이용하여 강력한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써 미(美)에 대한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모습은 가히 70년대의 ‘새마을운동’ 못지않게 대대적인 운동으로 형상화된다. 이외에도 ‘나는 뷰티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모습을 통해 철저히 상업적인 대중매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과연 어디까지 가학적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전기 충격기를 스스로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대거나 스스로 자신의 몸에 송곳을 찌르는 등의 행위로써 풍자를 넘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미(美)의 거대한 무게를 가늠하게 만들고 그들의 행위에 그 어떤 제지 없이 태연히 진행되는 방송행태는 더불어 씁쓸함을 유발한다. 거기다 결국 쥬쥬인형이 뷰티퀸을 수상하게 되는 것에서 아무리 피나게 노력해도 결국 타고난 유전자는 이길 수 없음을 시사한다. 쥬쥬인형은 타고난 아름다운 유전자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상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쥬쥬인형의 수상은 의미심장하다. 바비인형 류는 여아들의 젠더의식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젠더적 편견을 깨기 위한 인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미녀’ 바비인형 류가 여아들의 여성성 형성에 한 몫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아름다운 쥬쥬인형이 무대 위 TV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써 대중매체를 통해 형성되는 미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그 미라는 것은 상업적 가치를 보유한 미를 의미한다. 그러나 <Make up to Wake up2>는 영원히 늙지 않으며 아름다운 쥬쥬인형마저도 종래에 가서 하이드비하인드에 의하여 사라지게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시대변화에 따라 유행하는 형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쥬쥬인형으로부터 아름다움의 범주에서 밀려났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의미에서 사라졌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작품 말미에 뷰티퀸인 쥬쥬인형마저 사라졌고 범국가적으로 공인된 것 같았던 ‘새뷰티운동본부’도 그저 한낱 화장품회사와의 결탁으로 이윤을 남기기 위한 계략이었음이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에서 허탈한 것은 순진하게 믿고 따랐던 여성들이다.
<Make up to Wake up2>에 등장하는 실제 세계는 거리의 세계다. 무대 위의 TV화면에 실제 거리가 등장하면 두 여성 인물들도 거리를 걷는다. 이 여성들이 거리를 걸을 때, 때때로 극 중에서 대중가요가 흘러나오곤 하는데, 특히 공연이 시작되며 흘러나오는 들국화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중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행복한 건 나’라는 부분이 작품 전반에 반복되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아름다운 존재와 행복한 존재가 분리되면서 정작 아름다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하여 반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노래를 비롯하여 여러 시대별 대중가요가 혼합되어 흘러나오고, 각 가사에는 하나같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 및 당부가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에 대한 아름다움의 요구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런 여성의 미(美)에 대한 상업적 태도와 여성을 섹슈얼한 이미지로 표상하고 성적 대상화하려는 태도가 시대초월적임을 발견하게 한다. 극 중에서 읽혀지는 대중소설의 한 대목 또한 마찬가지다. 한 여성의 매력에 매료된 남성이 그 여성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철저히 남성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한 매력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들이 배경으로 등장할 때 무대 위에 등장한 여성인물들은 끊임없이 자기 확인 작업을 한다. 이들은 집에서 수없이 여러 번 옷들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어설프고 부족한 자기검열의 시간을 가진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도한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지만 서로를 의식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게다가 뒤를 돌아보는 행동을 반복한다. 두 여성은 두 번 거리에서 마주치는데, 첫 만남에서는 하이힐에 완벽한 옷차림을 한 후 서로 경쟁하듯 의식하며 스쳐지나간다. 이때 이들의 태도는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하이힐도 벗어던진 채 서로 마주하며 서로의 미숙한 외모치장과 트렌드에 뒤떨어진 모습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조언을 해준다. 그 후 이들이 서로 제 갈 길을 가는데 전보다 더욱 불편하고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태도를 취한다. 결국 이들 중 한명은 하이드비하인드에 의하여 사라지고 만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시사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하이드비하인드는 실체 없는 시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리야말로 무방비상태로 나를 온몸으로 노출해놓는 장소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은 이상 시선에 가장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곳은 나의 등 뒤다. 하이드비하인드는 그렇게 내가 볼 수 없는 곳인 내 등 뒤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으며, 그 곳곳의 시선들은 결코 내가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서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나의 신체를 향해 있음을, 거리 위 이 두 여성인물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극 중에서 하이드비하인드에 의하여 신체적 고통을 겪은 이들이 호소하는 증상 또한 하나같이 실체 없는 주변시선들을 의식하여 스스로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치를 떨었던 경험과 유사하게 표현된다. 결국 무대 위 여성인물들은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선 속에서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관리’라는 것을 행한다. 늘 줄자로 몸을 분절하여 재고 초코파이와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며 이들은 자기검열 태도를 통해 마치 아름다움이 여성의 본능과 의무이면서 희열과 자유까지 선사해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이며, 언제부터의 본능이었는지, 자유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 허락되는 자유임을 확인하게 한다는 지점이다. 이들의 언행은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의문과 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비현실적이고 재미난 표현력으로 손뼉치고 웃게 만들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현실적인 문제의식이 때때로 드러나 심정적으로 불편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여성이 꿈에서 줄자나무에 몸이 매달리거나 초코파이를 미세하게 분절하여 부스러기만 핥아먹고도 희열을 느끼는 모습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비극적으로 느껴지도록 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줄자나무의 줄자가 온 몸을 옥죄어드는데 차라리 그 속에서 포기하고 춤을 추기로 한 것과 작은 초코파이 부스러기에서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태도에서 사회문화적 미의 기준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나쁜 것은 이 미의 획득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태도다. 극 중에서 단식을 통해 마른 몸매를 이룬 여성은 “모두가 날 욕망의 눈으로 쳐다보고 나는 그런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미의 획득이 곧 권력의 획득임을 깨달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 미를 권력화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신체를 그러한 권력획득을 위한 도구로 대상화하는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부당한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보다는 어느새 스스로 그 규범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역설적으로 도구화하여 도리어 권력으로서 행사하고자 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그 권력이 실제로 사회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통용된다는 점일 것이다. <Make up to Wake up2>는 이렇게 사회의 문제를 거론하는 동시에 여성 자신에 대한 문제 지점 또한 발견하도록 한다.
시선과 빛의 이중적 태도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선택’하기
이제 페미니즘과 포스트 페미니즘, 세 번째 물결 페미니즘까지 이르는 시대가 되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과거의 페미니즘이 요구하던 거대담론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는 고루한 피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 개인을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라고 외치다 최근 뭇매를 맞고 있는 추세다. 물론 이제는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 과거 페미니즘의 거대담론에 묻힌 개인을 발견해야 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과연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대로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 문제들은 모두 해결되었는가? 페미니즘은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로 구분되고 연대되는 성질의 것인가?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 세 번째 물결 페미니즘은 포스트 페미니즘이 단절과 분절로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것을 물결로써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제기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이 선택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면 세 번째 물결 페미니즘은 이제 선택의 ‘행위 그 자체’를 조명한다. 지금은 분명 여성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로서 살 것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딜레마는 존재한다. 이 ‘선택의 행위’는 결코 강요되지 않은 선택인 것인가. 사회가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가능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는 과연 어떠한 윤리적 행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 가운데에 페미니즘을 주창하면서도 젠더적 측면에서 여성적인 기호들을 선호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되는 것인지 딜레마를 겪고 있다. 물론 세 번째 물결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그런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를 제안한다.
그렇다면 <Make up to Wake up2>에서 나타나는 ‘선택’은 어떠한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선택’은 세 번째 물결 페미니즘보다 더 강력하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빛’은 여성들의 신체를 조명하며 동시에 ‘시선’의 역할을 한다. 특히 어두운 극장 공간 안에서 완전히 은폐된 위치의 관객석이 철저히 일방적인 시선으로 무대 위 빛에 노출된 여성인물들을 바라보는 행동에서 관객으로부터 시선의 강박을 형성하는 위치와 그 강박에 몸부림치는 인물들의 위치를 경험하게 하고 확인하게 한다. 무대 위에 떨어지는 핀 조명 속 여성 인물들은 때때로 환희에 찬 모습이거나 몸을 웅크리고 긴장하는 모습이곤 하는데 이 ‘빛’은 시선인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자 미의 기준으로 상징된다. 이 빛은 이율배반적인 역할을 하는데, 빛의 범주 밖으로 이탈되는 것은 여성들에게 공포스러운 일이면서 동시에 빛 속에 있는 것 또한 여성을 옥죄는 일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여성이 빛과 어둠을 자유롭게 가르며 춤을 추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사회문화적 규범이 정해놓은 기준을 용기 내어 이탈하기를 선택한 이들인 것이다. 작품은 그렇게 사회의 미적 기준을 이탈하여도 전혀 문제되지 않음을 보여주며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어둠 속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행위에서 여성의 연대행위를 확인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이들이 어둠 속에서 유유히 춤을 추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하이드비하인드로부터 납치된 여성을 연상하게 만드는데, 어쩌면 극 중 내내 하이드비하인드로부터 사라졌던 여성은 사실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어둠을 선택한 여성들이었을지 모름을 사유하게 만든다. 더불어 쥬쥬인형도 87년간의 외모 품평 사회 속에 지쳐 스스로 어둠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Make up to Wake up2>는 여러모로 재미와 의미를 전달하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사회현상에 대하여 풍자와 통찰력 있는 시사점들을 제시하는 동시에 여성 스스로에게도 자기반성의 태도를 취하게 한다. 무대 위 두 여성인물들이 행하는 행동들은 보통의 여성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 그대로와 같다. 그 어떤 정치적 의도 없이 일상적인 여성들의 삶 그대로를 무대 위로 올려놓은 것이 곧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동시에 씁쓸한 지점이다. 여성관객들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자기 검열을 끝없이 하고 무엇을 먹든 칼로리부터 따지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성들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반문하게 된다. 무엇을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인지 재확인하며 혹시 스스로가 육체자본으로 사회·경제적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유하게 만든다. 그와 함께 남성 또한 여성들의 내밀한 삶의 모습을 관찰하며 이들을 이만큼이나 불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지 사유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트 오를랑(Saint Orlan)은 여전히 아직 한국 사회에선 치명적이지 못하다. 생트 오를랑은 남성주의적 미의 기준에 항거하듯 스스로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의 이마에 뿔을 심었다. 여러 번의 가학적 성형수술과 오리엔탈 이미지를 합성한 자신의 사진을 통해 전형화된 미의 기준에 대하여 파격적이고 통렬하게 비판중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수면 아래에 존재한다. 왜일까? 한국의 지하철 차 내 광고판에는 수많은 성형외과 광고가 걸려있다. 버스 내에서는 성형수술과 피부과 홍보 음성이 특정 지역에 도달할 때마다 흘러나온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특정 지역에서는 성형수술을 위해선 지금 여기서 내리라고까지 권고한다. 일상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들에게 외모 가꾸기를 요구하고 제안한다. 은밀하고 내밀하게 자리 잡은 외모지상주의는 더 깊이 파고들자면 자본주의의 물신주의와 맞닿아있다. 그것은 또 자연히 기업과 광고, 셀러브리티라는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그 모든 것을 혼합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연예인이 성형외과 광고를 하는 버스 외곽 벽면 광고판’ 하나로 설명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미국 못지않게 셀러브리티 저널리즘에 도취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느 신문사는 직접적으로 연예인 전문 파파라치 사진을 보도하는 회사임을 스스로 표방한다. 어느 순간 헐리웃 배우들의 전유물이던 파파라치 사진들은 국내 연예매체들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주 보편적인 언론 행태로 자리 잡았다. 인터넷 언론매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 그만큼 연예인의 영향력은 전보다 더욱 커지고 말았다. 연예인의 외모는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그 모든 기준과 시선들로부터 연예인 본인까지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본을 획득하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선 어느 누구도 즐거울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는 여전히 천편일률적인 미를 송출하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여성연예인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걸크러쉬’리고 외치며 등장한 이는 애초에 없었다. ‘걸크러쉬’라는 용어는 매체가 만들어낸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여성연예인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걸크러쉬’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기에 애초에 ‘걸크러쉬’ 같은 것은 없었다. 국내 문화계 내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스스로 ‘걸크러쉬’임을 인지하고 행위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대중매체는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트렌드를 자체 생산해내고, 자본주의는 이해관계의 범위 내에 그 트렌드를 흡수해나갔다. 부당한 미의 기준과 외모지상주의에 과열된 현상이 부조리한 사회규범 때문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리기엔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이 이렇게 얽혀있다. 이 거대한 문제의 덩어리를 풀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현재 <Make up to Wake up2>는 다소 그 사회현상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는 면이 있다. 이들에게 어떠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단번에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젯거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현상을 확인했다면 이후의 행보에서는 그보다 한 발 나아가 우리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떠한 윤리적 선택의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그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기까지 어떠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인지, 더불어 이것이 결코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임을, 나아가 그래서 이것이 세대와 성별을 떠난 문제현상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창작집단 사막별의 오로라는 페미니즘 연극을 조명한다는 의지가 강하고, <Make up to Wake up>작품과 <Make up to Wake up2>작품을 거치면서 점차 극단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분명 앞으로도 무수한 문제의식을 다룰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Make up to Wake up2>는 반가운 작품이었다.